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미는 어디서 시작되나 — 모호함은 결함이 아니다
국제천문연맹의 2006년 행성 정의는, 선을 긋는 그 결의문의 각주에서 이미 '경계에 걸친 천체'를 처리할 별도 절차를 예고했다.
1998년 6월 17일, 미국 국립보건원이 과체중 기준선을 체질량지수 25로 내렸다. 아무도 살이 찌지 않았는데 수천만 명이 하룻밤에 과체중이 됐다. 모래알 몇 개부터 더미인가를 묻는 2,300년 된 역설은 말장난이 아니라, 연속적인 세계를 유한한 머리로 다룰 때 반드시 남는 자국이다. 정밀화는 모호함을 없애지 않는다 — 자의적인 한 지점으로 옮길 뿐이다.
1998년 6월 17일, 워싱턴. 미국 국립보건원이 성인 과체중·비만 진료 지침을 발표했다. 숫자 하나가 바뀌었다. 과체중의 기준선이 체질량지수 27 언저리에서 25로 내려갔다. 지침 본문은 이렇게 적었다. 과체중은 체질량지수 25에서 29.9, 비만은 30 이상. 그날 아무도 살이 찌지 않았다. 밥을 더 먹지도, 몸무게가 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침에 정상이던 미국인 수천만 명이 저녁에는 과체중이 되어 있었다. 당시 보도들은 새로 편입된 인원을 2,500만에서 2,900만 명 사이로 어림했고, 지침 자체는 전체 과체중·비만 인구를 9,700만 명으로 집계했다. 몸은 그대로인데 이름이 바뀌었다. 이 글은 그 어긋남이 행정의 실수가 아니라, 연속적인 세계를 유한한 머리로 다루려 할 때 반드시 남는 자국이라는 이야기다.
2,300년 된 농담
어긋남 자체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발견됐다. 밀레토스의 에우불리데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가 만든 문답형 논변을 나열한다.
에우클레이데스의 후계자 중에 에우불리데스가 있었는데, 그는 문답 형식의 논변을 여럿 만들었다. 거짓말쟁이, 숨은 사람, 엘렉트라, 베일 쓴 사람, 더미, 뿔 달린 사람, 그리고 대머리다.
여기 끼어 있는 '더미'가 그리스어로 소로스(soros)다. 소리테스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논변은 우습도록 단순하다. 모래알 하나는 더미가 아니다. 더미가 아닌 것에 한 알을 더해도 여전히 더미가 아니다. 그러니 둘도, 셋도, 만 개도 더미가 아니다. 결론이 틀렸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런데 전제 중 어느 것이 틀렸는지는 아무도 못 짚는다.

고대인들은 이 논변이 늘 쌍으로 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더해가는 방향이 있으면 덜어가는 방향이 있다. 만 개는 더미다. 한 알을 빼도 더미다. 그러니 한 알도 더미다. 대머리와 숱 많은 사람, 가난과 부유, 적음과 많음이 전부 같은 구조에 걸린다. 회의주의자들은 이걸 스토아학파의 지식 주장을 두들기는 몽둥이로 썼다. 스토아 쪽의 대응은 두 겹이었다고 전해진다. 실천적으로는 애매한 구간에 들어서면 대답을 멈추라는 것, 이론적으로는 '더미'에 정확한 경계가 있긴 한데 우리가 그것을 발견할 수 없을 뿐이라는 것. 뒤엣것은 2,000년 뒤에 다시 살아난다.
선을 그으면 해결된다는 착각
가장 흔한 반응은 이것이다. 말이 헐거워서 생긴 문제니까 정확히 정의하면 된다. 몇 알부터 더미인지 정해라. 몇부터 과체중인지 정해라. 실제로 정해본 사람들이 있다. 결과를 보자.
유럽경제공동체는 1988년 오이 규격을 법으로 못 박았다. 규정 1677/88은 특급과 1등급 오이가 "실질적으로 곧아야" 한다고 쓴 뒤 괄호를 열었다. 길이 10센티미터당 휘어진 활의 높이 최대 10밀리미터. 2등급은 20밀리미터까지 봐준다. 왜 10인가. 이유는 없다. 9도 11도 아니고 10이다. 이 조항은 2008년 규정 1221/2008로 폐지됐다.

