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부리 가면의 의사 — 흑사병에는 없던 옷
1479년 파비아가 역병 의사와 맺은 열여섯 개 조항에는 급여와 집과 시민권이 있었지만, 가면은 한 줄도 없었다
새부리 가면을 쓴 의사는 중세 흑사병의 얼굴이 됐지만, 그 옷이 쓰였다는 가장 이른 기록은 17세기 중반에야 나온다. 드 로름 발명설은 그가 죽은 뒤 나온 책 한 권에 기대고, 오늘의 이미지는 1656년 뉘른베르크의 풍자 판화에서 굳었다. 확실하게 남은 것은 옷이 아니라 도시가 의사를 고용한 계약서와 사망 장부다. 역병 의사는 중세의 괴물이 아니라 근세 도시 행정의 하급 공무원이었다.
1479년 5월 6일, 이탈리아 북부 도시 파비아. 시 당국과 의사 조반니 데 벤투라가 종이 한 장을 두고 마주 앉았다. 역병 환자를 맡는 대가로 한 달에 30플로린을 준다는 조항이 적혔고, 두 달 치를 미리 준다는 문장은 줄이 그어져 한 달 치로 고쳐졌다. 가구를 갖춘 집, 시민권, 일하다 죽으면 남은 급여를 유족에게서 돌려받지 않는다는 약속까지 열여섯 개 조항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계약서 어디에도 새부리 가면은 나오지 않는다. 밀랍 먹인 긴 옷도, 지팡이도 없다. 역병 의사라는 직업은 여기 분명히 있는데, 우리가 아는 그 옷은 없다.
흑사병 때 의사들은 그 옷을 입지 않았다
1347년부터 1351년까지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 가까이를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치는 지역과 연구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오늘날 이 재앙을 그림 하나로 떠올리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검은 옷에 새부리 가면을 쓴 의사를 그린다. 중세 시장 축제에도, 핼러윈 가게에도 그 모습이 '중세의 공포'라는 이름으로 걸려 있다.
하지만 흑사병 시기에 그런 복장이 쓰였다는 증거는 없다. 잉골슈타트 독일의학사박물관의 관장 마리온 마리아 루이징거는 2020년 논문에서 이런 보호복이 쓰였다는 가장 이른 기록은 17세기 중반 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서 나온다고 정리했다. 중부 유럽에서는 역병 때 부리 가면을 썼다는 기록이 아예 없다. 흑사병과 부리 가면 사이에는 300년 가까운 거리가 있다.

거꾸로 도시가 역병을 맡을 의사를 따로 고용하는 관행은 일찍부터 있었다. 파비아 계약서가 보여 주듯, 의사는 옷보다 먼저 계약서로 등장한다.
계약서가 정한 것은 옷이 아니라 일이었다
경제사학자 카를로 치폴라는 이 파비아 계약서를 두고, 고쳐 쓴 흔적 자체가 흥정의 기록이라고 봤다. 시는 의사가 급했고 의사는 조건을 따졌다. 치폴라에 따르면 이런 자리에 지원하는 사람은 대개 개업에 크게 성공하지 못한 의사나 자리를 잡으려는 젊은 의사였다. 벤투라도 이름난 인물이 아니었다. 시 기록에는 다른 후보 의사를 놓치면 대신할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걱정까지 남아 있다. 역병 의사는 도시가 골라 쓰는 자리가 아니라 겨우 구해서 붙잡아 두는 자리였다.
조반니 선생은 역병 환자를 돌보는 일 외에는 어떤 의무도 지지 않는다. 다만 필요하면 모든 환자를 치료하고 감염된 곳을 찾아가야 한다.
이 조항은 나중에 덧붙은 문장까지 합친 것이다. 그는 환자에게 따로 돈을 요구할 수 없었고, 시가 붙여 준 사람 없이는 도시를 돌아다닐 수 없었다. 하루 두세 번 이상 환자를 봐야 했다. 치폴라가 소개한 다른 의사는 감시인 없이 환자를 보러 나갔다가 견책과 벌금을 받았다. 시민권 조항에는 '처신하는 바에 따라'라는 단서가 나중에 붙었고, 의사가 그만두려면 적어도 열흘 전에 알려 시가 후임을 구할 수 있게 하라는 문장도 더해졌다. 역병으로 도시가 무너져 급여를 줄 수 없게 되면 벌금 없이 떠날 수 있다는 조항도 있다. 도시가 망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 계약서에 적혀 있는 셈이다. 열여섯 개 조항을 다 읽어도 옷에 관한 말은 한 줄도 없다. 시가 신경 쓴 것은 의사가 무엇을 입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가고, 누구를 보고, 얼마를 받고, 언제 떠날 수 있느냐였다.

