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값
자주색 한 줌에 목숨을 걸었던 인류, 그리고 색이 실은 어디에 있었는가
인류는 색을 얻기 위해 재산과 제국과 목숨을 걸었다. 뿔소라 수만 마리를 으깨 자주색 한 줌을 얻었고, 금값을 치러 파랑을 샀고, 비소로 초록을 칠하다 죽었다. 그런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쫓았던 그것은, 어쩌면 그들이 생각한 곳에 있지도 않았다. 색의 역사는 희소한 것을 향한 욕망의 역사이자, 그 욕망이 끝내 마주친 뜻밖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기원전 페니키아의 염색공들은 뿔소라 수천 마리를 으깨 겨우 손톱만 한 자주색을 얻었다. 그 색으로 물들인 양모는 같은 무게의 금과 값이 맞먹었고, 로마에서는 황제 말고 누구도 그 색을 온몸에 두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색을 얻기 위해 재산을, 제국을, 때로는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쫓았던 그것은, 어쩌면 그들이 생각한 곳에 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색을 자연이 거저 준 것으로 여긴다. 하늘은 파랗고 피는 붉다. 하지만 인류사의 대부분에서 선명하고 오래가는 색은 지극히 귀한 물건이었다. 색의 역사는 그 희소한 것을 손에 넣으려는 욕망의 역사이고, 그 욕망이 화학과 권력과 죽음을 어떻게 끌어들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뜻밖의 질문과 마주친다. 색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금보다 귀했던 색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은 고대의 가장 값진 색이었다. 지중해 뿔소라의 분비샘에서 뽑아낸 이 자주색은, 역사가 데이비드 제이코비의 추정에 따르면 소라 약 1만 2천 마리에서 순수 염료 1.4그램이 나왔다. 옷 한 벌 가장자리를 겨우 두를 양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서기 301년 물가를 고시했을 때, 최상급 자색 염모 한 파운드는 금 세 파운드에 맞먹었다. 4세기에 이르면 순수한 자색 옷은 사실상 황제만 입을 수 있었고, 이를 어기는 것은 반역으로 다스려지기도 했다. 비잔틴 황실이 자녀를 자줏빛 반암으로 두른 방에서 낳고 "자색 태생(porphyrogenitos)"이라 불러 정통성을 과시한 것도 같은 논리였다. 색이 곧 신분이었다.
파랑도 다르지 않았다. 르네상스 화가들이 탐낸 울트라마린은 청금석을 갈아 만들었는데, 그 원석은 사실상 단 한 곳, 아프가니스탄 바다흐샨의 광산에서만 나왔다. "바다 건너온 것"이라는 이름 그대로 먼 길을 거쳐야 했고, 원석 대부분이 불순물이라 순수한 파랑을 얻는 정제 과정은 지독히 손이 많이 갔다. 그래서 무게로 치면 금보다 비쌌다. 미술사가 마이클 백샌덜은 15세기 이탈리아의 그림 계약서들이 이 안료의 등급과 사용량을 인건비와 따로 명시했음을 밝혀냈다. 1485년 기를란다요의 제단화 계약은 "온스당 4플로린짜리 울트라마린"을 못 박았다. 관례상 이 가장 비싼 파랑은 성모 마리아의 겉옷에 우선 배정됐다. 색의 값이 곧 그림 속 위계였다.
신대륙은 붉은색으로 이 목록에 합류했다. 멕시코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를 말려 으깨면 그때껏 유럽이 알던 어떤 붉은색보다 밝은 진홍이 나왔다. 코치닐이라 불린 이 염료는 스페인 제국의 아메리카 수출품 가운데 은(銀) 다음으로 값진 물건이 되었다. 스페인은 살아 있는 벌레의 반출을 금지하고 그 정체가 곤충이라는 사실조차 감췄다. 유럽 박물학자들이 진실을 밝혀낸 것은 무려 18세기의 일이다.
색은 오랫동안 물감이 아니라 권력이었다. 누가 어떤 색을 두를 수 있는가가 곧 그가 누구인지를 말했다.

