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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역사]2026-08-2610분 읽기

백신과 의심 — 병을 이긴 기술이 어떻게 자기 근거를 지웠나

1885년 레스터에서 제너의 인형이 목매달리던 날부터, 조작된 1998년 논문까지

접종 반대는 인터넷이 만든 21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인두법만큼 오래됐다. 제너는 백신을 발명하지 않았고, 웨이크필드의 1998년 논문은 조작으로 전면 철회됐으며 저자는 의사 면허를 잃었다. 그런데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백신이 완벽하게 성공하면 병이 사라지고, 병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주사바늘뿐이기 때문이다.

1885년, 잉글랜드 중부의 도시 레스터를 최소 8만 명의 인파가 메웠다. 행렬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은 에드워드 제너의 인형을 목매달았다. 이들이 겨눈 것은 백신이라기보다 법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지 석 달 안에 접종을 시켜야 하고, 어기면 부모가 법정에 서고 벌금을 무는 법. 당시 천연두는 걸린 사람 열에 셋을 죽였다. 그 병을 막는 기술을 두고 8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접종 반대는 인터넷이 만들어낸 21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백신과 나이가 같다.

제너 이전에도 사람들은 몸에 병을 심었다

백신의 역사는 흔히 1796년 제너에서 시작한다고들 한다. 사실은 한참 앞선다. 1714년 런던 왕립학회에서 콘스탄티노플발 편지 한 통이 낭독됐다. 의사 에마누엘 티모니가 보낸 것으로, 체르케스인과 그루지야인들이 사십 년째 천연두에 "일부러 걸리는" 시술을 해왔다는 내용이었다. 2년 뒤 야코부스 필라리누스가 덧붙이기를, 그 시술은 1660년 무렵 한 그리스 여인이 도시에 들여온 것이라 했다.

인두법(variolation)이라 불린 이 방법은 조악할 만큼 단순했다. 천연두 환자의 농포에서 고름이나 딱지를 얻어, 바늘로 긁은 피부에 밀어넣는다. 대개는 가볍게 앓고 지나갔고, 한번 앓은 사람은 다시 걸리지 않았다. 트리폴리에서 온 대사 카셈 알가이다 아가는 자기 아버지가 형제자매를 모두 데려가 같은 날 함께 접종시켰다고 적으면서 숫자까지 남겼다. 접종한 백 명 중 죽는 사람은 둘이 못 되고, 그냥 걸린 백 명 중에는 서른 명쯤 죽는다고.

이 기술은 유럽의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인두법을 논한 가장 이른 기록은 1549년의 책이고, 웨일스의 시골에서는 "마마를 산다"는 이름으로 1600년 무렵부터 쓰이고 있었다. 보스턴의 목사 코튼 매더는 자기 집에서 일하던 오네시무스에게서 처음 그 얘기를 들었다. 지금의 리비아 남부에서 온 그는 팔에 남은 흉터를 보여주며 시술을 설명했다.

영국에 이 기술을 들여앉힌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외교관의 아내였다. 메리 워틀리 몬터규는 1715년 천연두로 얼굴을 잃었고, 열여덟 달 뒤 스무 살 남동생을 같은 병으로 잃었다. 1717년 남편이 이스탄불 대사로 부임하자 그는 현지에서 인두법을 목격했고, 1718년 3월 대사관 외과의 찰스 메이틀런드에게 다섯 살 아들을 접종시켰다. 1721년 4월 런던으로 돌아온 뒤에는 네 살 딸을 왕실 의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접종시켰다. 아들은 이스탄불에서, 딸은 런던에서. 그 자리에서 목격된 것이 영국 의학계를 움직였다.

뒤이어 벌어진 일이 더 중요하다. 1723년 왕립학회 총무 제임스 저린은 여러 나라의 자료를 모아 인두법 접종자와 자연 감염자의 사망률을 비교해 발표했다. 신학이나 권위가 아니라 숫자로 시술의 가치를 따진 것이다. 오늘 우리가 근거중심의학이라 부르는 습관은 이 논쟁에서 걸음마를 뗐다. 백신을 둘러싼 다툼은 처음부터 통계와 함께 시작됐다.

작은 병의 씨앗을 방패에 심어 면역을 기르는 장면
그림 1인두법이 실제 감염 위험을 감수해 면역을 얻던 오래된 기술이었음을 압축한다.

