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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문화]2026-09-069분 읽기

규칙은 왜 지켜지는가 — 놀이의 안쪽

놀이의 안쪽

상금도 심판도 없는 자리에서 아이들은 뜻도 모르는 금지어를 외치며 그 금지를 지킨다. 하위징아는 놀이가 진지한 것의 준비운동이 아니라 법과 의례가 태어난 자리라고 봤고, 슈츠는 게임을 불필요한 장애물을 자발적으로 넘으려는 시도라고 정의했다. 놀이를 현실과 갈라놓는다던 '매직 서클'은 치팅과 하우스룰과 판돈 앞에서 계속 새는 중이다. 규칙을 붙드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같이 하기로 한 합의라는 이야기.

스위스 뇌샤텔의 보도블록 위에는 분필로 그린 네모가 있었다. 그 안에 구슬 몇 개를 놓고, 아이들은 멀찍이서 자기 구슬을 굴려 안의 것을 밖으로 밀어냈다. 심리학자 장 피아제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 물었다. 규칙이 뭐니. 누가 정했니. 바꿔도 되니. 아이들은 놀라울 만큼 정교한 법체계를 읊었다. 처음 던진 선으로 돌아가려면 "코슈"라고 외쳐야 하고, 자리를 옮기려면 "뒤 미앵"이라 선언해야 하며, 손을 구슬과 함께 끌고 나가는 반칙은 "팡-푸세트"라 부른다. 이 '팡'은 프랑스어 défendu, 즉 '금지'에서 닳아 떨어져 나온 조각이다. 그런데 몇몇 아이는 그 말을 못 알아듣고 "팜므-푸세트"라고 했다. 뜻을 모르는 단어를 외치면서, 아이들은 그 금지를 한 치도 어기지 않았다.

이 장면에는 상금이 없다. 심판도 없다. 어른도 보지 않는다. 걸린 것은 유리구슬 몇 알뿐이고, 그마저도 잃어도 그만이다. 그런데 왜 지킬까.

준비운동이라는 오해

가장 흔한 대답은 이렇다. 놀이는 연습이다. 아이는 규칙 있는 게임을 통해 사회의 규칙을 미리 익히고, 어른이 되면 진짜 규칙의 세계로 진입한다. 놀이는 진지한 것의 앞마당이라는 얘기다.

1938년 요한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에서 뒤집은 게 정확히 이 순서였다. 그는 첫 문장부터 놀이가 문화보다 오래되었다고 못 박는다. 동물은 인간이 가르쳐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놀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나열한 목록이 도발적이다. 법과 질서, 상업과 이윤, 기술과 예술, 시와 지혜와 과학이 모두 놀이라는 원시의 토양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 준비운동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말이다.

dkdk가 굵은 나무 밑동에 놀이라 적힌 팻말을 꽂는데, 그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 끝에 법정 망치와 가면이 열려 있다
그림 1준비운동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말이다

경기장, 카드 테이블, 매직 서클, 신전, 무대, 스크린, 테니스 코트, 법정은 모두 형식과 기능에서 놀이터다. 금지되고 고립되고 울타리 쳐지고 신성해진 자리, 그 안에서만 특별한 규칙이 통하는 곳.

이 문장에서 눈에 걸리는 단어는 '법정'이다. 하위징아는 재판을 놀이에 비유한 게 아니라, 둘의 형식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썼다. 시간과 공간을 잘라내고, 그 안에서만 통하는 절차를 세우고, 참가자가 그 절차에 복종하기로 먼저 동의한 뒤에 시작하는 것. 법정과 씨름판은 같은 문법을 쓴다.

불필요한 장애물

그러면 그 문법의 핵심은 무엇인가. 1978년 철학자 버나드 슈츠가 내놓은 정의가 지금까지도 가장 짧고 가장 잘 버틴다. 게임을 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장애물을 자발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다.