역병 의사의 일은 치료에서 끝나지 않았다. 밀라노는 1450년부터 도시의 모든 사망자를 장부에 적었고, 사인을 판정하는 의사를 보건 관청이 따로 두었다. 장부에는 동네와 교구, 이름과 나이, 직업, 증상과 사인이 적혔다. 1480년 장부 한 권에서만 한 의사의 이름이 487건의 판정에 붙어 있다. 역병 의사들은 사망을 기록하고, 죽어 가는 사람의 유언을 받아 적기도 했다. 형편이 되는 사람들이 도시를 빠져나간 뒤에도 남아서 돈 없는 환자를 보고 죽음을 장부에 옮기는 사람. 역병 의사는 영웅이나 괴물이기 전에 도시 행정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부리 가면이 등장하는 17세기에도 이 구조는 그대로였다. 1630~31년 피렌체에서는 도시 엘리트가 이끄는 보건 위원회가 역병의 번짐을 지켜보고, 동네를 돌며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집을 가려냈다. 의사는 이 위원회 아래에서 이발외과의, 민간 치료사와 함께 일하는 한 자리였다. 옷이 바뀌어도 고용의 틀은 바뀌지 않았다. 역병 의사는 개인의 용기보다 먼저 행정의 필요에서 태어난 직책이었고, 그 직책의 무게는 대개 경력이 얕은 의사에게 돌아갔다.
두 벌의 옷은 서로 다르다
그렇다면 부리 가면은 어디서 왔을까. 흔히 프랑스 왕실 의사 샤를 드 로름이 1619년 파리 역병 때 고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출처는 거의 하나뿐이다. 드 로름의 친구였던 신부 미셸 드 생마르탱이 1683년에 낸 책인데, 드 로름이 죽고 5년 뒤, 이른바 발명 시점에서는 60년 넘게 지난 기록이다. 1619년이라는 연도가 늘 따라붙지만, 그 연도를 담은 동시대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생마르탱이 묘사한 옷도 지금의 이미지와 다르다. 레반트산 염소 가죽으로 발끝부터 머리까지 바지처럼 감싸고, 같은 가죽 가면에 반 피트쯤 되는 코를 달아 향료를 채웠다고 한다. 연구자 헤르베르트 마티는 생마르탱이 잘 믿고 엉뚱한 사람으로 알려졌고 책에 틀린 주장도 있다고 지적한다. 설령 그 묘사를 믿더라도, 드 로름의 옷은 우리가 아는 역병 의사와 거의 닮지 않았다.

