프라이버시는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타깃은 임신 예측 쿠폰을 무관한 상품 사이에 섞어 보냈다
2018년 1월 스트라바 히트맵이 외국군 기지의 둘레를 그려냈을 때, 유출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병사들이 조깅했을 뿐이다. 프라이버시를 '숨길 것을 숨길 권리'로 보면 이런 사고도, "떳떳하면 숨길 게 없다"는 반론도 감당하지 못한다. 헬렌 니센바움의 맥락적 온전성은 침해를 다시 정의한다 — 정보가 새서가 아니라, 한 맥락의 규범에 맞게 준 정보가 다른 맥락으로 건너가기 때문에 침해다.
2018년 1월, 캔버라의 한 대학생이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운동 기록 앱 스트라바가 두 달 전에 공개한 전 세계 히트맵이었다. 사람들이 달리고 자전거 탄 경로를 전부 겹쳐서 밝기로 표시한 지도다. 도시는 하얗게 빛났고 사막은 검었다. 그런데 시리아와 사하라의 검은 바탕 위에, 민간인이 살지 않는 자리에 또렷한 고리와 직선이 떠 있었다. 스무 살의 나단 루서는 그게 뭔지 알아봤다. 외국군 기지의 둘레였고, 순찰로였고, 보급로였다. 아무도 해킹당하지 않았다. 기밀을 흘린 사람도 없었다. 병사들이 조깅을 했고, 앱이 그 기록을 모아 예쁜 지도를 만들었을 뿐이다. 미국 국방부는 곧 장비 사용 지침 검토에 들어갔다. 비밀이 새서 생긴 사고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새지 않았는데 생긴 사고였다.
이 글의 주장은 한 문장이다. 프라이버시는 숨길 것을 숨기는 권리가 아니라, 한 사람이 맥락마다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도 침해는 일어난다.
무해한 조각들이 사람이 되는 순간
2006년 8월, AOL 리서치 팀이 검색 기록을 연구용으로 공개했다. 이용자 657,426명의 질의 약 2천만 건. 이름은 지우고 번호로 바꿨으니 괜찮다고 판단했다. 며칠 만에 뉴욕타임스 기자들이 4417749번을 찾아냈다. 조지아주 릴번에 사는 62세 과부 텔마 아널드였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지역 이름, 반려견 품종, 몇 가지 병명, 같은 성씨 여럿. 조각을 모아 전화번호부를 뒤졌더니 사람이 나왔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각각의 질의가 전부 무해했다는 점이다. 손 저림 증상을 검색하는 일에는 숨길 것이 없다. 개 산책 이야기에도 없다. 그런데 그 무해한 조각들을 쌓으면 한 사람의 몸과 마음과 주소가 나온다. 대니얼 솔로브는 2007년 논문 「나는 숨길 게 없다」에서 이것을 집적(aggregation)이라 부르며, 저 흔한 반론이 왜 애초에 질문을 잘못 잡았는지를 짚는다.

"떳떳하면 숨길 게 없다"는 말은 프라이버시를 비밀 감추기로 전제한다. 그 전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논쟁은 끝난다. 남는 질문은 "그래서 네가 감추는 나쁜 짓이 뭐냐"뿐이니까. 솔로브는 전제 자체를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감시 사회의 진짜 그림은 오웰이 아니라 카프카다. 『심판』의 요제프 K를 짓누른 것은 감시받는다는 위축감이 아니었다. 어떤 기관이 자기에 관한 정보로 자기 삶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리는데, 정작 자기는 그 과정에 끼어들 수도 알아볼 수도 없다는 무력감이었다. 문제는 정보를 모으는 단계가 아니라 처리하는 단계에 있다. 집적, 2차 이용, 배제. 여기에 대고 "나는 떳떳하다"고 말해봐야 아무 대답도 되지 않는다.
유출이 없어도 침해는 일어난다
헬렌 니센바움은 2004년 논문과 2010년 책 『맥락 속의 프라이버시』에서 이 문제를 다시 정의했다. 프라이버시는 비밀도 아니고 통제권도 아니다. 정보가 적절하게 흐르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적절함의 기준은 보편적이지 않다. 맥락마다 다르다.
의료라는 맥락에는 의료의 규범이 있다. 나는 의사에게 몸에 관해 거의 다 말하지만, 그 정보가 의사에서 보험사로, 보험사에서 고용주로 흐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정보의 내용은 똑같은데 흐름의 경로가 달라졌을 뿐이다. 니센바움은 이 흐름을 정보 주체, 발신자, 수신자, 정보 유형, 전송 원칙의 다섯 요소로 뜯어본다. 이 중 하나만 바뀌어도 사람들은 침해를 느낀다. 그리고 그 느낌은 대개 옳다.