아름다움이 사람을 죽일 때
색을 향한 욕망은 종종 값보다 무서운 대가를 치렀다. 1775년 등장한 셸레 그린은 눈부신 초록을 냈지만 그 정체는 비소 화합물이었다. 그럼에도 19세기 유럽인들은 이 색으로 벽지를 바르고 드레스를 짓고 조화를 만들고 심지어 사탕을 물들였다. 습한 방에서 곰팡이가 벽지의 비소를 휘발성 가스로 바꿔 사람을 서서히 중독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야, 19세기 말 이 색은 자취를 감췄다.
여기서 흔한 이야기 하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유배지의 초록 벽지에서 나온 비소로 죽었다는 설이다. 확인된 사실은 그의 방 벽지에 실제로 상당한 비소가 들어 있었고 방이 습했다는 것까지다. 그것이 사인이라는 주장은 검증된 사실이 아니라 여전히 논쟁 중인 가설이다. 사후 모발에서 비소가 검출되긴 했지만 그 수치는 유배 이전부터 높았고 편차도 컸다. 오늘날 다수 견해는 부검 소견에 근거해 진행성 위암과 위출혈을 직접 사인으로 본다. "벽지에 비소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비소가 그를 죽였다"는 가설은 반드시 갈라 두어야 한다.
죽음의 색은 초록만이 아니었다. 16세기부터 유럽 여성들은 납으로 만든 백분을 얼굴에 발라 피부를 하얗게 했다. 하얀 피부는 야외 노동을 하지 않는 부의 증표였다. 문제는 납이 피부를 망가뜨렸고, 그러면 이를 가리려 더 두껍게 덧발랐다는 것이다. 화장품이 병을 만들고 병이 화장품을 부르는 악순환이었다. 20세기 초에는 야광 시계 문자판에 라듐 도료를 칠하던 여성 노동자들, 이른바 "라듐 걸스"가 붓끝을 뾰족하게 하려 입술로 다듬다 라듐을 삼켜 턱뼈가 녹고 뼈가 부서졌다. 그레이스 프라이어가 이끈 이들의 소송은 산업안전의 역사를 바꿨지만, 정작 그는 서른넷에 세상을 떠났다.

1856년, 색이 값싸진 날
전환은 뜻밖의 곳에서 왔다. 1856년, 열여덟 살의 화학도 윌리엄 퍼킨은 부활절 방학에 말라리아약 키니네를 합성하려 콜타르에서 나온 아닐린을 만지고 있었다. 실험은 실패했다. 대신 검은 침전물을 알코올로 씻어내던 중 그는 선명한 보라색 용액을 발견했다. 최초의 합성염료 모브(mauve)가 이렇게 태어났다.
다만 "천재 소년의 우연한 발견"이라는 이야기는 조금 손볼 데가 있다. 당시엔 키니네의 구조식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으므로 퍼킨의 방법으로는 애초에 키니네가 나올 수 없었다. 진짜 키니네 합성은 1944년에야 이뤄진다. 그러니 그가 키니네에 근접했다는 통념은 과장이다. 반대로 그 발견이 순전한 요행만도 아니었다. 퍼킨은 색을 얻은 뒤 견본을 염색공장에 보내 빛과 세탁에 견디는지 확인하고 곧장 공장을 세웠다. 우연한 관찰을 체계적인 산업으로 바꾼 것, 그것이 열여덟 살 퍼킨이 실제로 한 일이다.
모브는 처음엔 또 하나의 사치였다. 1858년 빅토리아 여왕이 모브 드레스를 입자 유럽이 열광했고, 풍자지 펀치는 이 광풍을 "모브 홍역"이라 놀렸다. 진짜 혁명은 그 뒤에 왔다. 아닐린 염료가 쏟아지고 값이 급락하면서, 수천 년간 신분을 가르던 선명한 색을 이제 누구나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색이 마침내 민주화됐다.
그 대가는 다른 곳이 치렀다. BASF가 17년 연구 끝에 1897년 합성 인디고를 내놓자, 수백 년을 이어온 인도의 천연 인디고 산업이 무너졌다. 수출은 20년이 채 못 되어 95퍼센트가 증발했고 수백만의 생계가 함께 사라졌다.
