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불타지 않았다 — 한 번에는
카이사르는 자기 손으로 지른 불을 기록하며 배만 적었고, 책과 도서관에 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카이사르, 테오필루스 주교, 칼리프 우마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태운 범인으로 번갈아 지목되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사료를 따라가면 결정적인 화재는 어디에도 없고, 70만 권이라는 숫자도 자료마다 4만에서 70만까지 흔들린다. 도서관을 죽인 것은 학자 추방과 끊긴 후원, 그리고 아무도 다시 베껴 쓰지 않은 수백 년이었다.
기원전 48년 가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 왕궁 구역에 갇혀 있었다. 이집트 왕위를 두고 다투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군대가 도시를 쥐고 있었고, 항구에는 적의 손에 넘어갈 배들이 떠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 배들에 불을 질렀다. 훗날 그가 직접 남긴 기록은 이렇다. 그 배들과 조선소에 있던 나머지 배들을 모두 불태웠다. 거기까지다. 책 이야기도, 도서관 이야기도 없다. 그런데 이천 년 뒤 우리는 이 밤을 인류 지식이 불탄 밤으로 기억한다.
범인은 셋, 시체는 없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비극의 상징이다. 고대 세계의 모든 책을 모았다는 곳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다는 이야기. 누가 불을 질렀느냐는 물음에는 늘 세 이름이 번갈아 나온다. 기원전 48년의 카이사르, 391년 세라페움을 허문 테오필루스 주교와 기독교도들, 642년 이집트를 정복한 아랍군과 칼리프 우마르. 누구를 범인으로 고르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로마 제국주의 비판이 되기도 하고, 종교적 광신 비판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사료를 하나씩 따라가면 결정적 화재가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불은 여러 번 났다. 그러나 어느 불도 "그날 도서관이 사라졌다"고 말할 만큼 확실하지 않다. 사건 현장은 있는데 시체가 없는 살인 사건에 가깝다. 컬럼비아 대학의 고대사학자 로저 배그널은 2002년 논문 「알렉산드리아: 꿈의 도서관」에서 이 공백을 견디지 못한 학자들이 희망 섞인 추측으로 빈칸을 채워 왔다고 꼬집었다.

카이사르가 태운 것
카이사르 범인설부터 보자. 가장 유명한 근거는 1세기 말~2세기 초의 플루타르코스다. 그는 『카이사르 전』에서 불이 조선소에서 번져 큰 도서관을 파괴했다고 썼다. 2세기의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70만 권이 이때 모두 탔다고 했고, 4세기의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도 같은 숫자를 되풀이했다.
그런데 이 증언들은 모두 사건보다 한참 뒤의 것이다. 정작 불을 지른 당사자는 배만 언급한다. 3세기 초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은 더 흥미롭다. 그의 그리스어 원문은 조선소와 곡물 창고가 타고 책도 탔다고 적는다. 창고를 뜻하는 말이 책에도 함께 걸려 있어서, 항구 창고에 쌓여 있던 책이 탔다고 읽는 해석이 유력하다. 알렉산드리아는 항구로 들어온 책을 거둬 들이던 도시였다. 수출용이든 입고 대기 중이든, 부두 창고에 책이 있었다는 건 이상하지 않다.

결정적인 건 그 뒤의 기록이다. 불이 난 지 이십여 년 뒤 알렉산드리아를 찾은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무세이온에 학자들이 모여 식사하고, 이제는 황제가 그 책임자를 임명한다고 적었다. 1세기 말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로마에서 불탄 도서관을 복구하려고 필사가들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내 책을 베끼게 했다. 베낄 책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카이사르의 불이 도서관을 끝장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70만 권이라는 꿈
카이사르 이야기에 늘 따라붙는 숫자가 있다. 70만 권. 하지만 고대 자료의 숫자는 서로 맞지 않는다. 기원전 2세기의 위작 문헌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20만 권을 모았고 50만 권을 목표로 한다고 적었다. 세네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4만 권이 탔다고 했다. 겔리우스는 70만 권이라 했는데, 일부 사본에는 7만 권으로 적혀 있다. 5세기 오로시우스의 사본들은 40만과 4만으로 갈린다. 12세기 비잔티움 학자 체체스는 왕궁 도서관에 49만 권, 바깥 도서관에 4만 2800권이 있었다고 했다. 적게는 4만, 많게는 70만. 열 배가 넘는 차이다.
배그널은 이 숫자들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기원전 3세기 말까지 활동한 그리스 저자로 이름이라도 남은 사람은 600명 남짓이다. 한 사람이 두루마리 50권씩 썼다고 넉넉히 잡아도 3만 1250권이다. 70만 권을 채우려면 같은 책을 스무 부 넘게 갖췄거나, 고대 저자 대부분이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의 결론은 실제 장서가 전해지는 숫자보다 한 자릿수쯤 적었을 것이라는 쪽이다. 거대한 숫자는 도서관의 크기를 재는 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품은 경외감을 재는 자였다.