이 관점에서 보면 스트라바 사건이 정확히 읽힌다. 병사들의 달리기 기록은 운동이라는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그 맥락 안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기록을 공개 지도로 합치는 순간 그것은 군사 정보의 맥락으로 옮겨 갔다. 유출은 없었다. 규범이 다른 맥락 사이를 정보가 건너갔을 뿐이다. 침해란 정보가 새는 사건이 아니라, 한 맥락의 규칙에 따라 준 정보가 다른 규칙의 맥락에서 쓰이는 사건이다.
무대 뒤가 사라지면 관계도 사라진다
왜 맥락이 그렇게 중요한가. 어빙 고프먼이 1959년에 답을 반쯤 해뒀다. 그는 사회생활을 무대에 비유하면서 앞무대와 뒷무대를 나눴다. 앞무대에서 사람은 예의와 역할에 맞게 자기를 관리한다. 뒷무대는 그 공연을 준비하고 쉬는 곳이다. 고급 식당의 홀과 주방을 떠올리면 된다. 중요한 건 뒷무대가 위선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뒷무대가 있어야 앞무대가 성립한다. 주방을 없앤 식당은 정직해지는 게 아니라 그냥 문을 닫는다.
앨런 웨스틴은 1967년 『프라이버시와 자유』에서 프라이버시를 네 상태로 나눴다. 고독, 친밀, 익명, 유보. 이 목록에서 눈여겨볼 것은 친밀이다. 웨스틴에게 친밀이란 소수의 사람들끼리 격리되어 편안하고 솔직한 관계에 이르는 상태다. 즉 친밀함은 프라이버시의 반대가 아니라 프라이버시의 한 형태다.
여기서 논지가 분명해진다. 친밀함은 상대가 나를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아는 상태다. 차등이 있어야 친밀함이 있다. 모두가 내 모든 것을 아는 세계에는 친구도 연인도 없고, 의사에게 털어놓는 일도 고해성사도 없다. 전부 같은 정보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관계의 층이 생기지 않는다.

프라이버시를 지운다는 것은 나쁜 짓을 못 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줄지 내가 고를 수 없게 만든다는 뜻이고, 그 선택이 곧 관계다.
1890년 보스턴, 그리고 딸의 결혼식이라는 거짓말
이 문제는 데이터 시대의 것이 아니다. 1890년 12월 15일, 새뮤얼 워런과 루이스 브랜다이스는 하버드 로 리뷰 4권 193면에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실었다. 미국 법에서 프라이버시를 독립된 권리로 주장한 최초의 글이다.
즉석 사진과 신문 산업이 사적이고 가정적인 삶의 신성한 영역을 침범했다. (…) 골방에서 속삭인 것이 지붕 위에서 외쳐질 것이다.
그들을 자극한 것은 두 가지 기술이었다. 카메라가 삼각대를 떠나 손에 들리기 시작했고, 신문은 남의 사생활을 파는 산업이 됐다. 워런과 브랜다이스는 "가십은 더 이상 한가하고 악한 자들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뻔뻔함과 근면함으로 추구되는 하나의 업(業)이 되었다"고 썼다.
여기서 통념 하나를 걷어내자. 이 논문의 계기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이야기가 있다. 워런의 딸 결혼식에 기자들이 몰려들어 그가 격분했다는 것이다. 법학자 윌리엄 프로서가 퍼뜨린 판본이다. 그런데 사실이 아니다. 켄 고믈리가 1992년 논문에서 짚었듯, 1890년 당시 워런의 딸은 여섯 살이었다. 여섯 살짜리의 결혼식은 없었다. 워런을 격분시켰다고 지목되곤 하는 보스턴의 새터데이 이브닝 가제트는 1883년부터 1890년까지 그의 이름을 딱 두 번 언급했고 둘 다 무난한 내용이었다. 에이미 가이다가 보스턴·뉴욕·워싱턴 신문 약 60건을 뒤져 찾아낸 것은 단발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보도였다. 워런 가족의 사적인 일상과 집안의 비극을 사교란이 오래 따라다녔다.
