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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2026-08-2610분 읽기

지루함의 쓸모

뇌가 보낸 경보를 우리는 3초 만에 꺼 버린다

지루함은 고장이 아니라 신호다. 지금 하는 일이 나와 어긋나 있다고 뇌가 알리는 경보이고, 그 빈 시간은 창의성과 자기 성찰의 재료가 된다. 다만 '지루하면 창의적이 된다'는 대중적 결론은 실제 연구가 보여 준 것보다 훨씬 부풀려져 있다. 전기충격 실험의 잘려 나간 숫자들부터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까지, 지루함을 둘러싼 과장을 걷어내고 남는 것을 들여다본다.

2014년, 버지니아 대학의 텅 빈 방에 사람들이 혼자 앉았다. 휴대폰도 책도 없다. 할 일은 하나, 15분 동안 그냥 생각하기. 방 안에는 버튼이 하나 있었다. 누르면 발목에 전기가 흐른다. 조금 전 참가자들은 그 충격을 직접 겪어 보고,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서라면 돈이라도 내겠다고 답한 참이었다. 그런데 15분이 지나자 남성 참가자 열여덟 명 가운데 열두 명이 스스로 그 버튼을 눌렀다.

티머시 윌슨과 동료들이 『사이언스』에 실은 열한 개 연구 가운데 열 번째 것이다. 이 장면은 그 뒤로 "인간은 자기 생각과 단둘이 있느니 차라리 전기충격을 택한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어 세계를 돌았다. 그 요약은 절반쯤 맞고 절반쯤 부풀려져 있다. 어느 쪽이 부풀려졌는지 따지는 일에서 시작하자. 지루함을 둘러싼 거의 모든 이야기가 똑같은 방식으로 부풀려져 있기 때문이다.

게으름이 아니라 두 개의 결핍이다

우리는 지루함을 성격의 결함처럼 다룬다. 참을성이 없어서, 의지가 약해서 지루한 거라고. 지난 15년의 심리학은 정반대를 말한다.

존 이스트우드 연구진은 2012년 지루함을 주의의 실패로 다시 정의했다. 지루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다. 지루함의 괴로움은 욕구의 부재가 아니라 욕구와 능력의 어긋남에서 온다. 하고 싶은데 붙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지루함은 무기력보다 안절부절에 가깝다.

2018년 에린 웨스트게이트와 윌슨은 여기에 축을 하나 더 붙였다. 『사이콜로지컬 리뷰』에 발표한 MAC 모델은 지루함을 두 성분의 산물로 본다. 하나는 주의 성분, 과제가 요구하는 인지 자원과 내가 가진 자원이 어긋날 때 생긴다. 흥미로운 건 이 어긋남이 양쪽 방향 모두라는 점이다. 너무 쉬워도 지루하지만 너무 어려워도 지루하다. 다른 하나는 의미 성분, 지금 하는 일이 내가 가치를 두는 목표와 연결되지 않을 때, 혹은 애초에 그런 목표가 없을 때 생긴다.

두 결핍은 서로 독립적으로 지루함을 만든다. 이 모델의 가장 날카로운 예측은 마지막에 있다. 지루함은 바깥의 일에만 생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에도 생긴다. 떠올릴 만한 게 없거나, 떠올린 것이 나에게 아무 값어치가 없을 때 우리는 자기 머릿속이 지겨워진다. 이 대목을 기억해 두자. 잠시 뒤 전기충격 이야기로 돌아올 때 필요하다.

어쨌든 이 말은 곧, 지루함이 두 가지 다른 정보를 실어 나른다는 뜻이다. 하나는 "난이도가 안 맞는다", 다른 하나는 "이건 나에게 의미가 없다". 고장난 감정이 아니라 계기판의 경고등이다.

의미와 자극이라는 두 결핍을 점검하는 장면
그림 1지루함의 원인을 단순한 게으름과 분리한다.

전기충격 이야기가 잘려 나간 자리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가자. 흔히 인용되는 문장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보다 전기충격을 택했다"이다. 실제 조건은 더 좁고 더 흥미롭다.

