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2.2026 / --:-- KST
[철학·윤리]2026-09-2210분 읽기

트롤리 문제 — 전차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2008년, 이 문제에 이름을 붙인 톰슨은 "레버를 당겨서도 안 된다"며 자기 답을 뒤집었다

필리파 풋은 1967년 낙태 논쟁에서 이중효과 원리가 버티는지 시험하려고 전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원리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반세기 뒤 남은 것은 4천만 건의 설문 응답과, 육교 시나리오를 읽고 웃었다는 참가자 63퍼센트다. 도구가 질문을 잡아먹은 과정을 따라가 본다.

2008년 2월 9일, 일흔여덟의 주디스 자비스 톰슨이 대학원생들 앞에 섰다. 그가 30년 넘게 끌고 다닌 문제, 세상이 그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그 문제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였다. 청중은 익숙한 결론을 기대했을 것이다. 다섯을 살리려 레버를 당기는 건 괜찮고, 육교에서 사람을 밀어 떨어뜨리는 건 안 된다는 그 유명한 비대칭 말이다. 톰슨은 정반대를 말했다. 레버를 당겨서도 안 된다. 스위치 옆에 선 구경꾼이 선로를 바꿔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기가 치르기 싫은 비용을 남에게 떠넘기는 일이며, 그건 허용될 수 없다. 그 강연을 고쳐 써 낸 논문에서 그는 심리학자들이 모으고 있던 설문 데이터를 언급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사우스 리저널 고등학교 3학년 93퍼센트가 레버를 당겨도 된다고 답했다고. 괄호를 열고 한 줄. 방금 지어낸 통계지만, 대충 저 언저리일 것이다.

트롤리 문제를 만든 사람은 그 문제의 표준 정답을 뒤집었고, 그 문제로 수집된 통계를 농담거리로 썼다. 그런데도 트롤리 문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굴러간다. 심리학 실험실에서, 자율주행차 세미나에서, 유튜브 밈에서. 이유는 간단하다. 트롤리 문제는 애초에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원리를 시험하는 도구였고, 도구가 설문지가 되는 순간 시험 대상이던 원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낙태 논쟁에서 태어난 전차

1967년, 필리파 풋이 옥스퍼드 리뷰 5호에 논문 하나를 실었다. 제목은 "낙태 문제와 이중효과 원리". 전차라는 단어는 제목에 없다. 첫 문장도 전차가 아니라 태아 이야기로 시작한다. 우리는 태어날 아기에게 어른의 권리를 주고 싶기도 하고 주고 싶지 않기도 하다는 것, 그 혼란이 어디서 오는지가 풋의 출발점이었다.

풋이 겨냥한 건 가톨릭 신학이 낙태 논쟁에서 방패로 쓰던 이중효과 원리였다. 사람이 자기 행동의 결과로 예견하는 것과 엄밀한 의미에서 의도하는 것은 다르다는 원리. 자궁을 들어내면서 태아의 죽음을 예견하는 것과, 태아를 직접 죽여 산모를 살리는 것은 다르다는 논리. 비가톨릭 철학자들에게 이건 오래전부터 말장난처럼 보였다. 풋도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그 말장난을 걷어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들이 쏟아진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쌍으로 된 사례들이다. 폭주하는 전차의 운전자가 다섯 명이 일하는 선로에서 한 명이 일하는 선로로 핸들을 꺾는 경우. 그리고 폭도가 인질 다섯을 잡고 범인을 내놓으라 할 때 판사가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 처형하는 경우. 숫자는 똑같이 하나 대 다섯이다. 그런데 우리는 전차 운전자는 당연히 핸들을 꺾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판사에 대해서는 경악한다. 왜인가. 풋이 던진 건 이 질문이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가 아니었다.

여기서 통념 하나가 깨진다. 풋의 전차에는 스위치도, 구경꾼도 없었다. 핸들을 쥔 운전자만 있었다. 스위치 옆에 선 제3자는 톰슨이 나중에 집어넣은 장치다. 그리고 풋은 이중효과 원리를 옹호하려고 전차를 만든 게 아니다. 그의 결론은 정확히 반대였다. 직접 의도와 간접 의도의 구별은 "아주 부차적인 역할만" 하고, 진짜로 중요한 건 해를 끼치지 않을 의무와 도움을 줄 의무 사이의 무게 차이라는 것. 도구를 만들어 원리를 시험했고, 원리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게 1967년에 일어난 일의 전부다.

dkdk가 작업대에 놓인 장난감 전차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에 든 작은 고무망치로 「이중효과」라 적힌 판을 톡톡 두드려 금이 가는지 살핀다
그림 1풋이 만든 것은 답이 아니라 이중효과 원리가 버티는지 보려는 시험 장치였다.

