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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과학]2026-08-129분 읽기

대악취: 위대한 도시가 감춘 것

1858년 런던의 하수도와, 나쁜 공기를 이긴 데이터의 뒤늦은 승리

1858년 런던을 덮친 대악취는 근대 도시가 자신의 밑바닥을 감추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존 스노우의 콜레라 지도부터 바잘게트의 하수도까지, 보이지 않는 지하가 어떻게 도시를 살렸는지 — 그리고 옳은 결과가 어떻게 틀린 이론의 논리 위에서 지어졌는지를 따라간다.

1858년 여름의 런던은 냄새로 기억된다. 그해 6월, 이상 고온이 도시를 덮쳤다. 그늘에서도 온도계는 34도를 넘겼고, 햇볕 아래에서는 48도를 가리켰다. 그리고 템스강이 끓기 시작했다. 300만 인구가 쏟아낸 배설물과 도축장의 피, 공장 폐수가 흘러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라 뚜껑 없는 하수구였다. 3년 전,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는 강물에 흰 종이 조각을 담가 보고는 몇 초 만에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강 전체가 그야말로 하수구였다"고 신문에 편지를 보냈다. 이제 그 하수구가 무더위에 발효했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의원들은 견디지 못했다. 창문에 염화석회를 적신 커튼을 내걸었지만 소용없었고, 강가의 위원회실과 도서관은 사실상 폐쇄됐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제국의 심장부가 제 도시의 오물 냄새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후대는 이 사건을 대악취(Great Stink)라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다. 수십 년 동안 미뤄져 온 런던 하수도 문제가, 의원들의 코가 시달린 지 단 18일 만에 해결의 궤도에 올랐다. 1858년 6월 15일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템스강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로 악취를 풍기는 스틱스의 웅덩이"라 부르며 법안을 밀어붙였고, 8월 2일 그 법은 통과됐다. 도시가 무엇을 짓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감추느냐로도 위대함이 갈린다면, 근대 도시는 바로 이 순간 자신의 밑바닥을 감추기로 결심했다.

거대한 코 모양 경보기의 레버를 당겨 템스 아래 지하 관로를 깨우는 장면
그림 1수십 년 미룬 문제가 권력자의 코앞에 닿자 즉시 정치가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로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물을 눈앞에서 치워야 한다는 발상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기원전 6세기, 로마의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도시 한복판의 늪지를 메우고 물을 빼내기 위해 거대한 배수로를 팠다. 클로아카 막시마, '가장 큰 하수구'다. 처음 목적은 배설물 처리가 아니라 포룸이 들어설 저지대의 물을 테베레강으로 흘려보내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도시의 분뇨와 빗물을 함께 실어 나르는 본격 하수 체계로 변했다. 로마인은 이 시설에 신격을 부여했다. 하수의 여신 클로아키나에게 포룸 한쪽에 작은 신전을 바쳤을 정도다. 놀랍게도 클로아카 막시마의 일부는 2천 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로마 중심부의 빗물을 받아낸다.

그러나 로마의 지혜는 계승되지 못했다. 제국이 무너지자 하수도의 기술도 함께 묻혔다. 중세와 근세의 유럽 도시는 창밖으로 요강을 비우고 길바닥 도랑에 오물을 흘리는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위생은 진보의 직선을 그리지 않는다. 산업혁명이 사람을 도시로 빨아들이는 동안, 도시가 제 배설물을 다루는 방식은 로마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나쁜 공기라는 2천 년의 확신

