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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역사]2026-08-1210분 읽기

0의 역사 — 없음을 세기까지

빈자리를 표시하던 기호가 어떻게 대수와 미적분과 컴퓨터를 열었나, 그리고 서구는 왜 그것을 오래 두려워하고 금지했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셀 줄 몰랐다. 0은 처음부터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이 아니라, '없음'을 하나의 수로 다루기로 한 급진적 결단이었다. 바빌론의 빈자리 기호에서 브라마굽타의 628년 셈법으로, 아랍을 거쳐 유럽으로, 0으로 나누기의 심연과 미적분·이진법까지 — 없음을 세는 법을 배운 이야기이자, 그 배움을 한사코 거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셀 줄 몰랐다.

기원전 어느 오후,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 위에서 한 서기가 곤경에 빠진다. 그는 육십진법으로 수를 적는 중이다. 앞자리에 쐐기 둘, 뒷자리에 쐐기 둘을 나란히 눌렀는데, 정작 이게 122를 뜻하는지 7202를 뜻하는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다. 가운데 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적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문맥으로 눈치껏 읽는 수밖에. 바빌론 사람들은 이 불편을 무려 천 년 넘게 견뎠다. 자리값 체계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해 놓고도, 정작 '빈자리'를 나타낼 기호는 오래도록 만들지 않았다.

우리는 0을 공기처럼 여긴다. 늘 거기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0은 인류가 처음부터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없음'을 하나의 수로 다루기로 한 급진적 결단이었고, 그 결단에 도달하기까지 문명들은 몇 번이고 문턱 앞에서 되돌아섰다. 이 이야기는 없음을 세는 법을 배운 이야기이자, 그 배움을 한사코 거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리를 비워두는 기술

흔히들 "바빌론이 0을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정확히는 반쪽이다. 기원전 300년 무렵 바빌론 서기들은 빈자리를 표시하려고 비스듬한 쐐기 두 개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기호는 수의 '가운데'에만 쓰였다. 끝자리에는 결코 붙지 않았고, 홀로 쓰이는 일도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있는 자리가 비었음'을 알리는 구두점이었지, '없음'이라는 값 자체는 아니었다. 문장의 쉼표를 숫자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같은 함정을 그리스 천문학자들도 비켜 가지 못했다. 그들은 빈 칸에 알파벳 O처럼 생긴 기호를 적었지만, 이 역시 셈의 대상이 아니라 표기의 편의였다. 지중해 문명 전체가 자리표시자(placeholder)라는 얕은 물가까지는 왔으나, '수로서의 0'이라는 깊은 물에는 발을 담그지 않았다.

정작 순수하게 맨손으로 0을 빚어낸 쪽은 지구 반대편이었다. 중앙아메리카의 마야는 이십진법 자리값 체계 속에서 조개껍데기 모양의 0 기호를 독자적으로 고안했다. 기원전 36년으로 거슬러 오르는 치아파 데 코르소의 비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로 만난 적 없는 두 세계가 각자의 방식으로 '빈자리'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0이 특정 민족의 발명품이라기보다 자리값이라는 발상이 결국 요구하게 되는 필연에 가까웠음을 말해 준다.

위치값 판의 빈 가운데 자리에 고리 기호를 끼우는 장면
그림 10의 출발점이 독립된 수가 아니라 비어 있는 자리를 구별하는 표식이었음을 보여준다.

없음을 하나의 수로

진짜 도약은 인도에서 일어났다. 그 바탕에는 수학이 아니라 사유가 있었다. 산스크리트어 **슌야(śūnya)**는 '비어 있음', '공(空)'을 뜻하는 말로, 불교와 힌두 철학이 오래 벼려 온 개념이다. 없음을 결핍이 아니라 하나의 실재로, 충만한 무(無)로 사유하는 정신적 토양 위에서, 비로소 없음을 하나의 수로 앉히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그 결정적 문장을 남긴 사람이 서기 628년의 브라마굽타다. 그는 저서 『브라마스푸타싯단타』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0을 다른 수들과 동등한 수로 취급하고, 그 셈법을 명문화했다. 어떤 수에 0을 더하거나 빼도 그 수는 그대로이며, 어떤 수에 0을 곱하면 0이 된다. 그는 0을 "같은 수를 자기 자신에서 뺀 결과"라고 정의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재산'과 '빚', 즉 양수와 음수의 셈까지 함께 세웠다. 없음을 수로 인정하는 순간, 없음보다 작은 수—음수—로 가는 문도 함께 열린 것이다.