소에서 온 면역, 그리고 제너가 발명하지 않은 것

인두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심는 것이 진짜 천연두라서, 드물게 사람이 죽고 그 사람에게서 전염이 퍼졌다. 진짜 도약은 다른 병을 쓰는 데서 왔다.

젖 짜는 여자들은 우두를 앓고 나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시골에 떠돌았다. 1774년, 도싯의 농부 벤저민 제스티는 마을에 천연두가 돌자 우두에 걸린 소의 젖통에서 물질을 긁어 아내와 두 아들의 팔에 옮겼다. 제너보다 22년 앞선 일이다. 제너가 한 일은 발명이 아니라 증명이었다. 1796년 5월 14일, 그는 손에 우두 병변이 있던 젖 짜는 처녀 세라 넬름스의 물질을 여덟 살 제임스 핍스에게 접종했다. 아이는 가볍게 앓고 회복했다. 결정적인 것은 그 다음이었다. 7월에 제너는 같은 아이에게 진짜 천연두 물질을 넣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너의 공은 우두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소문을 반증 가능한 형태로 바꿔놓은 것이다. 그는 "효과가 있다"는 말 대신 "효과가 있다면 이 아이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는 문장을 만들었고, 그 문장을 시험했다.

오래된 지식의 실이 소를 거쳐 과학적 체계로 감기는 장면
그림 2제너의 공헌을 단독 발명이 아니라 축적된 실천의 체계화로 바로잡는다.

국가가 팔을 걷어붙이라고 명령했을 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1840년 백신법으로 영국은 공중보건의 이름으로 개인의 몸에 처음 손을 뻗었다. 1853년 법은 영아 접종을 의무화했고, 1867년 개정은 미이행 부모를 기소하고 벌금을 물릴 수 있게 만들었다. 저항이 조직화된 것은 정확히 이 시점부터다.

역사가 나자 더바크가 짚었듯, 운동을 키운 것은 논증이 아니라 기소였다. 법정에 불려나간 부모들은 동정을 샀고, 그 분노가 집회와 시위로 모였으며, 지역 반대 연맹의 회원 수는 그때마다 불었다. 레스터의 8만 인파는 그 절정이었다. 숫자가 말해준다. 1873년 잉글랜드·웨일스에서 기한 내 미접종 영아는 5%가 안 됐는데, 세기말에는 아이 셋 중 하나가 됐다.

결말은 타협이었다. 왕립위원회는 조사 끝에 접종이 압도적으로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결론 내렸지만, 동시에 집행을 유화적으로 바꾸라고 권고했다. 1898년 개정법은 부모가 치안판사 앞에서 "양심상 반대한다"고 선언하면 처벌을 면제해주었다. 부모가 국가의 명령을 양심으로 거부할 수 있다는 **양심적 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라는 표현은, 병역이 아니라 백신 앞에서 먼저 법조문이 됐다.

보호 도장을 찍는 장치 위에서 국가의 강제 스프링이 눌리는 장면
그림 3공중보건의 보호 효과와 강제 접종이 만든 불신을 한 장면에 함께 둔다.

병이 사라지자 근거도 사라졌다

1966년 결의로 출발해 이듬해부터 본격 가동된 WHO의 강화 천연두 박멸 계획. 총비용은 약 3억 달러, 그중 3분의 2는 유행국들이 스스로 댔다. 1977년 마지막 자연 발생 사례가 확인됐고, 이후 2년간 아프리카 대륙을 뒤졌지만 더는 나오지 않았다. 1978년의 마지막 사망자는 자연 감염이 아니라 영국의 실험실 사고에서 나왔다. 1980년 5월 8일 세계보건총회가 선언했다. "세계와 모든 인류가 천연두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 접종 중단을 권고했다.

여기에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있다. 백신이 완벽하게 성공하면, 백신이 막던 것이 사라진다. 얼굴이 짓뭉개진 아이도, 눈먼 생존자도, 열에 셋이 죽던 통계도 사라진다. 남는 것은 주사바늘뿐이다.

백신은 성공할수록 자신의 근거를 지운다. 병의 공포가 있는 자리에서 백신은 구원이지만, 병이 사라진 자리에서 백신은 아무 이유 없이 아이의 팔을 찌르는 낯선 액체가 된다.