19세기 사람들이 콜레라와 전염병 앞에서 붙든 설명은 '미아스마', 곧 나쁜 공기였다. 썩은 유기물에서 피어오르는 독기가 병을 옮긴다는 이 이론은 히포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2천 년 넘게 정설로 군림했다. 냄새가 곧 질병이었다. 빈민가의 악취를 없애면 병도 사라진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이것은 무지한 대중의 미신이 아니라 당대 최고 지성들의 정설이었다. 위생 개혁가 에드윈 채드윅이 가장 강력한 전도사였고, 병원의 환기를 역설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도, 통계로 무장한 보건 관료 윌리엄 파도 오랫동안 나쁜 공기를 믿었다. 채드윅은 "모든 냄새는 질병이다"라고 단언하며 도시를 청소하려 했다. 그런데 여기에 역사의 잔인한 아이러니가 있다. 채드윅의 개혁은 집집마다의 오수통을 비워 하수로, 그리고 템스강으로 흘려보내게 했다. 냄새의 근원을 눈앞에서 치우자는 선의였다. 문제는 그 템스강이 바로 런던 시민이 마시는 식수의 원천이었다는 점이다. 나쁜 공기를 쫓으려던 개혁이 오히려 콜레라균을 시민의 식탁으로 실어 날랐다. 1848년과 1854년의 대유행은 그렇게 증폭됐다.

틀린 이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위험한 게 아니다. 그것은 확신에 찬 사람들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만들어,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도시를 개조한다.

오수통을 비우는 펌프를 진지하게 돌리지만 관 끝이 식수 주전자에 연결돼 있는 장면
그림 2틀린 이론이 사람을 부지런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점을 각인한다.

브로드가의 펌프 손잡이

여기서 한 의사가 등장한다. 존 스노우. 그는 이미 1849년 저서에서 콜레라가 공기가 아니라 오염된 물을 통해 전파된다는 대담한 주장을 폈다. 아무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1854년 8월 말, 소호의 브로드가 일대에서 콜레라가 폭발해 열흘 남짓 만에 600명 넘는 목숨을 앗아가자, 스노우는 이론이 아니라 데이터로 승부하기로 했다.

그는 지도를 펼치고 사망자가 발생한 집마다 검은 막대를 하나씩 그려 넣었다. 막대들은 하나의 우물, 브로드가 공용 펌프 주위로 촘촘히 몰려 있었다. 펌프에서 먼 곳은 비었고, 가까운 곳은 검게 뒤덮였다. 예외조차 규칙을 증명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은 여인은 그 물맛을 좋아해 일부러 브로드가 물을 길어다 마셨고, 펌프 코앞의 양조장 노동자들은 맥주만 마신 덕에 멀쩡했다. 스노우는 지역 당국을 설득해 1854년 9월 8일 펌프 손잡이를 떼어냈다. 훗날 목사 헨리 화이트헤드가 추적 끝에 밝혀낸 감염원은, 펌프에서 채 1미터도 안 떨어진 오수통이었다. 콜레라에 걸린 아기의 기저귀를 빤 물이 그리로 스며들고 있었다.

지도만으로는 부족했다. 스노우는 런던 남부에서 훨씬 큰 규모의 '대실험'을 벌였다. 두 수도 회사가 같은 동네 집들에 뒤섞여 물을 대고 있었는데, 한 곳은 오수로 오염된 하류에서, 다른 한 곳은 이미 취수구를 상류로 옮긴 뒤였다. 조건이 거의 같은 수만 가구를 물 공급원만으로 갈라 콜레라 사망률을 비교했더니, 오염된 물을 마신 쪽의 사망률이 깨끗한 쪽보다 약 열네 배 높았다. 냄새도, 계층도, 기후도 아니었다. 오직 물이 갈랐다. 오늘날 역학이 그를 학문의 아버지로 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을, 숫자를 세는 방식만으로 붙잡아 냈다.

검은 사망 막대를 자석처럼 한 펌프 주위로 모으고 손잡이를 뽑는 장면
그림 3보이지 않는 원인을 냄새가 아니라 분포와 예외로 붙잡았음을 드러낸다.

이긴 자가 인정받지 못할 때

여기까지는 흔히 '과학이 미신을 이긴 통쾌한 승리'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사실은 훨씬 씁쓸하다. 우선 펌프 손잡이를 떼자 유행이 멈췄다는 통념부터 절반만 맞다. 스노우 자신이 기록했듯, 이미 소호 주민 상당수가 겁에 질려 동네를 떠난 탓에 손잡이를 제거하기 전부터 발병은 줄고 있었다. 손잡이 제거는 결정타라기보다 상징에 가까웠다.

