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 무엇을 위해 지어졌나 — 유물을 지키려던 게 아니었다
유물을 지키려던 게 아니었다
분더캄머의 열쇠는 주인이 쥐고 있었고, 루브르는 왕정이 끝났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문을 열었다. 대영박물관은 무료였지만 편지로 관람권을 신청하고 옷을 갖춰 입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공공 박물관의 200년은 보존의 역사이기 전에 국민을 만들고 관람객을 훈련시킨 장치의 역사였다. 오늘의 반환 논쟁은 바로 그 양면 위에 서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저절로 목소리를 낮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손을 뒤로 모으고, 유리장 앞에서 반걸음쯤 물러서고, 앞사람의 속도에 자기 보폭을 맞춘다. 이 몸가짐은 유물에서 나오지 않는다. 건물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건물은, 적어도 처음에는, 유물을 지키려고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호기심의 방에는 문지기가 있었다
16세기부터 유럽의 군주와 학자와 약제사들은 방 하나를 통째로 세계의 축소 모형으로 만들었다. 분더캄머, 호기심의 방이라 불린 그 공간의 목록은 대체로 네댓 갈래로 나뉘었다. 자연이 만든 것, 사람이 만든 것, 측정하고 관측하는 도구, 먼 땅에서 온 것, 그리고 어느 칸에도 들어가지 않는 경이. 1655년에 나온 덴마크 학자 올레 보름의 소장품 목록은 광물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동물로, 마지막에 인공물로 올라간다. 물건을 모은 것이 아니라 세계의 순서를 주장한 것이다.

1599년 나폴리의 약제사 페란테 임페라토가 자기 책에 실은 판화는 그 방의 생김새를 알려주는 가장 이른 그림으로 꼽힌다. 박제 악어가 천장 한가운데 매달려 있고, 볼트 천장은 물고기와 짐승과 조개껍데기로 빈자리 없이 덮여 있으며, 벽면은 잠글 수 있는 장과 책장으로 채워져 있다. 빈틈이 없다는 것 자체가 메시지였다. 이 방은 세계를 빠짐없이 담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그 방의 열쇠는 주인이 쥐고 있었다. 관람은 권리가 아니라 호의였고, 자주 외교였다. 사절을 방에 들여 진열장을 열어 보이는 일은 나의 재력과 학식과 손이 닿는 세계의 범위를 한 번에 증명하는 행위였다. 먼 땅에서 온 물건이 유독 값나갔던 이유도 거기 있다. 그것은 나의 배가 어디까지 갔다 왔는지를 말없이 말해주는 물증이었다. 박물관의 조상은 보관소가 아니라 응접실이다.
궁전이 국민의 것이 되던 날
1793년 8월 10일, 루브르 궁의 대회랑이 공화국 중앙예술박물관으로 열렸다. 날짜가 우연일 리 없다. 정확히 1년 전 그날 혁명군이 튈르리 궁을 습격했고 왕정은 사실상 끝났다. 첫 카탈로그에 오른 것은 회화 537점과 그 밖의 물품 124점. 왕과 귀족과 교회의 것이던 물건들이 하룻밤 사이에 국민의 재산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수집품이 새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소유자가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야말로 전시의 요점이었다. 왕과 그 손님들만 보던 것을 이제 누구나 본다는 광경보다 왕정이 끝났음을 잘 설명하는 장치는 없었다.
개관 초기의 관람 일정은 열흘을 한 주기로 삼은 공화력을 따랐다. 앞쪽 며칠은 모사하러 오는 화가와 외국인의 몫이었고, 일반 공중에게 돌아온 것은 끝의 사흘이었다. 그림은 이탈리아, 프랑스, 플랑드르, 네덜란드처럼 유파별로 걸렸다. 벽에 걸린 것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국가별로 정렬된 문명의 계보였고, 그 계보의 마지막 칸에 프랑스 공화국이 서 있었다. 이어진 나폴레옹 시대에 관장 비방 드농은 원정군을 따라다니며 유럽 각지에서 작품을 골라 파리로 실어 보냈다. 전시장은 곧 전승 보고서이기도 했다.

