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엔 여왕이 없다
문명을 떠받친 곤충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여왕이 다스리는 왕국도, 벌이 사라지면 4년 만에 인류가 끝난다는 경고도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식탁의 3분의 1이 벌에게 달려 있다는 진실은 그대로다. 폰 프리슈의 춤부터 군집붕괴의 진짜 범인까지, 인간이 신화로 오해해 온 꿀벌 사회를 다시 읽는다.
한여름, 벌집 속은 칠흑같이 어둡다. 그 어둠 속에서 벌 한 마리가 벌집 표면을 8자로 돌며 몸을 떤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벌이다. 꼬리를 흔들며 직진하는 몇 초, 그리고 반원을 그리며 제자리로. 그 짧은 춤 안에 방향과 거리, 그러니까 "여기서 어느 쪽으로 얼마만큼 날아가면 꽃이 있다"는 정보가 통째로 담겨 있다. 이 춤을 처음 읽어낸 사람은 그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벌집은 우리가 오래 상상해 온 것과 다른 곳이다. 그곳에는 명령을 내리는 자도, 그 명령을 받드는 자도 없다.
우리는 꿀벌을 안다고 여긴다. 여왕이 다스리는 왕국, 근면한 일벌, 그리고 벌이 사라지면 인류도 몇 년 안에 끝난다는 무서운 경고까지. 그런데 이 셋은 저마다 절반쯤 틀렸거나, 통째로 틀렸다. 꿀벌은 인간이 오랫동안 신화로 오해해 온 하나의 사회다. 신화를 걷어내면, 훨씬 낯설고 훨씬 정교한 진짜 이야기가 남는다.
벌집엔 통치자가 없다
'여왕벌'이라는 이름부터가 의인화의 산물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다스리지 않는다. 여왕이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알을 낳는 것이다. 성수기에는 하루 수천 개씩. 벌집의 정치를 상상한 것은 인간이고, 정작 벌집에는 통치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
무엇보다 여왕을 만드는 쪽은 여왕이 아니라 일벌이다. 여왕이 낳은 알은 처음엔 다 똑같다. 그중 어떤 애벌레에게 일벌이 로열젤리라는 단백질 분비물을 계속 먹이면 여왕이 되고, 꽃가루와 꿀을 섞은 평범한 먹이로 키우면 일벌이 된다. 한 생명이 여왕이 될지 노동자가 될지는 유전자가 아니라 일벌의 먹이 선택이 정한다.
여왕이 무리에 미치는 영향력도 권력이 아니라 화학이다. 그녀는 '여왕 하악선 페로몬'이라는 냄새를 퍼뜨려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알릴 뿐이다. 이 신호가 약해지거나 끊기면 일벌은 곧바로 새 여왕을 기를 준비를 한다. 늙거나 병든 여왕은 일벌 수백 마리가 공처럼 둘러싸 체온을 끌어올려 죽이기도 한다. 명령 체계의 꼭대기에 앉은 군주가 아니라, 군집이 필요에 따라 만들고 교체하고 처형하는 생식 기관인 셈이다. 진짜 주권은 이름 없는 다수에게 있다.

어둠 속의 춤과 지도자 없는 지성
그 다수가 어떻게 하나처럼 움직이는지를 처음으로 해독한 사람이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카를 폰 프리슈다. 그가 1920년대에 꿀벌이 춤으로 대화한다고 주장했을 때 학계는 회의적이었다. 곤충에게 그런 상징 언어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옳았고, 1973년 콘라트 로렌츠, 니콜라스 틴베르헌과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춤의 문법은 놀랍도록 정교하다. 벌은 어두운 수직 벌집 위에서 직진 구간을 그리는데, 그 직선이 중력의 수직선과 이루는 각도가 곧 태양을 기준으로 한 꽃의 방향이다. 중력을 태양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거리는 직진 구간을 흔드는 시간으로 알린다. 대략 1초가 1킬로미터에 해당한다.