더 중요한 사실은 스노우가 살아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런던 보건 당국은 조사 끝에 이 유행의 원인을 결국 미아스마로 못 박았고, 떼어냈던 펌프 손잡이를 도로 끼워 넣었다. 수인성 전파라는 주장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스노우는 1858년 6월, 대악취가 런던을 덮치던 바로 그 무렵 마흔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였다.

한 가지 오해도 짚어야 한다. 흔히 스노우가 '세균설'을 증명했다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물을 통해 무언가가 옮는다는 것을 통계로 논증했을 뿐, 그 무언가의 정체는 몰랐다. 공교롭게도 같은 1854년, 이탈리아 해부학자 필리포 파치니가 콜레라 환자의 장에서 쉼표 모양의 세균을 발견하고 이름까지 붙였지만, 역시 미아스마의 위세에 눌려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 세균이 진짜 원인으로 공인된 것은 로베르트 코흐가 1883~84년 콜레라균을 다시 배양해 낸 뒤였다. 과학은 미신을 이겼다. 다만 그 승리는 수십 년이나 지연됐고, 선구자들은 대부분 그 결말을 보지 못했다.

옳은 생각이 이긴다는 말은 참이다. 문제는 그 문장에 '언제'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진실은 대개 그것을 처음 말한 사람의 장례식보다 늦게 도착한다.

틀린 이론이 지은 옳은 도시

가장 깊은 역설은 마지막에 있다. 런던을 콜레라에서 구해 낸 하수도는, 스노우의 옳은 이론이 아니라 미아스마라는 틀린 이론의 논리 위에서 지어졌다. 대악취에 놀란 의회가 원한 것은 오염된 물을 막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냄새를 없애는 것이었으니까.

그 일을 맡은 엔지니어가 조지프 바잘게트다. 그의 설계는 단순하지만 대담했다. 강으로 곧장 쏟아지던 오수를, 강과 나란히 놓은 거대한 차집 관로로 가로채 도심 한참 아래의 하류에서 방류하는 것이다. 총연장 130여 킬로미터의 간선 하수도, 3억 1,800만 장의 벽돌이 동원됐다. 1859년 공사가 시작됐고, 1865년 크로스네스 펌프장이 가동됐으며, 전체 계통은 1875년 무렵 완성됐다. 바잘게트는 예상 유량보다 훨씬 넉넉하게 관을 팠다. 도시가 얼마나 커질지 아무도 모르니 이런 일은 한 번에 제대로 해 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판단 덕에 그가 놓은 관로는 150년이 지난 지금도 런던을 떠받친다.

냄새를 쫓으려고 오수를 상수원에서 멀리 떼어 놓은 이 조치는, 의도치 않게 콜레라균을 식수에서 분리했다. 틀린 목적이 옳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실제로 1866년 런던의 마지막 콜레라 대유행은 아직 새 하수도에 연결되지 않은 동부의 한 구역에서만 터졌고, 이 지역이 오염된 강물을 공급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회의론자였던 통계학자 윌리엄 파도 마침내 스노우가 옳았음을 인정했다. 인프라가 이론을 앞질러 진실을 증명한 셈이다.

바잘게트의 하수도는 지금도 굴러가지만 한계에 다다랐고, 런던은 2025년 초 25킬로미터 길이의 템스 타이드웨이 터널을 50억 파운드를 들여 완공하며 다시 한번 도시의 밑바닥을 파 내려갔다. 오늘도 지구에서는 수십억 명이 안전하게 관리되는 위생 시설 없이 살아간다. 콜레라는 박멸되지 않았다.

냄새를 쫓아 지하 관을 옮기다가 오염수와 식수 사이에 물리적 벽을 세우는 장면
그림 4틀린 설명이 오염과 식수를 분리하는 옳은 인프라를 낳았음을 남긴다.

위대한 도시는 자신이 세운 첨탑과 광장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도시를 실제로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 우리가 애써 감춰 둔 그 어둠 속 물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며 코를 막고 지나치는 것들 가운데, 훗날 한 도시의 목숨을 좌우했다고 기록될 무언가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