0은 자리를 비워두는 기호에서, 더하고 빼고 곱할 수 있는 어엿한 수로 신분이 바뀌었다. 이 신분 변화가 훗날 대수학과 근대 수학 전체의 주춧돌이 된다.

다만 여기서도 통념 하나를 걷어낼 필요가 있다. "인도가 0을 발명했다"는 말은 매력적이지만 지나치게 매끈하다. 인도에서 0을 나타내는 점(슌야빈두)이 쓰인 가장 오래된 문서로 꼽히는 바크샬리 필사본은, 2017년 옥스퍼드 보들리 도서관의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에서 일부 낱장이 3~4세기까지 올라간다는 발표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여러 학자가 서로 다른 세기의 낱장이 한 뭉치에 섞여 있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고, 옥스퍼드는 2024년 이 연대를 799~1102년으로 대폭 수정했다. 인도에서 자리값과 함께 쓰인 0이 논란의 여지 없이 새겨진 첫 사례는, 876년 괄리오르의 사원 비문에 등장하는 '270'과 '50'이다. 발명의 순간은 하나의 섬광이 아니라, 여러 세기에 걸쳐 번져 간 긴 새벽이었다.

빈자리 상자에서 0을 들어 올려 수직선 위에 놓는 장면
그림 2자리표시 기호가 연산 가능한 하나의 수로 전환된 개념적 도약을 고정한다.

0으로 나누는 심연

없음을 수로 받아들이자, 곧바로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0으로 나누기다. 브라마굽타조차 여기서 발을 헛디뎠다. 그는 0을 0으로 나누면 0이라고 적었는데, 이것은 틀렸다. 6세기 뒤 바스카라 2세는 어떤 수를 0으로 나눈 값을 '무한'이라 부르며 카하라(khahara)라는 이름까지 붙였지만, 이 역시 완전한 답은 아니었다.

문제의 정체는 이렇다. 6을 0으로 나눈 값을 x라 하면, 0에 x를 곱해 6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0에 무엇을 곱해도 결과는 언제나 0일 뿐, 6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답이 없다. 그렇다고 0을 0으로 나누면? 이번엔 어떤 수를 넣어도 다 맞아떨어져 답이 무수히 많아진다. 없거나, 넘치거나. 어느 쪽이든 셈의 규칙이 무너진다. 현대 수학이 0으로 나누기를 '정의되지 않음'으로 남겨 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심연 앞에 세운 난간이다.

바스카라가 붙든 '무한'이라는 답도 완전히 헛짚은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수를 점점 작은 수로 나눠 보라. 6을 0.1로 나누면 60, 0.001로 나누면 6000, 나누는 수를 0에 가까이 붙일수록 몫은 하늘 높이 치솟는다. 0에 다가갈수록 값이 무한을 향해 부풀어 오르는 이 광경 속에, 훗날 미적분이 붙들게 될 결정적 실마리가 이미 어른거리고 있었다. 0은 답을 거부하는 동시에, 답이 사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이 심연이 0의 진짜 위력을 드러낸다. 0은 얌전한 수가 아니다. 곱하면 모든 것을 자기 자신으로 빨아들이고, 나누려 들면 체계 전체를 삼켜 버린다. 없음을 셈에 들인다는 것은, 이 위험한 이웃과 한 지붕 아래 사는 법까지 배운다는 뜻이었다.

0 나눗셈 기계에서 답 대신 끝없는 띠가 심연으로 빠지는 장면
그림 30으로 나누기를 무리하게 정의하면 산술 체계가 무너지는 이유를 직관화한다.

유럽이 0을 두려워한 이유

인도의 셈법은 이슬람 세계를 거쳐 서쪽으로 흘렀다. 825년경 알콰리즈미가 인도 숫자를 다룬 책을 써서 이 체계를 널리 퍼뜨렸고, 슌야는 '비었다'는 뜻의 아랍어 **시프르(ṣifr)**로 번역되었다. 이 시프르가 라틴어를 거치며 한편으로는 제로(zero)가, 다른 한편으로는 암호를 뜻하는 사이퍼(cipher)가 되었다. 오늘날 '암호'와 '영'이 한 뿌리에서 갈라진 형제어라는 사실은, 0이 처음 유럽에 도착했을 때 얼마나 수상쩍은 물건 취급을 받았는지를 은근히 일러 준다.