우선 그 숫자가 나온 대상이 좁다. 논문이 충격 결과를 집계한 사람은 앞서 돈을 내서라도 다시 충격받지 않겠다고 답한 42명뿐이다. 나머지는 애초에 계산에서 빠졌다. 그 42명 중 남성은 18명 가운데 12명, 여성은 24명 가운데 6명이 최소 한 번 버튼을 눌렀다. 남녀 격차가 세 배 가까이 벌어지는데도 이 사실은 요약에서 대개 사라진다. 더 중요한 건 가장 충격을 싫어한다고 답한 이 집단 안에서조차 57퍼센트가 단 한 번도 누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번 넘게 누른 사람은 17퍼센트에 그쳤다. 그리고 남성의 평균 횟수를 계산할 때 연구진은 한 명을 제외해야 했다. 15분 동안 자기에게 190번 충격을 준 사람이었다. 그를 빼면 남성 평균은 1.47회다.

키어런 폭스와 에번 톰프슨, 제시카 앤드루스해나, 칼리나 크리스토프는 2014년 『프런티어스 인 사이콜로지』에 반박문을 실었다. 이들은 앞선 아홉 개 연구도 다시 읽었다. 윌슨 연구진은 참가자들이 생각하는 시간을 즐기지 않았다고 보고했는데, 9점 척도에서 실제 평균은 4.94였다. 중간값 근처다. 폭스 연구진의 지적은 이렇다. 그 점수가 가리키는 건 혐오가 아니라 "약간 즐겁고 약간 지루했다"에 가깝다. 비교 대상도 공정하지 않았다. 생각하기와 맞붙은 활동은 지루한 잡일이 아니라 참가자가 직접 고른 독서와 게임과 텔레비전이었다. 사람들이 초콜릿보다 다른 즐거움을 택한다고 해서 초콜릿이 혐오스러운 건 아니다.

이들이 짚은 더 결정적인 대목은 동기다. 버튼을 누른 18명 중 14명이 이유로 든 것은 생각의 괴로움이 아니라 호기심이었다. 아프다는 걸 아는데도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 그건 생각을 견디지 못한 게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 것에 가깝다.

사람들이 못 견딘 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이 실험이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2016년 네덜란드의 네데르코른 연구진은 참가자 69명에게 단조로운 영상, 슬픈 영상, 중립적인 영상을 보여 주며 원할 때 스스로 전기충격을 줄 수 있게 했다. 단조로운 영상을 본 집단이 충격을 더 자주, 더 세게 택했다. 슬픔은 아무 효과가 없었다. 부정적 감정 일반이 아니라 지루함이 콕 집어 방아쇠였다는 뜻이다. 통속 요약이 틀린 지점을 걷어내자 더 정확한 결론이 남는다. 인간은 자극 없는 상태를 견디는 데 놀랄 만큼 서툴다.

전기충격 실험의 과장된 해석을 걷어내는 장면
그림 2유명한 실험 요약에서 빠진 조건과 해석의 한계를 환기한다.

빈 시간이 창의성이 된다는 이야기의 실제 크기

여기서 대중적 결론 하나가 튀어나온다. 지루하면 창의적이 된다는 것. 근거로 가장 많이 불려 나오는 연구는 샌디 만과 리베카 캐드먼의 2014년 논문이다.

설계는 단순했다. 참가자에게 전화번호부를 베껴 쓰게 한 다음 종이컵의 새로운 용도를 떠올리게 했다. 지루한 작업을 거친 집단이 대조군보다 더 많은 아이디어를 냈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베껴 쓰기보다 읽기가 더 지루했고, 그쪽이 창의성 점수도 높았다. 연구진은 백일몽을 매개 변수로 지목했다.

정직하게 말하자. 두 실험의 표본은 각각 80명과 90명이었고, 효과는 존재하지만 크지 않다. 그리고 결정적인 반례가 있다. 2018년 율리아 하거와 크리스토프 쿠반트너, 라인하르트 페크룬은 창의성 과제를 여섯 블록 반복시키며 지루함과 수행을 함께 측정했다. 겉보기엔 지루함이 오를수록 아이디어 산출량도 올랐다. 그런데 연습 효과를 통제하자 산출량 증가는 전부 연습으로 설명됐고, 지루함은 오히려 수행을 떨어뜨렸다.

두 결과는 모순이 아니다. 갈라지는 지점은 지루함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다. 만과 캐드먼이 다룬 건 지루한 일을 끝낸 뒤에 다른 과제를 하는 상황이고, 하거 연구진이 다룬 건 지금 하는 그 일 자체가 지루한 상황이다. 앞의 것만 창의성을 밀어 올린다. 캐런 개스퍼와 브리아나 미들우드가 2014년 보고한 결과도 열기를 식힌다. 지루함이 연상적 사고를 촉진하긴 했지만, 들뜬 기분도 똑같이 촉진했다. 지루함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지루함과 창의성 사이의 작은 효과를 재는 장면
그림 3가능성과 효과의 크기를 동시에 보여준다.