'공중'에게는 자격이 필요했다
영국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1753년 한스 슬론은 유언으로, 의회가 2만 파운드를 치르면 수집품을 나라에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의회는 법을 만들어 값을 지불하고 대영박물관을 세웠다. 1759년 1월 15일 문을 열었을 때 입장료는 없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미리 편지로 관람권을 신청해야 했고, 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 했다. 하루에 내주는 관람권은 몇 장 되지 않았다. 방문객은 다섯 명씩 조를 짜 사서의 인솔을 받으며 정해진 동선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사회가 내세운 이유는 사람이 몰리면 소장품이 상한다는 것이었다. 보존은 그렇게, 관람을 제한하는 근거로 먼저 등장한다. 규정이 눈에 띄게 느슨해진 것은 1830년대에 들어서다. 무료였지만 열려 있지는 않았다.
수집의 출처도 함께 봐야 한다. 슬론의 수집은 1687년 자메이카행에서 시작됐다. 그는 식민지 총독의 주치의로 건너가 노예 농장의 의사로 일하며 표본을 모았고, 훗날 그의 재산에는 자메이카 농장에서 나오는 수입이 섞여 있었다. 대영박물관은 근래 창립 기증자의 흉상을 원래 자리에서 옮기고 이 맥락을 함께 설명하기로 했다.
관람객을 훈련시키는 기계
1845년 영국 의회는 큰 도시들이 박물관을 세울 수 있게 하는 법을 통과시킨다. 그해 3월 의사록을 읽어보면 논의의 축은 유물 보존이 아니다. 공장 노동이 만들어낸 여가 시간을 노동자들이 술집에서 쓰고 있다는 걱정이었다. 박물관은 그 시간을 대체할 건전한 오락으로 제안됐다. 다만 정작 노동자가 쉬는 유일한 날인 일요일에 문을 열자는 제안은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노동자를 위한 시설이라면서 정작 노동자가 갈 수 있는 시간에는 문을 닫아둔 셈이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는 이 기획의 정점이었다. 다섯 달 남짓 동안 600만 명이 넘게 다녀갔고, 그중 450만 명가량은 1실링짜리 저가 입장일에 몰린 사람들이었다. 공장에서 단체로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문화연구자 토니 베넷은 1988년 논문에서 이 무렵 박물관과 박람회와 미술관이 하나의 전시 복합체로 묶였다고 봤다. 감옥이 사람을 가두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동안, 전시장은 사람을 모아 서로가 서로를 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관람객은 전시물만 보지 않는다. 잘 처신하는 옆 사람을 보고 자기 몸가짐을 스스로 단속한다. 유리장은 유물을 지키는 동시에, 손을 뻗지 않는 사람을 만든다.

미술관은 무대와 대본을 제공하고, 의례를 수행하는 것은 방문객 자신이다. 미술사학자 캐럴 던컨의 표현을 빌리면 그 의례를 마친 사람은 잠깐 '이상적인 시민'의 자리에 올라선다.
그래도 장부의 반대쪽
여기서 멈추면 절반만 본 것이다. 같은 제도가 실제로 해낸 일도 장부에 남아 있다. 목록과 등록번호, 온습도 관리, 그냥 두었으면 흩어졌을 물건의 존속, 돈을 내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전시장, 공개된 연구 자료. 슬론이 유언에 적어둔 조건 자체가 "누구나 무료로 들어올 수 있는" 기관이었다는 사실도 장부의 이쪽 편에 놓인다. 오늘날 연구자들이 슬론 소장품을 다시 뒤져 그 표본 하나하나에 자메이카의 노예와 원주민이 제공한 지식과 노동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밝혀낼 수 있는 것도, 그가 남긴 기록이 폐기되지 않고 목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제도는 자기를 고발할 증거까지 보관한다.