육교, 그리고 풀리지 않은 채 남은 문제

톰슨은 1976년 논문 "죽이기, 죽게 두기, 그리고 트롤리 문제"에서 이 문제에 이름을 붙였다. 1985년 예일 로 저널 논문에서는 두 장치에 각각 이름을 달았다. 스위치 옆의 구경꾼, 그리고 육교 위의 뚱뚱한 남자. 밀면 전차가 멈춘다. 다섯이 산다. 그런데 거의 아무도 밀지 않겠다고 한다. 같은 논문에 나오는 외과의사 사례도 마찬가지다. 장기 다섯 개가 필요한 환자 다섯 명과, 검진하러 온 건강한 청년 하나. 산수는 동일한데 직관은 정반대로 간다.

이 비대칭이 트롤리 문제의 심장이다. 중요한 건 톰슨이 이걸 답으로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문제로 제시했다. 이름부터가 '문제'다. 1985년 논문의 각주에서 톰슨은 9년 전 자기 논문을 두고 "그 논문에서 톰슨 여사는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 같다"고 3인칭으로 자기를 깎아내린다. 정답을 아는 사람의 말투가 아니다.

dkdk가 양팔 저울 앞에 서서 갸웃한다. 왼쪽 접시에는 작은 레버가, 오른쪽 접시에는 사람을 미는 손 모양이 올라가 있는데 접시 높이가 서로 다르다
그림 2다섯 대 하나라는 산수는 같은데 직관은 두 경우에서 갈라진다. 톰슨은 이 어긋남을 답이 아니라 문제로 내놓았다.

실제 상황에서라면 좁은 선로 위의 그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확실한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터널 옆벽에서 발 디딜 곳을 찾아 매달리고, 전차는 그대로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때 전차 운전자가 뛰어내려 쇠지렛대로 그의 머리를 부수지는 않는다.

풋 본인이 1967년에 쓴 문장이다. 이 사고실험이 현실과 얼마나 다른지, 만든 사람이 만들면서 적어뒀다.

딜레마가 자극이 되던 날

2001년 9월, 조슈아 그린과 동료들이 사이언스에 fMRI 연구를 실었다. 사람들을 스캐너에 눕히고 도덕 딜레마를 읽히면서 뇌를 찍었다. 결과는 깔끔했다. 육교처럼 '개인적인' 딜레마는 감정 관련 영역을 더 강하게 끌어들이고, 스위치처럼 '비개인적인' 딜레마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밀기를 거부하는 건 정교한 원리 때문이 아니라 감정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이 순간이 갈림길이다. 풋과 톰슨에게 전차는 원리를 시험하는 시험대였다. 그린에게 전차는 자극이었다. 피험자에게 던져 넣고 반응을 재는 입력값. 재는 대상이 원리에서 사람으로 바뀌었고, 질문은 "어떤 원리가 버티는가"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답하는가"로 조용히 갈아탔다. 후자는 전자의 답이 아니다. 어떤 반응이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은 그 반응이 옳다는 근거가 못 된다.

dkdk가 원통형 스캐너 안에 누워 있고, 머리맡 투입구로 전차 그림 카드가 한 장씩 들어가며 발치 쪽 출력구에서 그래프 종이가 길게 밀려 나온다
그림 3전차는 원리를 재는 시험대에서 사람 반응을 재는 입력값으로 바뀌었다.

2009년에 매과이어와 동료들이 그린의 반응시간 데이터를 다시 분석했다. 개인적/비개인적 구분이 만들어낸다던 효과는, 사실상 몇 개의 이상한 시나리오가 끌고 간 인공물이었다. 그린은 이중처리 이론 자체가 무너진 건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반응시간 해석이 뒤집혔다는 점은 인정했다. 자극으로 쓰인 이야기의 세부가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4천만 번의 클릭

2018년, MIT 미디어랩의 모럴 머신 실험이 네이처에 실렸다. 233개 국가와 지역에서 열 개 언어로 4천만 건의 선택이 모였다. 사람이냐 동물이냐, 많은 쪽이냐 적은 쪽이냐, 젊은 쪽이냐 늙은 쪽이냐.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한 선호 세 가지가 이렇게 정리됐다.