반면 1656년 로마 역병을 다룬 판화의 설명문은 밀랍 먹인 천으로 만든 긴 옷, 큰 수정 안경, 향료를 채운 긴 부리, 장갑 낀 손에 든 막대를 말한다. 가죽 바지와 밀랍 천 외투. 여기에 1721년 마르세유 역병 뒤 제네바에서 나온 장자크 망제의 역병 논문 권두화가 더해진다. 이 그림은 1656년 로마 의사들이 입었다는 옷을 다시 모로코 가죽으로 설명하고, 눈구멍에 유리를 댔다고 적는다. 우리 머릿속의 역병 의사는 반세기 넘게 떨어진 이 기록들을 이어 붙인 옷이다.
부리 속 향료는 나쁜 공기가 병을 옮긴다는 당시 믿음에서 나왔다. 흥미로운 건 같은 시대의 관찰이다. 1657년 제노바의 격리 병원을 기록한 안테로 마리아 신부는 밀랍 입힌 옷에 벼룩이 잘 붙지 않는다고 적었다. 코에 대는 식초 스펀지는 주로 악취를 덜기 위한 것이라고 담담하게 적기도 했다. 현장의 사람들은 이론과 별개로 옷이 무엇을 막고 무엇을 못 막는지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록에서 중심은 부리가 아니라 옷감이었다.
조롱으로 그린 그림
지금 가장 많이 복제되는 역병 의사는 뉘른베르크의 출판업자 파울 퓌르스트가 1656년 무렵 펴낸 「로마의 쉬나벨 박사」다. 쉬나벨은 독일어로 부리라는 뜻이다. 판에는 콜룸비나라는 사람이 '실물을 보고 그렸다'는 라틴어 서명이 새겨져 있지만,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 해 쾰른의 게르하르트 알첸바흐도 거의 같은 그림을 찍어 팔았다. 로마의 소식은 독일 인쇄소를 거치며 팔리는 상품이 됐다. 그림 아래에는 라틴어와 독일어를 뒤섞은 우스꽝스러운 시가 붙어 있다.
그는 전염을 피해 달아나면서 제 삯은 챙겨 가고, 똥 더미의 까마귀처럼 시체를 찾아다닌다. 벙어리처럼 막대로 가리키며 처방을 내린다. 돈주머니가 그의 지옥이고, 금이 그가 거둬 가는 영혼이다.
같은 종이 위에서 산문 설명은 로마 의사들이 이렇게 다닌다고 담담하게 소개하고, 시는 그 의사를 비웃는다. 막대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어야 할지 가리킨다는 설명이 시에서는 벙어리 흉내가 된다. 이건 기록 사진이 아니라 풍자다. 마티는 2025년 논문에서 개신교 배경의 퓌르스트가 까마귀와 역병의 연상을 빌려 가톨릭 로마를 비꼬았다고 해석했다. 당시 로마와 나폴리는 1656~57년 역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뉘른베르크의 독자에게 부리 달린 로마 의사는 먼 나라의 탐욕과 허세를 보여 주는 우스운 그림이었다. 시가 겨냥한 것도 옷이 아니라 사람이다. 돈을 받고 남아야 할 의사가 몸을 사리고 삯만 챙긴다는 비난이다. 역병 의사가 계약으로 고용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조롱의 재료가 된 셈이다.

풍자가 사진이 되기까지
조롱의 그림이 역사의 증거로 바뀐 것은 한참 뒤다. 독일 외과의 오이겐 홀랜더의 의학 풍자화 연구서 1921년 판에는 이 판화가 도판으로 실렸다. 비슷한 무렵 '17세기 역병 예방복'을 그린 수채화들도 만들어져 웰컴 컬렉션에 남아 있다. 마티는 생마르탱의 가죽 옷, 1656년 판화, 1721년 망제의 역병 논문 삽화처럼 서로 어긋나는 자료를 한 벌로 합치는 습관이 보호 장비가 다시 관심을 끌던 20세기 초에 시작됐다고 본다.
베네치아와의 연결도 비슷하다. 베네치아 격리 병원 사료를 추적한 연구자는 부리 가면을 쓴 역병 의사와 베네치아를 잇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 연결은 훗날 카니발 가면의 인기에서 거꾸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실물도 믿기 어렵다. 루이징거는 잉골슈타트와 베를린에 남은 역병 의사 가면 두 점을 살펴보고, 둘 다 보호구로 쓰였다고 보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고 했다. 후대에 옛 모양을 흉내 내 만든 것인지 위조품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공포의 가면이 아니라 작업복
새부리 가면을 중세의 공포로 기억하면 두 가지를 놓친다. 첫째, 그 옷은 중세가 아니라 근세의 것이고, 그나마 실제로 얼마나 쓰였는지도 흐릿하다. 둘째, 그 옷보다 확실하게 남은 것은 계약서와 장부다. 급여, 집, 시민권, 동행인, 방문 횟수, 사망 기록. 역병 의사를 만든 것은 가면이 아니라 도시 행정이었다. 마티가 연구자와 교육자에게 역병 의사 그림을 쓸 때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림 한 장이 교과서에 실리는 순간, 그 그림을 새긴 사람의 비웃음까지 사실처럼 따라 들어온다.

그 옷이 입혀졌다면 그것은 괴물의 분장이 아니라 위험한 일을 떠맡은 하급 의사의 작업복이었다. 그리고 그 작업복은 풍자 판화 속에서 조롱받는 얼굴로 굳었다. 파비아의 벤투라가 그해 역병을 넘겼는지는 모른다. 치폴라도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고 적었다. 남은 건 흥정의 흔적이 가득한 계약서 한 장이고, 거기엔 가면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