20세기 후반에는 관람의 문법 자체가 흔들렸다. 196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프랭크 오펜하이머가 문을 연 익스플로라토리엄은 만지고 켜고 끄고 바꿔볼 수 있는 장치들로 전시를 채웠다. 뮌헨의 도이체스 무제움 같은 선례에서 배운, 유리장을 걷어내는 실험이었다. 이후 전 세계의 과학관이 이 문법을 가져갔고, 관람객은 처음으로 손을 뻗어도 되는 사람이 됐다. 물론 체험이 만능은 아니다. 버튼을 누르는 몸도 결국 누군가 설계한 동선 위에 있고, 관람객이 스스로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느끼도록 짜인 각본은 그 자체로 더 정교한 대본이다. 유리장을 없앤다고 대본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2022년 프라하에서 국제박물관협의회가 92퍼센트가 넘는 찬성으로 채택한 새 정의는 이 변화를 문장으로 굳혔다. 줄이면 이렇다.
박물관은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 상설 기관이며, 대중에게 열려 있고 접근 가능하고 포용적이어야 하며, 공동체의 참여와 함께 운영된다.
보존과 연구 옆에 참여와 윤리와 지속가능성이 나란히 들어갔다. 200년 걸린 문장이다.
돌려달라는 말은 오래된 말이다
반환 요구가 최근에 생긴 정서라는 인상은 틀렸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연합국은 그의 군대가 유럽 각지에서 실어 간 미술품을 돌려놓으라고 요구했다. 교황청은 조각가 카노바를 파리로 보내 작품을 되찾게 했고, 드농은 마지막까지 내주지 않으려 버텼다. 유럽은 유럽 안에서 약탈품은 돌려준다는 규범을 스스로 만들었다. 문제는 그 규범을 바깥으로 확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비대칭이 다시 문제가 된 것은 2018년이다. 프랑스 정부가 의뢰한 보고서에서 펠윈 사르와 베네딕트 사부아는 프랑스 공공 소장품에 아프리카 유물이 최소 9만 점, 그중 7만 점 이상이 케 브랑리 박물관에 있다고 정리하고, 목록을 공개하고 반환 절차를 만들자고 권고했다. 반발도 컸다. 소장 경위를 하나하나 따지는 일은 수십 년이 걸리고, 물건마다 사연이 다르다는 반론이었다. 실제로 그 뒤의 사례들은 뭉뚱그려지지 않는다.
두 개의 유명한 사건은 성격이 다르다. 1897년 영국군이 베냉 왕궁을 공격하고 왕을 유배시킨 뒤 청동과 상아 유물을 가져간 경위 자체는 사실관계로 다투는 사안이 아니다. 독일은 2022년 1,130점의 소유권을 나이지리아에 넘기기로 합의하고 그해 12월 20점을 먼저 인계했고, 네덜란드는 2025년 6월 119점을 조건 없이 돌려보내며 1897년 베냉시티 공격 때 약탈된 것이라고 문서에 명시했다. 지금 논쟁 중인 것은 돌아간 유물을 나이지리아 안에서 누가 보관하고 어디에 전시하느냐다.
파르테논 조각은 다르다. 19세기 초 엘긴 백작은 오스만 당국의 허가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원본 허가서는 발견된 적이 없고 이탈리아어 번역본만 남아 있으며 문구는 모호하다. 대영박물관 측은 그 문서가 반출까지 허용했다고 읽고, 그리스 측은 점령국이 남의 유산을 넘길 권한 자체가 없었다고 본다. 이 건은 아직 어느 쪽으로도 정리되지 않았다.

박물관이 유물을 지키려고 생겼다는 말은 결과를 원인으로 바꿔 읽은 문장이다. 보존은 나중에 붙은 임무였고, 처음에 있던 것은 정렬된 진열장 앞에 사람을 세워두고 무엇을 자기 것으로 느끼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러니 반환 논쟁은 물건의 주소만 묻는 게 아니다. 유리장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대본을 연기하고 있다. 그 대본은 이제 누가 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