0을 유럽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이는 1202년 『산반서(Liber Abaci)』를 펴낸 피보나치다. 그는 아홉 개의 숫자와 "0이라는 기호"만으로 어떤 수든 적을 수 있다며 상업 실무에서의 위력을 역설했다. 그러나 환영만 받은 것은 아니다. 새 셈법을 받아들인 '알고리스트'와 오래된 주판·로마 숫자를 고수한 '아바키스트' 사이에 긴 다툼이 벌어졌고, 힌두-아랍 숫자가 유럽을 완전히 장악하기까지는 16세기까지 여러 세기가 더 걸렸다.

저항은 때로 법의 형태를 띠었다. 1299년 피렌체의 환전상 길드(아르테 델 캄비오)는 회계 장부에 아랍 숫자를 쓰는 것을 금지하고, 수를 로마 숫자나 글자로 적도록 했다. 흔히 전해지는 이유는 위조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획이 단순한 0은 앞에 숫자를 덧붙이거나 6이나 9로 고쳐 쓰기 쉬워 보였고, 위치 하나로 값이 열 배씩 달라지는 자리값 체계는 장부를 조작할 여지가 커 보였다.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기호가 오히려 무언가를 감추기에 알맞다니—0을 향한 유럽의 불신에는 어딘가 서늘한 데가 있었다.

물론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더 현실적인 이해관계도 깔려 있었다. 종이 위에서 자리값으로 직접 계산하는 새 방식은, 주판알을 굴리던 셈의 대가들이 오래 독점해 온 기술을 순식간에 낡은 것으로 만들 참이었다. 누구나 배우면 장부를 펼쳐 계산 과정을 눈으로 따라가고 검산할 수 있게 되니, 셈은 밀실에서 광장으로 걸어 나왔다. 한 기호를 금지하는 법령 뒤에는 언제나 그 기호가 흔들어 놓을 낡은 질서가 있는 법이다.

금지 사슬을 끊고 장부의 문을 여는 0 모양 열쇠
그림 4낯선 숫자와 위조 가능성에 대한 공포가 편리한 계산법의 수용을 늦춘 역설을 보여준다.

무에서 세계를 짓다

두려움의 대상이던 0은, 결국 근대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다. 없음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양을 다루는 기술이 곧 미적분이었기 때문이다.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0으로 사라지지는 않되 0을 향해 끝없이 줄어드는 무한소를 붙들어, 곡선의 기울기와 넓이를 계산하는 길을 열었다. 존 월리스가 1655년 무한대 기호 ∞를 도입한 것도 같은 사유의 다른 얼굴이다. 0과 무한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었고, 그 거울 놀이 위에서 근대 물리학과 공학이 태어났다.

마지막 도약은 다시 라이프니츠에게서 나왔다. 1703년 그는 「이진 산술의 해설」에서 오직 0과 1, 두 기호만으로 모든 수를 적는 체계를 정식화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 발상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1이 신이라면 0은 무(無)이니, 이진법은 신이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는 이치를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 부베가 1701년 편지에서 중국의 『역경』이 같은 이진 구조를 독립적으로 품고 있음을 보여 주자, 라이프니츠는 이 우연에 더욱 매료되었다.

그 이진법이 훗날 무엇이 되었는지 우리는 안다. 지금 이 글자를 띄우는 모든 회로가 0과 1의 흐름으로 돌아간다. 스위치가 닫혔는가 열렸는가, 있는가 없는가—디지털 문명은 문자 그대로 '없음'과 '있음'의 교대 위에 지어졌다. 바빌론 서기가 표시할 방법조차 없어 절절매던 그 빈자리가, 이제 인류가 만든 모든 것을 계산하는 두 기호 중 하나다.

0과 1의 실을 베틀로 짜 좌표와 회로를 만드는 장면
그림 50이 미적분·좌표·이진법을 거쳐 현대 과학과 컴퓨터의 재료가 된 흐름을 마무리한다.

없음을 하나의 수로 인정하는 데는 천 년이 넘게 걸렸다. 한번 인정하고 나자, 그 없음은 대수와 미적분과 컴퓨터를 차례로 열어젖혔다. 어쩌면 우리가 어떤 개념을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오래 밀쳐 두고 있을 때, 그 자리에 다음 천 년의 도약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지금 셈에 넣기를 주저하는 0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