백신 지우개가 질병을 지우자 주사바늘만 도드라지는 장면
그림 4성공한 예방 기술이 오히려 필요성의 기억을 지우는 역설을 시각화한다.

1998년, 열두 명의 아이

1998년 2월, 앤드루 웨이크필드와 동료들이 랜싯에 아이 열두 명의 사례를 보고했다. MMR 백신과 장 염증과 발달장애를 잇는 증후군이 있을지 모른다는 제안이었다. 논문 자체는 인과를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표에 맞춰 열린 텔레비전 기자회견은 달랐다. 방송사에 배포된 23분짜리 영상에서 웨이크필드는 말했다. "혼합 백신, 그러니까 MMR 병용 접종의 장기 안전성에 대해 내 마음속에 충분한 불안이 있으므로, 단일 백신들로 대체하고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두 명, 대조군 없음. 그 규모로 국가 접종 정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자 브라이언 디어가 파헤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설계였다. 웨이크필드는 MMR 소송을 준비하던 변호사 리처드 바를 통해 법률구조위원회 자금을 받고 있었다. 논문이 나오기 2년 전부터였고, 총액은 43만 5,643파운드에 경비 별도였다. 그가 기자회견에서 대안으로 내세운 단일 백신에 대해서는 이미 특허를 출원해둔 상태였다. 어느 것도 논문의 이해관계 항목에 적히지 않았다. 아이들은 우연히 병원에 온 순서대로 온 것이 아니라 소송 쪽에서 모집됐다. 진료 기록과 논문의 서술은 어긋났고, 어긋난 방향은 언제나 한쪽이었다. 2003년 9월, 1,500가구를 대리하던 변호인단이 증거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며 소송이 무너졌다. 2004년 공저자들이 논문의 해석을 철회했다. 영국의 의사 규제기관 GMC는 사상 최장인 217일간의 심리 끝에 2010년 1월 웨이크필드에게 부정직과 무책임 유죄를 내렸고, 랜싯은 같은 해 논문을 전면 철회했으며, 5월 24일 그의 이름은 의적에서 지워졌다. 2011년 1월 BMJ는 사설 제목에 한 단어를 박았다. 조작(fraudulent).

그 뒤로 검증은 반복됐다. 덴마크에서 1991~1998년생 53만 7,303명을 추적한 2002년 연구는 자폐 상대위험 0.92를 보고했다. 2019년 65만 7,461명을 다시 추적한 연구는 위험비 0.93(95% 신뢰구간 0.85~1.02)을 얻었다. 연관은 없다. 이건 논쟁 중인 문제가 아니다.

열두 명의 철회 논문과 대규모 증거를 저울에 올린 장면
그림 5작은 조작 연구가 방대한 증거보다 크게 퍼져 신뢰와 접종률을 무너뜨린 과정을 잇는다.

78만에서 9만 5천으로, 그리고 다시

WHO 집계로 홍역 사망은 2000년 약 78만 명에서 2024년 약 9만 5천 명으로 줄었고, 그 기간 백신이 막아낸 죽음은 약 5,900만 명이다. 동시에 WHO의 예방접종 전문가 자문단은 홍역 퇴치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미 퇴치했거나 눈앞에 뒀던 나라들에서 병이 되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부르는 건 쉽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19세기 레스터의 노동자는 논문을 읽어서가 아니라 이웃집 세간이 압류되는 것을 봐서 거리로 나왔다. 오늘의 부모도 대개 데이터를 반박하는 게 아니라, 설명 없이 내려오는 지시와 자기 아이 사이에서 판단을 요구받는 상황에 반응한다. 확률로 말하는 제도와 한 명으로 사는 개인 사이의 간극은 통계로 메워지지 않는다.

다만 공감과 승인은 다르다. 왜 의심하는지 이해하는 일과, 이미 철회된 조작 논문에 자리를 내주는 일은 같지 않다. 300년 전 트리폴리 대사가 남긴 계산은 지금도 유효하다. 접종한 백 명과 그냥 걸린 백 명, 어느 쪽에서 더 많이 죽는가.

성공한 백신은 자기가 막은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존재하지 않게 된 병실, 태어나지 않은 흉터, 죽지 않은 아이는 아무 데도 기록되지 않는다. 우리가 백신을 의심하게 되는 지점은 백신이 실패한 자리가 아니라 완벽하게 성공한 자리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보이지 않게 된 위험을, 우리는 무엇으로 계속 기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