세네카의 반응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4만 권이 탄 일을 두고 역사가 리비우스가 왕들의 안목이 빚은 걸작이라 칭송한 것을 비웃었다.
그것은 안목도 정성도 아닌 학식을 뽐내는 사치였다. 아니, 학식도 아니었다. 배우려고 모은 게 아니라 과시하려고 모았으니까.
1세기 로마인에게 이미 그 도서관은 지식의 보고이기 전에 구경거리였다.
늦게 도착한 두 이야기
391년, 테오필루스 주교가 이끄는 기독교도들이 세라페움 신전을 허물었다. 이 신전에는 '딸 도서관'이라 불린 분관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기록한 동시대 저자들은 누구도 책이 불탔다고 쓰지 않았다. 기독교 쪽의 루피누스와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도, 기독교를 미워한 이교도 에우나피우스도 마찬가지다. 기독교도를 비난할 거리라면 놓치지 않았을 에우나피우스마저 책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건 무게가 있다. 암미아누스가 카이사르 때 탔다는 70만 권을 세라페움 이야기 속에 적어 넣은 것도 두 도서관을 뒤섞은 혼동으로 본다. 391년 그곳에 책이 남아 있었는지부터가 불확실하다. 신전 파괴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도서관 파괴와 같은 사건으로 보는 데는 근거가 모자란다.
칼리프 우마르 이야기는 사정이 더 나쁘다. 아랍군 장군 아므르가 책을 어떻게 할지 묻자 우마르가 "쿠란과 같으면 쿠란으로 족하고, 다르면 필요 없다"고 답했고, 책이 여섯 달 동안 목욕탕 땔감이 됐다는 이야기다. 이 일화를 처음 전하는 사람은 1162년에 태어나 1231년에 죽은 압드 알라티프이고, 1248년에 죽은 이븐 알키프티가 살을 붙였다. 정복은 642년이다. 사건 뒤 550년이 넘도록 아무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정복을 가까이서 기록한 니키우의 요한도, 정복사를 자세히 쓴 아랍 역사가들도 침묵한다. 영국의 이집트사 연구자 앨프리드 버틀러는 1902년에 이미 이것을 우화라고 판정했다.
두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증거가 아니라 쓸모에 있다. 하나는 기독교를 비난하고 싶은 사람에게, 다른 하나는 이슬람을 비난하고 싶은 사람에게 편리했다. 배그널은 젊은 시절 한 잡지에 이 주제로 글을 썼는데, 편집자가 그에게 알리지도 않고 모든 책임을 기독교도에게 돌리는 글로 고쳐 버렸다고 회고한다. 단순한 줄거리는 언제나 잘 팔린다.
느린 불
그렇다면 도서관은 무엇이 죽였나. 첫 번째 타격은 불보다 훨씬 이른 기원전 145년에 왔다. 왕위를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형의 편에 섰던 지식인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다. 도서관장이던 사모트라케의 아리스타르코스는 키프로스로 달아났다. 2세기 말~3세기 초의 저자 아테나이오스는 이때 쫓겨난 문법학자, 철학자, 기하학자, 의사들이 지중해의 섬과 도시를 선생으로 가득 채웠다고 적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이 흩어진 것이다. 배그널은 이 추방 이후에 적극적인 수집이 이어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책을 사들였다는 기록도 거의 모두 기원전 3세기의 것이다.
두 번째는 로마 시대에 사라진 후원이다. 로마 정부가 도서관에 책 구입 예산을 댔다는 증거는 없다. 왕실의 자존심이 걸린 사업이, 황제가 멀리 로마에서 다스리는 속주 도시의 시설 가운데 하나로 내려앉았다. 3세기에는 카라칼라의 학살과 잇단 내전이 도시를 거듭 할퀴었다.
세 번째가 재료다. 파피루스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튼튼해서, 좋은 조건이면 수백 년을 버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는 사막이 아니라 습한 지중해 도시다. 실제로 이 도시에서는 고대 파피루스가 단 한 장도 살아남지 않았다. 배그널은 두루마리가 한 세기쯤 쓰이는 일은 흔했고 이삼백 년이 한계였다고 본다. 그렇다면 티베리우스 황제 무렵, 그러니까 1세기 초에 이미 초기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이 모은 책은 대부분 쓸 수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책을 살리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다시 베껴 쓰는 것. 4세기 카이사레아의 도서관은 낡은 책을 양피지로 옮겨 적어 되살렸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런 작업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왕궁 구역의 도서관 건물이 결정적 피해를 입은 시점을 굳이 꼽자면, 요즘 학계는 272~273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팔미라 세력에게서 도시를 되찾으며 왕궁 일대를 초토화했을 때를 유력하게 본다. 이 역시 도서관을 직접 언급한 사료는 없고, 왕궁 구역 전체가 파괴됐다는 기록에서 나온 추정이다. 대중적 이야기에서는 거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용의자다. 그리고 그때 불에 탔다 해도, 이미 삭아 가던 책이었을 공산이 크다. 도서관은 하룻밤에 죽은 게 아니라 여러 세기에 걸쳐 조금씩 죽었다.
불 이야기가 가리는 것
배그널의 결론은 차갑다. 누군가를 범인으로 지목하려는 시도는 포기해야 한다. 도서관이 사라진 것은 그것을 세운 열의와 관심이 끝났고, 책을 새 매체로 옮겨 가며 지킬 꾸준한 관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타지 않은 채 썩어 가는 책으로 가득한 건물이 남아 있었다 한들, 티끌만큼의 차이도 없었을 것이다.
화재 이야기가 끈질긴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편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악당이 있으면 책임은 악당에게 있다. 한 번의 불, 한 명의 폭군, 한 무리의 광신도.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무고해진다. 반대로 지식이 돌보지 않아서 사라졌다고 인정하면, 책임은 긴 세월 동안 예산을 끊고 필사를 멈추고 무관심했던 수많은 평범한 결정에 흩어진다. 거기엔 극적인 장면이 없다. 그래서 이야기로는 인기가 없다.

그러나 교훈은 바로 거기에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책들은 한 번의 불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방치로 사라졌다. 오늘 우리의 디지털 기록도 마찬가지다. 서버가 불타서가 아니라 아무도 형식을 옮기지 않아서, 아무도 비용을 대지 않아서 조용히 읽을 수 없게 된다. 지식은 불로 잃는 게 아니라 돌보지 않아서 잃는다. 극적인 화재 이야기는 그 지루한 진실을 가리는 데 쓰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