사람 말고 다른 동물이 이렇게 추상적인 상징으로 장소를 가리킨다는 것은 당시로선 충격이었다. 꽃은 눈앞에 없고, 벌은 그 위치를 각도와 시간이라는 기호로 바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동료에게 전한다. 언어에 가장 근접한 동물 신호가 인간이 아니라 곤충에게서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개별 꿀벌은 사실 그리 영리하지 않다. 놀라운 것은 집단 쪽이다. 미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실리는 벌 무리가 이사할 집을 고르는 과정을 파헤쳤다. 낡은 벌집이 비좁아지면 여왕과 벌 절반이 떼로 날아올라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무리의 3~5퍼센트에 해당하는 정찰벌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무 구멍 같은 후보지를 답사한다. 돌아온 정찰벌은 마음에 든 자리를 춤으로 광고한다. 자리가 좋을수록 더 격렬하게, 더 오래 춘다. 다른 정찰벌이 그 자리를 가보고 동의하면 그 춤에 합류하고, 시원찮은 후보를 밀던 벌들은 슬그머니 춤을 멈춘다. 어느 한 자리에 모인 정찰벌이 스무 마리 남짓의 정족수를 넘기면, 무리 전체가 그리로 날아오른다.
지도자도 투표용지도 없이, 벌 무리는 여러 후보 가운데 가장 나은 집을 골라낸다. 여왕은 그 결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벌집의 지성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스스로 조립된다.

"벌이 사라지면 4년"이라는 유령
이 정교한 사회를 향한 인류의 가장 유명한 헌사는, 공교롭게도 가짜다. "꿀벌이 지구에서 사라지면 인간은 4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이 문장은 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달고 돌아다닌다. 근거는 없다.
인용문의 출처를 추적한 콰이트 인베스티게이터에 따르면, 이 말은 아인슈타인의 어떤 글이나 강연에도 나오지 않는다. 《아인슈타인 어록》을 편집한 앨리스 칼라프리스는 이 문장을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아님" 항목으로 분류했다. 벌과 아인슈타인이 처음 엮인 것은 1941년 캐나다의 한 양봉 잡지였고, '4년'이라는 종말 시계가 붙은 판본은 1965년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뿌리를 캐면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다윈, 그리고 《꿀벌의 생활》(1901)을 쓴 마테를링크의 이야기가 뒤섞여 있다.
이 명언이 틀린 진짜 이유는 출처가 가짜여서만이 아니라, 셈이 맞지 않아서다. 인류의 칼로리 대부분은 밀과 쌀, 옥수수에서 나오는데 이 곡물들은 바람과 자가수분으로 열매를 맺는다. 벌이 몽땅 사라져도 이 주식은 여문다. 무너지는 것은 칼로리의 총량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작물의 4분의 3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수분매개자에 기댄다. 생산량을 부피로 따지면 그 35퍼센트가 벌과 새, 박쥐 같은 동물의 손을 탄다. 흔히 "우리가 먹는 세 입 중 한 입은 수분매개자 덕"이라고 말하는 근거다. 사과와 아몬드, 딸기, 커피, 카카오가 여기 속한다. 벌이 사라진다고 인류가 굶어 죽지는 않는다. 다만 식탁에서 색과 향과 영양이 빠져나가, 곡물죽만 남은 세계가 될 뿐이다. 실제로 2022년의 한 연구는 수분매개자 감소로 이미 과일과 채소, 견과의 생산이 3~5퍼센트 줄었고, 그로 인한 식단의 질 저하가 해마다 상당한 조기 사망으로 이어진다고 추산했다. 종말은 아니지만, 조용한 대가는 이미 치러지고 있다.

군집붕괴, 김빠지는 진짜 범인
그렇다면 벌은 정말 사라지고 있는가. 2006년에서 200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북미의 양봉가들이 벌통을 열었다가 이상한 광경을 마주했다. 여왕도, 애벌레도, 꿀도 그대로인데 일벌만 통째로 증발해 있었다. 죽은 시체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기이한 현상에 군집붕괴현상, 곧 CCD라는 이름이 붙었다.