미국 빈곤선은 더 기묘하다. 1963~64년 사회보장청 경제학자 몰리 오션스키가 만들었다. 농무부의 '경제 식단' 비용에 3을 곱했다. 3이라는 숫자는 1955년 가계 식품소비조사에서 나왔다. 3인 이상 가구가 세후 소득의 약 3분의 1을 식비로 썼다는 관찰. 참고로 2인 가구 승수는 3.7이었다. 곱하기 3은 원리가 아니라 한 시점의 관찰이다. 그런데 그 3이 60년 넘게 누가 가난한지를 결정해왔다.
국제천문연맹은 2006년 행성을 정의했다. 태양 주위를 돌 것, 자체 중력으로 둥글어질 것, 궤도 주변을 청소했을 것. 명왕성이 세 번째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결의문에서 정말 봐야 할 곳은 본문이 아니라 각주다.
경계에 걸친 천체를 왜소행성으로 분류할지 다른 범주로 분류할지는 국제천문연맹이 별도의 절차를 만들어 정한다.
선을 긋는 바로 그 문장에, 선에 걸리는 것들이 있을 테니 나중에 위원회를 만들겠다는 말이 붙어 있다. 이것이 정밀화의 정직한 자화상이다. 정밀화는 모호함을 없애지 않는다. 자의적인 한 지점으로 옮기고, 그 지점 근처의 모호함은 다시 다른 기구에 떠넘긴다.
체질량지수 25도 같다. 세계보건기구 전문가 회의의 권고를 미국이 받아들인 것인데, 25.0인 사람과 24.9인 사람 사이에 의학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는 없다. 차이는 보험 청구 코드와 통계표에 있다. 자연의 이음매가 아니라 행정의 이음매다. 생물학도 다르지 않다. 종이라는 기본 단위조차 합의된 정의가 없어서, 2007년 한 종합 논문은 앞선 조사에서 이름 붙은 종 개념이 24개까지 헤아려졌다고 적었다.
더 흥미로운 건 정밀화 이후에 벌어지는 일이다. 제한속도 시속 80킬로미터인 도로에서 81로 달린 차를 실제로 세우는 나라는 거의 없다. 측정 오차를 감안한 허용 구간이 있고, 그 위에 단속 재량이 있다. 법은 숫자로 선을 긋고, 집행은 그 선 주변에 다시 부드러운 띠를 만든다. 선을 지우는 쪽도 마찬가지다. 2008년 유럽연합이 26개 품목의 규격을 폐지하겠다고 했을 때, 27개 회원국 중 16개국이 반대표를 던졌다. 농민 단체가 내놓은 우려는 정확히 이것이었다. 유럽 기준이 사라지면 회원국마다 제 기준을 만들고 민간 기준이 난립하리라는 것. 자의적인 선 하나를 없앤다고 모호함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선이 여러 개로 늘어날 뿐이다.
경계는 있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
정밀화가 답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20세기 후반 철학은 세 갈래로 갈렸고, 세 갈래 모두 무언가를 내놓아야 했다.
첫째는 인식론적 해법이다. 팀 윌리엄슨이 1994년 책 『모호함』에서 밀어붙인 입장. 주장은 도발적이다. '더미'에는 정확한 경계가 이미 있다. 몇 번째 모래알에서 더미가 시작되는지 사실이 정해져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수를 알 수 없다. 모호함은 세계의 흐릿함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다.

왜 알 수 없나. 윌리엄슨은 오차 허용 원리를 든다. 어떤 판단이 운이 아니라 앎이려면, 아주 조금 다른 경우에도 견뎌야 한다. 태어난 지 n일 된 사람이 아이임을 내가 안다면, n+1일에도 아이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운 좋게 맞힌 것뿐이다. 이 조건이 살아 있는 한 경계를 정확히 아는 일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대가는 크다. 이 입장은 고전 논리를 통째로 지킨다. 모든 문장은 참이거나 거짓이다. 대신 세계 안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앞서 말한 스토아의 두 번째 대응이 2,000년 만에 정식 이론으로 돌아온 셈이다.
모든 정밀화에서 참이면 참이다
둘째는 초평가주의다. 킷 파인이 1975년 『신테제』 논문에서 정리했다. 발상은 우아하다. 모호한 말은 여러 방식으로 정밀화될 수 있다. 어떤 정밀화에서든 참인 문장은 참, 어떤 정밀화에서든 거짓이면 거짓, 갈리면 참도 거짓도 아니다.
덕분에 묘한 것을 살릴 수 있다. 키가 애매한 사람을 두고 "그는 크거나 크지 않다"는 문장은 여전히 참이다. 어디에 선을 긋든 둘 중 하나에는 들어가니까. 반면 "그는 크다"도 참이 아니고 "그는 크지 않다"도 참이 아니다.