계기가 결혼식 한 번이 아니라 누적된 보도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고증 문제가 아니다. 논지를 바꾼다. 워런과 브랜다이스가 문제 삼은 것은 허위 보도가 아니었다. 기사들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사실이어도 침해였다. 프라이버시 논쟁의 출발점에서 이미 "숨길 게 없으면 괜찮다"는 논변은 무력했던 것이다.

내가 동의해도 남이 벗겨진다
프라이버시를 개인의 선택 문제로 보는 습관도 걷어내야 한다. 2018년 4월 24일, 캘리포니아에서 조지프 제임스 디앤젤로가 체포됐다. 1970~80년대에 최소 13건의 살인과 50건이 넘는 강간을 저지른 골든스테이트 킬러로 지목된 전직 경찰관이다. 수사팀은 범죄 현장의 DNA를 가계도 사이트 GEDmatch에 올려 8촌, 10촌쯤 되는 먼 친척들을 찾아냈고, 족보를 가지에서 가지로 따라 내려가 그에게 닿았다.
디앤젤로는 아무것도 업로드하지 않았다. 자기 유전자를 어디에도 제공한 적이 없다. 그를 노출시킨 것은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들이 자기 뿌리가 궁금해서 한 선택이었다. 야니브 에를리히 연구팀이 2018년 사이언스에 낸 논문은 이 구조를 수치로 보여준다. 128만 명의 소비자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유럽계 미국인에 대한 검색의 약 60퍼센트가 8촌 이내의 친척과 일치할 것으로 추정됐다. 연구팀은 머지않아 거의 모든 유럽계 미국인이 이 방식으로 특정될 수 있다고 봤다.
동의의 단위는 개인인데 정보의 단위는 개인이 아니다. 유전자는 가족 전체의 것이고, 주소록은 거기 적힌 사람들의 것이다. 앱에 연락처를 넘기는 사람은 자기 정보만 넘기는 게 아니라, 그 앱을 쓴 적도 없는 사람들의 관계망과 전화번호를 함께 넘긴다. 업로드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그림자 프로필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프라이버시는 각자 알아서 관리하는 개인 재산이 아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내 몫이 달린 집합적인 조건이다. 골든스테이트 킬러 사건이 좋은 결말이었다는 점이 오히려 이 사실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좋은 목적에 쓰였다고 해서 구조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타깃이 쿠폰을 섞어 넣은 이유
2012년 2월,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찰스 두히그의 기사가 실렸다. 대형 유통업체 타깃이 구매 기록으로 임신을 예측한다는 내용이었고, 미니애폴리스의 한 아버지가 십 대 딸에게 온 유아용품 쿠폰을 들고 매장에 항의하러 왔다가 나중에 딸이 실제로 임신 중이었음을 알게 됐다는 일화가 붙어 있었다. 이 일화는 이후 십 년 넘게 데이터 시대의 상징처럼 인용됐다.
그런데 검증이 안 된 이야기다. 에릭 시걸은 2014년에 이 일화의 근거가 없으며 사실상 반증되었다고 정리했다. 전해 들은 이야기였고, 타깃의 예측 프로그램이 원인이었다는 연결 고리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일화를 걷어내고 나면 훨씬 흥미로운 사실이 남는다. 시걸이 지적한 대로, 타깃은 임신 관련 상품을 우편물에 그대로 싣지 않고 무관한 상품들 사이에 섞어 배치했다. 잔디깎이 옆에 유아용 로션을 놓는 식이다. 받는 사람이 "얘들이 알고 있구나"라고 느끼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 설계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회사는 알고 있었다. 정보가 맥락을 건너는 순간 문제가 된다는 것을. 임신 사실 자체는 몇 달 뒤면 누구나 알게 될 일이고, 그런 뜻에서 대단한 비밀도 아니다. 그러나 그 정보가 언제 누구를 거쳐 집안의 식탁에 도착하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 회사는 "숨길 게 없으면 괜찮다"는 논변을 공개적으로는 부정하지 않으면서, 실무에서는 그 논변이 틀렸다는 전제 위에서 우편물을 설계했다. 사람들이 화를 내는 지점이 예측의 정확도가 아니라 정보의 도착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야 한다. "너는 무엇을 숨기고 있나"가 아니라 "이 정보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나"다. 앞의 질문에는 결백을 증명하는 사람만 남고, 뒤의 질문에는 규범을 따질 수 있는 시민이 남는다. 커튼을 치는 사람은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어서 치는 게 아니다. 거실에서 하는 일과 길에서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둘이 달라도 되기 때문에 친다. 그 차이를 지키는 일이 프라이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