언론은 곧장 범인 찾기에 나섰다. 네오니코티노이드 계열 농약, 휴대전화 전파, 유전자변형작물까지 온갖 용의자가 지목됐다. 하지만 미국 농무부 농업연구청을 비롯한 과학계가 내린 결론은 극적이지 않다. 단일 범인은 없다는 것이다. 1987년 미국에 상륙한 바로아응애—농무부가 "오늘날 군집을 죽이는 가장 심각한 단일 문제"라 부르는 기생충—와 그것이 옮기는 바이러스, 노제마 곰팡이, 여러 농약, 단작 농업이 강요하는 영양 부족, 트럭에 실려 전국을 도는 이동 양봉의 스트레스가 서로 겹치고 증폭하며 벌을 무너뜨린다.
반전은 그 뒤에 있다. CCD 공포 이후에도 관리되는 꿀벌은 멸종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의 양봉 군집 수는 대체로 안정적이거나 늘었고, 미국의 군집 수는 2024년 무렵 기록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겨우내 벌통이 죽어 나가도 양봉가가 이듬해 봄 군집을 둘로 갈라 새 여왕을 사서 채워 넣기 때문이다. 꿀벌은 야생동물이 아니라 관리되는 가축이다.

진짜 위기는 다른 벌에게 있다
바로 여기서 가장 뿌리 깊은 오해가 드러난다. "꿀벌을 구하자"고 할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 서양꿀벌은, 멸종위기종이 아니라 소나 닭처럼 인간이 수를 관리하는 가축이다. 그 개체수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불릴 수 있다.
정작 위태로운 벌은 따로 있다. 지구에는 2만 종이 넘는 벌이 사는데, 그중 90퍼센트 이상은 벌집도 여왕도 꿀도 없이 홀로 사는 단독성 벌이다. 암컷 한 마리가 흙 속이나 마른 줄기에 저 혼자 둥지를 파고 새끼를 먹일 꽃가루를 나른다. 대개 꿀벌보다 훨씬 작고, 사람을 쏘는 일도 드물다. 이 눈에 띄지 않는 벌들이야말로 벌의 전형이고, 꿀벌은 오히려 예외에 가깝다. 서식지 파괴와 농약, 기후변화 속에서 조용히 사라져 가는 것도 이 야생벌들이다. 세계자연보전연맹이 2011년 뒤영벌 전문가그룹을 꾸린 것도 뒤영벌 여러 종이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역설은 도시 양봉 붐이 이 야생벌을 돕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오히려 좁은 지역에 벌통이 빽빽이 들어서면, 관리되는 꿀벌이 한정된 꽃꿀을 두고 야생벌과 경쟁하고 병원체까지 옮긴다. 꿀벌 통을 늘려 벌을 지키겠다는 발상은, 닭을 더 키워 야생 새를 보호하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지난 20년간 "구하자"고 외친 꿀벌은 애초에 위기에 빠진 적이 없었다. 정말 사라지고 있는 벌들은 이름조차 붙여지지 못한 채, 우리의 관심 바깥에서 줄어들었다.
신화를 하나씩 걷어낸 자리에 남는 것은 오히려 더 경이롭다. 여왕 없는 민주주의, 지도자 없는 지성, 아인슈타인의 입을 빌린 종말이 아니라 조용히 스러지는 이름 없는 벌들. 꿀벌은 인간이 자기 모습을 비춰 보려 한 거울이었지만, 실제 벌집은 인간의 어떤 왕국과도 닮지 않았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물어볼 만하다. 우리가 정말 지켜야 할 벌은 꿀단지를 채워 주는 그 익숙한 벌인가, 아니면 이름조차 모르는 2만 종의 낯선 벌인가. "벌을 구하자"고 말해 온 그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과연 어떤 벌을 이야기하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