대가는 진리 개념 자체다. 어떤 문장이 참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 문장을 그냥 말하는 것이 갈라선다. 귀류법과 대우처럼 익숙한 추론 규칙 일부도 포기해야 한다. 무엇보다 고차 모호성이 남는다. '더미'가 모호하면 어떤 정밀화가 허용되는지도 모호하다. 경계의 경계, 그리고 그 경계의 경계.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한 층 위로 올라간다.
셋째는 다치논리다. 참과 거짓 사이에 0과 1 사이의 무한한 눈금을 두는 것. 직관에는 가장 잘 맞는다. 모래알 500개는 0.4쯤 더미다. 하지만 여기서도 정확한 선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미임의 정도가 0.5인 지점과 0.51인 지점 사이에 정확한 경계가 생긴다. 선 하나를 지우려다 무한히 많은 선을 얻는다.
모호한 건 말인가 세계인가
그럼 모호함은 언어의 성질인가, 세계의 성질인가. 구름의 가장자리는 실제로 흐릿한가, 아니면 '구름'이라는 말이 어느 물방울까지 포함할지 정하지 않았을 뿐인가.
1978년 가레스 에반스가 『애널리시스』에 한 쪽짜리 논문을 실었다. 제목은 「모호한 대상이 있을 수 있는가」. 논증은 짧다. a와 b가 같은지 여부가 세계 쪽 사정으로 미결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b에게는 'a와 같은지가 미결인 대상'이라는 성질이 있다. 그런데 a에게는 그 성질이 없다. a가 a와 같은지는 미결일 수 없으니까. 성질이 다르면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a와 b는 다르다. 미결이라고 했는데 결판이 나버렸다.
반론이 많고 지금도 논쟁 중이다. 그리고 중요한 단서가 있다. 에반스가 닫은 것은 동일성이 미결일 수 있느냐는 문 하나지, 세계에 모호한 대상이 있느냐는 물음 전체가 아니다. 최근에는 형이상학적 미결정성을 고전 논리 안에서 옹호하는 시도들도 나와 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이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언어 쪽에 선다. 이유는 절약이다. 세계에는 특정 위치의 특정 모래알들이 있고, 각 알의 위치는 원리적으로 확정적이다. 모호한 것은 그 배치를 '더미'라는 한 단어로 묶는 우리의 분류다. 러시아어 화자는 밝은 파랑과 어두운 파랑에 각각 다른 단어를 쓴다. 2007년 실험은 그들이 두 단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색 구별을 실제로 더 빨리 해낸다는 것, 그리고 그 이점이 말로 하는 방해 과제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보였다. 빛의 파장은 연속적이다. 끊는 것은 어휘다.
유한한 존재의 장비
여기까지 오면 질문이 뒤집힌다. 왜 우리 언어는 이 결함을 못 고쳤을까가 아니라, 왜 이 구조를 끝내 버리지 않았을까.
답은 그것이 결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호한 술어는 압축이다. 눈앞의 광경을 '더미'라고 부를 때 우리는 모래알 개수를 세지 않는다. 셀 필요도 없고 셀 수도 없다. 모호함은 정보를 버리는 대가로 즉시 쓸 수 있는 판단을 준다. 연속적인 세계와 유한한 머리 사이에서 그건 결함이 아니라 접속 장치다.

물론 선을 그어야 할 때가 있다. 보험금을 주려면 기준이 있어야 하고, 제한속도 없는 도로는 위험하다. 요점은 선을 긋지 말자가 아니다. 선을 그은 뒤에 그 선이 자연에서 온 것처럼 굴지 말자는 것이다. 체질량지수 25는 발견이 아니라 결정이었다. 명왕성은 2006년에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오이는 1988년에도 2009년에도 똑같이 휘어 있었다.
2,300년 전 농담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건 언어의 버그 리포트가 아니다. 사양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