이건 인상적인 데이터다. 문제는 이 데이터가 어떤 질문의 답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율주행 연구자들은 이 프레임을 꾸준히 거부해왔다. 나심 자파리나이미는 2018년에 자율주행차는 누구를 죽일지 프로그래밍되어서는 안 된다고 썼다. 다수를 살린다는 원칙이 옳다고 치더라도, 남은 수명이 짧다는 이유로 노인을 겨냥하는 시스템이 되는 순간 원칙은 원칙이기를 그만둔다. 2023년 톨마이어 등의 조사는 더 기술적인 지점을 짚는다. 트롤리식 설문은 차가 보행자의 나이와 수를 100퍼센트 확실하게 인식한다고 가정한다. 실제 자율주행의 어려움은 그 인식 자체에 있다. 게다가 선택지를 둘로 좁힌 것 자체가 답을 왜곡한다. '선호 없음'을 선택지에 넣자 응답자의 약 19퍼센트가 그쪽으로 갔다.

dkdk가 숫자가 빽빽이 돌아가는 큰 계수기 옆에 서서, 다른 손에 든 질문지를 들여다보는데 그 종이는 텅 비어 있다
그림 4선택 4천만 건이 모였지만 그 데이터가 답하는 질문이 무엇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확률이다

2012년, 스탠퍼드 로스쿨의 바버라 프리드가 철학계 안쪽에서 제대로 걷어찼다. 그의 논문 제목은 "트롤리 문제를 죽여야 한다는 주장(아니면 죽게 내버려 두거나)"이다.

모든 결과가 사전에 확실하게 못 박힌 트롤리 문제는, 인간 상호작용의 기형이자 변종이다.

프리드의 논점은 이렇다. 현실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끼치는 해악의 거의 전부는 확률적이다. 시내를 시속 몇 킬로미터로 달려도 되는가. 5킬로미터씩 올릴 때마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 위험은 두 배가 된다. 그렇다고 도심 운전을 전면 금지하지는 않는다. 왜 금지하지 않아도 되는가. 희생자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죽음이 덜 비극적이 되는가. 이게 진짜 어려운 질문이고, 비결과주의 철학은 여기에 거의 답을 내놓지 못했다. 트롤리에 매달려 있느라 그랬다는 게 프리드의 진단이다.

자율주행차 윤리도 같은 자리에 있다. 실제 질문은 "이 차가 노인과 아이 중 누구를 칠 것인가"가 아니라 "이 차가 자전거 옆을 지날 때 몇 센티미터를 띄우도록 설정할 것인가"에 가깝다. 위험을 누구에게 얼마나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지, 두 갈래 선로의 문제가 아니다.

dkdk가 쪼그려 앉아 줄자를 펴서 자동차 옆면과 자전거 사이의 틈을 재고 있다
그림 5현실의 윤리는 두 갈래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위험을 몇 센티미터씩 나누는 일이다.

그렇다고 "비현실적이니 쓸데없다"는 쪽으로 가는 건 게으르다. 인위성은 버그가 아니라 사양이었다. 변수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고정해야 그 변수가 직관을 움직이는지 볼 수 있으니까. 풋의 도구는 도구로서 정확히 작동했다. 망가진 건 도구가 아니라 용법이다.

웃음소리가 말해주는 것

2014년, 바우만과 동료들이 사람들이 트롤리 문제에 실제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쟀다. 육교 시나리오를 읽은 참가자의 63퍼센트가 조금이라도 웃었다고 답했다. 스위치 버전은 33퍼센트. 무고한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 이야기가 웃음을 유발한다면, 그 이야기는 현실의 도덕적 상황과 같은 심리 과정을 건드리고 있지 않다. 실제로 5퍼센트에서 12퍼센트의 참가자가 "이 설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고 내 답은 그걸 반영한다"에 표시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오염이 있다. 심리학 수업에서 트롤리를 다룬 적 없는 학부생 중에도 64퍼센트가 스위치 버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온라인 실험 노동자 상위 1퍼센트에서는 85퍼센트였다. 자극이 자극 노릇을 하려면 낯설어야 한다. 트롤리 문제는 오래전에 밈이 됐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도구가 질문을 잡아먹은 이야기다. 풋은 하나의 원리가 버티는지 보려고 전차를 만들었고, 그 원리는 버티지 못했다. 톰슨은 답이 아니라 문제를 정식화했고, 20여 년 뒤 자기 답을 뒤집었다. 그 사이에 심리학과 신경과학과 MIT의 웹사이트가 전차를 가져가 수천만 번 굴렸다. 얻은 것은 사람들의 응답 분포다. 잃은 것은 풋이 처음에 던진 질문이다. 어떤 원리가 살아남는가. 그 질문은 여전히 답이 없는 채로, 아무도 보지 않는 선로 위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