색은 콜타르라는 검은 부산물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 검은 물질에서 근대 화학과 제약 산업 전체가 자라났다.
염료에서 시작된 독일 화학회사들, BASF와 바이엘과 회히스트는 곧 세계를 지배했다. 아닐린이 세균을 골라 물들인다는 사실에서 최초의 매독 치료제가 나왔고, 바이엘은 염료회사에서 제약회사로 변신해 1899년 아스피린을 내놓았다. 색을 만들던 화학이 약을 만드는 화학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계보에는 어두운 끝자락도 있다. 이 회사들이 1925년 합병해 만든 IG 파르벤은 나치 시기 강제수용소 옆에 공장을 세워 노동을 착취했고, 그 자회사가 가스실에 쓰인 독가스를 생산했다. 색의 화학은 인류에게 약을 주었고, 동시에 가장 어두운 죄에 손을 담갔다.

그런데 색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까지 색은 저 바깥에 있는 무엇, 캐내고 사고 소유하는 물질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색은 정말 바깥에 있는가.
오래된 수수께끼가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는 바다가 "포도줏빛"으로, 하늘이 청동빛으로 나오지만 파랑을 뜻하는 단어는 없다. 19세기 학자 글래드스턴은 호메로스에서 검정이 백여 번 넘게 나오는데 정작 색 이름은 드물다는 걸 발견했다. 여기서 "고대인은 파랑을 보지 못했다"는 자극적인 이야기가 퍼졌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다. 그들의 눈은 우리와 똑같았고 파랑을 볼 수 있었다. 없었던 것은 파랑을 가리키는 공통의 이름이었다. 실제로 자연에는 안정적인 파랑 색소가 드물어 파랑 염료 자체가 귀했으니, 이름이 늦게 생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눈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다.
언어가 색을 나누는 방식은 문화마다 다르다. 나미비아의 힘바족은 파랑과 초록을 한 단어로 묶는다. 한때 "그래서 힘바족은 파랑과 초록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실험이 방송을 타고 유명해졌지만, 그 극적인 장면은 다큐 제작진이 연출한 것으로 학술적으로 출판된 적이 없다. 실제 연구가 말하는 것은 훨씬 조심스럽다. 우리가 가진 색 이름의 범주가 색을 지각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은근히 영향을 준다는 것, 그 정도다.
결정적인 사실은 이것이다. 색은 파장이라는 물리량 그 자체가 아니라 뇌가 만들어내는 경험이다. 조명이 붉든 푸르든 우리가 사과를 늘 같은 빨강으로 보는 것은, 뇌가 조명을 추정해 보정하기 때문이다. 이 능동적 계산이 개인마다 조금씩 다르기에, 2015년 그 유명한 드레스 사진을 두고 누구는 파랑-검정을, 누구는 흰색-금색을 보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파장을 두고 뇌가 서로 다른 색을 지어낸 것이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위하여
여기서 앞의 모든 이야기가 뒤집힌다. 페니키아인이 소라 수만 마리를 으깨고, 화가가 금값을 치러 파랑을 사고, 여인이 납으로 얼굴을 칠하고, 노동자가 라듐에 뼈를 내주며 손에 넣으려 한 그것은, 실은 어느 병이나 항아리에도 담겨 있지 않았다. 색은 광물 속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머릿속에서 태어난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쫓은 것은 물질이 아니라, 그 물질이 인간의 뇌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경험이었다.

그렇다고 그 열망이 헛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는 그 불가능한 욕망이 제국을 움직이고 무역로를 열고 화학과 의학을 낳았다. 색은 우리가 세계에서 캐낸 것이 아니라 세계에 부여한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가장 값지게 여기는 많은 것이 그렇다. 저 바깥에 있는 줄 알지만 실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들 말이다. 다음에 유난히 선명한 색 하나가 눈을 붙잡거든, 잠시 생각해봐도 좋겠다. 나는 지금 세상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 머릿속을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