골프를 생각하면 된다. 목표는 작은 공을 구멍에 넣는 것이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공을 집어 들고 걸어가서 손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규칙은 그 방법을 금지하고, 대신 수백 미터 밖에서 막대기로 때려 보내라고 요구한다. 슈츠가 지적한 건 이 금지의 이상한 지위다. 규칙은 효율적인 수단을 막고 비효율적인 수단만 남긴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그 규칙을 바로 그것이 이 활동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받아들인다. 슈츠는 이 마음가짐을 '루소리 애티튜드'라 불렀다. 규칙에도 불구하고 노는 게 아니라, 규칙 덕분에 놀이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로제 카유아가 놀이를 '파이디아'에서 '루두스'로 이어지는 축 위에 놓은 것도 같은 이야기다. 소란스럽고 즉흥적인 뒤엉킴에 제약을 얹으면, 인내와 계산이 필요한 무언가로 굳는다. 제약이 놀이를 방해하는 게 아니라 놀이를 조각한다.

dkdk가 평평하고 텅 빈 바닥 위에 스스로 장애물을 하나씩 세워 놓고, 옆으로 돌아가면 되는데도 굳이 그 위를 넘는다
그림 2제약이 놀이를 방해하는 게 아니라 놀이를 조각한다

슈츠가 이 정의를 담은 책의 제목은 『베짱이』다. 일하지 않고 놀다 죽는, 이솝 우화에서 늘 지는 쪽. 슈츠는 그 베짱이를 변호하려고 사고실험을 하나 세운다. 모든 필요가 충족된 유토피아에서 인간에게 남는 활동은 무엇인가. 먹을 것을 구할 필요도, 무언가를 고칠 필요도 없다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수단이 무의미해진다. 남는 것은 오직 스스로 목적을 만들고 스스로 그 길을 어렵게 만드는 일뿐이다. 즉 게임이다. 놀이가 진지한 일의 준비운동이라는 통념을 이보다 세게 걷어차기도 어렵다. 슈츠에게 게임은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이 해결된 뒤에도 유일하게 남는 것이었다.

원은 계속 샌다

여기까지가 오래된 그림이다. 놀이는 현실에서 분리된 원 안에 있고, 그 안에서 다른 규칙이 잠시 주권을 갖는다. 이른바 '매직 서클'이다. 다만 이 말은 하위징아가 지나가듯 몇 번 쓴 표현이었고, 개념으로 굳힌 건 2003년 케이티 살렌과 에릭 짐머만이었다.

그리고 굳자마자 새기 시작했다. 2009년 미아 콘살보는 아예 「매직 서클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반박했다. 그가 파고든 통로는 치팅이었다. 사람들이 왜 속이는지, 무엇을 속임수로 치는지 들여다보면 게임 바깥의 사정 — 시간이 없어서, 친구를 이기고 싶어서, 돈으로 계정을 샀기 때문에 — 이 게임 안으로 줄줄 흘러든다. 콘살보의 결론은 단호했다. 게임 안에서 현실의 규칙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현실의 규칙에 더해서 게임의 규칙이 작동하고, 둘은 경쟁한다.

새는 구멍은 더 있다. 율리안 퀴클리히는 게임을 개조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의 시간을 '플레이버'라 이름 붙였다. 자발적으로 바쳐지는 동시에 임금이 없고, 즐거운 동시에 착취당하는, 놀이도 노동도 아닌 무엇. 판돈이 걸리면 놀이는 경제가 되고, 대리 육성과 아이템 거래가 붙으면 그 원은 이미 반쯤 시장이다.

dkdk가 바닥에 분필로 그린 원 안에 서 있는데 원 선 밖으로 물이 새어 나가고, 반대편에서는 동전이 원 안으로 굴러 들어온다
그림 3그 원은 이미 반쯤 시장이다

그렇다고 원이 허구인 것도 아니다. 야코 스텐로스는 2014년에 매직 서클을 옹호하면서, 이 경계선의 성격을 다시 규정했다. 그것은 담장이 아니라 사회적 계약이다. 벽이라서 튼튼한 게 아니라 합의라서 유지된다. 그래서 언제든 협상되고,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규칙서보다 강한 규칙

계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규칙서가 왜 자주 지는지도 설명된다. 모노폴리를 해본 사람은 대개 무료 주차 칸에 벌금이 쌓이고 그 칸을 밟으면 몽땅 가져간다고 알고 있다. 공식 규칙서에는 그런 조항이 없다. 그런데도 그 규칙은 수십 년째 전 세계 거실에서 살아남았다. 우리 집 규칙이 홍보물보다 강한 것이다.

dkdk가 저울 한쪽에 두꺼운 공식 규칙서를 올리고 반대쪽에 손으로 쓴 쪽지 한 장을 올렸는데 쪽지 쪽이 내려간다
그림 4우리 집 규칙이 홍보물보다 강한 것이다