아무것도 안 할 때 켜지는 회로

빈 시간에 뇌가 쉰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폐기됐다. 마커스 라이클이 2015년 정리했듯, 과제를 놓는 순간 오히려 대사 활동이 올라가는 영역들이 있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다.

이 회로가 하는 일의 목록이 흥미롭다.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 과거의 회상, 아직 오지 않은 일의 시뮬레이션, 다른 사람의 마음 추론. 요약하면 나와 시간과 타인을 다루는 작업이다. 자서전을 쓰고 미래를 예행연습하는 일이 여기서 벌어진다. 지루함이 자기 성찰의 재료가 된다는 말에는 이만큼의 물리적 근거가 있다.

다만 여기서도 사슬을 함부로 이으면 안 된다. 지루함이 마음 방랑을 부르고, 마음 방랑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를 켜고, 그것이 창의성을 낳는다는 3단 논법은 각 고리가 대중적 설명보다 훨씬 헐겁다. 2015년의 대규모 메타분석은 마음이 떠도는 동안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만이 아니라 집행 통제 영역도 함께 활성화된다는 걸 보여 줬다. 게다가 같은 회로는 반추와 우울에도 깊이 관여한다. 빈 시간에 켜지는 것은 창의성 기관이 아니라, 잘 쓰면 성찰이고 잘못 쓰면 자책이 되는 범용 장치에 가깝다.

멈춘 동안 흩어진 생각이 연결되는 장면
그림 4빈 시간이 기억과 미래 계획을 잇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경보가 엉뚱한 곳으로 새어 나갈 때

지루함이 신호라는 말에는 불편한 뒷면이 있다. 신호는 방향을 지정하지 않는다.

셰인 벤치와 헤더 렌치는 2019년 『이모션』에 지루함을 탐색 상태로 규정한 연구를 실었다. 지루해진 사람은 새로움을 원한다. 문제는 그 새로움이 부정적인 것이어도 택한다는 점이다. 실험에서 지루해진 참가자들은 굳이 불쾌한 경험 쪽을 골랐다. 배고픔이 무엇을 먹을지까지 알려 주지 않는 것과 같다. 배고픔은 그저 먹으라고만 한다.

그래서 지루함 성향이 높은 사람에게서 감각 추구와 위험 행동, 물질 사용이 함께 관찰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2010년 애니 브리턴과 마틴 십리가 영국 공무원 코호트를 분석해 『국제역학저널』에 실은 짧은 보고는 제목부터 「지루해 죽는다?」였다. 지루하다고 답한 사람들의 사망 위험이 더 높았다. 인과의 방향은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적어도 지루함이 아무 대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그 경보를 3초 만에 끈다

여기까지 오면 오늘의 문제가 선명해진다. 지루함은 무언가 어긋났다고 알리는 경보인데, 우리는 경보음을 끄는 기술만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다. 엘리베이터에서, 신호 대기에서, 대화가 잠깐 끊긴 자리에서, 손이 먼저 주머니로 간다.

MAC 모델로 돌아가 보면 왜 이게 함정인지 보인다. 무한 스크롤은 주의 결핍은 훌륭하게 채운다. 자극의 난이도가 늘 적당하고 새것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의미 결핍은 건드리지 못한다. 그래서 40분을 보고 화면을 껐을 때 우리는 여전히 지루하다. 종종 더 지루하다. 경고등에 검은 테이프를 붙여 놓고 계기판이 깨끗해졌다고 여기는 셈이다.

지루함의 쓸모는 그 자체가 창의성을 만들어 준다는 데 있지 않다. 연구들이 보여 준 효과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쓸모는 그 앞에 있다. 지루함은 지금 이 일이 나와 어긋나 있다는 정보를 가장 정직하게 전달하는 감각이고, 그 정보를 읽으려면 신호가 잠시 울리도록 놔둬야 한다.

오늘 하루, 당신이 지루함을 느낀 순간이 몇 번이었는지 세어 보라. 아마 잘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신호가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매번 3초 안에 껐기 때문이다. 그중 몇 개는 무엇을 말하려던 참이었을까.

스마트폰으로 지루함의 경보를 즉시 끄는 장면
그림 5불편함을 회피하면서 신호까지 잃는 현대적 습관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