성문화는 오히려 예외적인 사건이고, 대개 낯선 사람과 놀아야 할 때 벌어진다. 피아제가 관찰한 뇌샤텔에서도 2~3킬로미터 떨어진 네 개 코뮌의 구슬치기 규칙이 서로 달랐다. 잉글랜드의 축구도 학교마다 다른 관습으로 갈라져 있었고, 졸업생들이 같이 차려면 공통 코드가 필요했다. 1863년 케임브리지에서 규칙이 정리되고 그해 12월 축구협회가 경기 규칙을 인쇄해 내놓은 건, 진리를 발견해서가 아니라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한 경기장에 서기 위해서였다.

최선을 다한다는 조항

2012년 런던, 배드민턴 여자 복식 조별리그.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졌다. 선수들이 서브를 일부러 네트에 처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랠리는 몇 번 오가지도 못하고 끝났고, 심판이 코트로 내려와 경고를 줬지만 소용이 없었다. 조 순위를 조정해 8강에서 더 쉬운 상대를 만나려는 계산이었다. 토너먼트 구조 자체가 그 계산에 보상을 주고 있었으니, 이건 경기를 하는 대신 대진표를 플레이하는 일 — 전형적인 메타게임이었다.

여기서 결정적인 대목은, 그날 어떤 성문 규칙도 위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브 높이도, 코트 규격도, 득점 방식도 전부 지켜졌다. 그럼에도 세계배드민턴연맹은 중국·한국·인도네시아 선수 여덟 명을 실격시켰다. 근거는 선수 행동강령 4.5조와 4.6조,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과 "종목에 명백히 해가 되는 행위"였다.

행동강령에 저런 조항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규칙서가 규칙이 아닌 것을 규칙으로 적으려 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하기로 한 약속. 하위징아는 규칙을 어기는 사람보다 놀이를 깨는 사람이 훨씬 미움받는다고 관찰했다. 속임수를 쓰는 자는 적어도 원을 인정하지만, 흥을 깨는 자는 원 자체를 부수기 때문이다. 그는 원 안에 함께 갇혀 있던 세계가 얼마나 얄팍했는지를 폭로한다.

다시, 분필로 그린 네모

피아제가 아이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규칙을 더 잘 지킨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 반대에 가깝다. 어린아이는 규칙을 신성하고 손댈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어른이 정했고 영원하다고 믿는다. 그러다 어느 시점을 지나면 태도가 뒤집힌다.

피아제가 만난 한 아이와의 대화가 그 전환을 통째로 보여준다. 새 규칙을 만들 수 있겠니.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답했다. 발로 차는 걸로 할 수도 있죠. 그게 공정하니. 모르겠어요. 그냥 제 생각이에요. 다른 애들한테 보여주면 통할까. 통할 거예요. 해보고 싶어 하는 애도 있을 거고,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애도 있겠죠. 자기가 불리해진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럼 모두가 네 방식대로 놀게 되면. 아이의 대답은 이랬다. 그럼 그건 다른 규칙들과 똑같은 규칙이 되는 거죠.

dkdk가 분필로 그린 네모의 한쪽 선이 발에 문질러져 지워졌고, 그 앞에 멈춰 서서 지워진 자리를 내려다본다
그림 5우리가 같이 하기로 했던 무언가가 깨진 것에 화가 났나

규칙은 상호 동의에서 나온 법으로 여겨진다. 성실하려면 지켜야 하지만, 모두의 찬성을 얻는다는 조건에서는 바꿔도 되는 것.

규칙을 바꿔도 된다는 걸 아는 순간에 오히려 규칙을 더 존중하게 된다는 것. 처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함께 정한 것이기 때문에 지킨다는 것. 아무 이득도 없는 제약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정색하는 일이 인간이 하는 가장 이상한 짓 중 하나라면, 그 이상함이 법정과 의례와 무대의 형식을 낳았다는 하위징아의 주장은 갑자기 덜 낭만적으로 들린다.

뜻도 모르는 금지어를 외치며 구슬을 굴리던 아이들은, 사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세계를 세우고 그 세계의 시민이 되기로 한 것이다. 다음에 누군가 규칙을 어기는 걸 보고 화가 난다면 한 번 물어볼 만하다. 나는 지금 규정이 깨진 것에 화가 났나, 아니면 우리가 같이 하기로 했던 무언가가 깨진 것에 화가 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