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소 퍼즐 — 지도를 자르던 교구가 어른의 놀이가 되기까지
1933년 2월 미국에서 일주일에 1천만 개 넘게 찍혀 나온 퍼즐 가운데 700만 개 이상은 광고용 사은품이었다
직소 퍼즐은 18세기 영국 귀족 아이들의 지리 교재로 시작했고, 그 조각은 서로 맞물리지도 않았다. 이름은 퍼즐을 자르지도 않은 톱에서 왔고, '최초의 발명자'는 200년 동안 세 번 바뀌었다. 1908년의 부자들과 1933년의 실업자, 2020년의 봉쇄된 사람들이 똑같이 이 상자를 산 이유를 따라가면, 퍼즐이 판 것은 그림이 아니라 끝이 보장된 일이었다는 사실에 닿는다.
1765년, 런던 근교 치엄 스쿨에 다니던 토머스 그림스톤이라는 소년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철자는 엉망이었지만 용건은 분명했다. 나무 지도에서 주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이름이 플린트셔라고. 다른 걸 구할 수 있겠느냐고. 웨일스 북동쪽 끝의 작은 주 하나가 마호가니 조각이 되어 기숙사 어딘가로 굴러 들어간 것이다. 이 소년이 잃어버린 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교재였다. 그리고 그 교재는 백몇십 년 뒤, 일자리를 잃은 어른들이 저녁마다 식탁에 쏟아 놓는 물건이 된다.
'최초'는 계속 바뀌었다
직소 퍼즐의 발명자로 가장 흔히 불리는 이름은 런던의 지도 판각공 존 스필스베리다. 그는 1763년 런던 상공인 명부에 스스로를 "나무 지도 해체공"이라고 올렸고, 날짜가 찍힌 그의 퍼즐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1766년 유럽 지도다. 그런데 이 '최초'의 역사부터가 재미있다. 1812년 출판업자 존 월리스는 자기가 1782년부터 조각 지도를 만든 "원조 제조업자"라고 광고했고, 이 주장은 160년 동안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1972년 린다 한나스가 스필스베리의 기록을 찾아내면서 원조가 바뀌었다.
그 뒤로도 원조는 계속 뒤로 밀렸다. 독일 교사 에버하르트 하우버는 1725년에 이미 지도를 경계선대로 잘라 한 무더기로 섞은 뒤 아이에게 맞추게 하라고 썼다. 1744년에는 훗날 조지 3세가 되는 왕자와 그 동생을 가르치던 스위스인 요한 카스파어 베트슈타인이 장인에게 맡겨 자른 지도 두 벌을 왕실로 보내며 쓴 편지가 남아 있다. 그는 이 "게임"이 왕자들의 지리 감각을 키워 줄 거라고 적고는, 출처는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생 에드워드 왕자가 스위스를 싫어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놀이로 위장하는 일은 처음부터 약간의 속임수였던 셈이다. 1750년대 런던에서 여학교를 운영한 잔마리 르프랭스 드 보몽은 학생들에게 "나무 지도"를 사게 했고, 1759년과 1762년의 귀족 편지에 그 이름이 나온다. 다만 보몽의 지도는 지금까지 한 점도 확인되지 않았다. 게다가 스필스베리가 실린 바로 그 1763년 명부에는 르프랭스라는 사람이 "나무 지도 해체의 발명자"로, 그것도 "누이 보몽 부인의 방식을 따른다"는 설명과 함께 올라 있다. 같은 책 안에서 이미 원조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정직하게 말하면 스필스베리는 발명자가 아니라, 날짜가 찍힌 실물이 남은 가장 이른 제작자이자 이것을 처음 제대로 판 상인이다. 종이 기록만 남은 사람과 물건이 남은 사람이 겨루면, 역사는 대개 물건 쪽 손을 들어준다.

맞물리지 않는 조각
18세기 조각 지도에는 우리가 아는 볼록한 머리와 오목한 홈이 없었다. 조각은 나라나 주의 경계선을 따라 잘렸고, 서로 걸리지 않고 그냥 옆에 놓였다. 조각 하나를 집는 것이 곧 플린트셔나 프랑스를 집는 일이었고, 다 맞춘다는 것은 지리를 외웠다는 뜻이었다.

값도 장난감 값이 아니었다. 스필스베리의 가격표에는 상자에 따라 7실링 6펜스에서 12실링까지 적혀 있었고, 주요 고객은 귀족 자녀와 기숙학교였다. 보몽은 학비와 별도로 반 기니를 더 받고 조각 지도를 팔았다. 왕실 가정교사 샬럿 핀치는 1765년 무렵 왕자들의 조각 지도를 보관할 전용 장을 짜 두었는데, 이 장이 2000년 경매에 나왔을 때 안에는 초기 조각 지도 열여섯 벌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스필스베리 것은 그중 두 벌뿐이었다. 정작 스필스베리는 1769년 서른 살 무렵 세상을 떠났고, 사업을 이어받은 아내는 물건을 더 발전시키지 못했다. 반세기 뒤 제인 오스틴의 소설 맨스필드 파크에서 부잣집 사촌들이 가난한 친척 패니를 흉보는 첫마디가 이것이다.
엄마, 생각 좀 해 보세요. 사촌은 유럽 지도를 맞추지도 못해요.
지도를 맞추지 못한다는 것은 놀 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집 아이라는 뜻이었다.
뉴포트의 어른들
이 물건이 어른 손에 넘어간 곳은 20세기 초 미국이었다. 1907년 무렵 뉴포트의 부자 별장에서 시작된 유행은 1908년 도시로 번졌다. 1908년 5월 뉴욕타임스는 "새 퍼즐이 도시의 정신 건강을 위협한다"는 제목을 달았다. 같은 해 11월 뉴욕트리뷴의 묘사는 이렇다.
브리지 휘스트가 타격을 입었고, 솔리테어는 완전히 코가 납작해졌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금융가 J. P. 모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이 퍼즐에 빠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어른용 퍼즐은 지금보다 훨씬 불친절했다. 상자에 완성 그림이 없었고, 조각은 색이 바뀌는 선을 따라 잘려서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곧 조각의 경계였다. 그래도 팔렸다. 값은 대개 조각당 1센트였다. 400조각짜리가 4달러였는데, 당시 노동자 주급이 12달러 안팎이었다. 사람들은 퍼즐 클럽과 대여점을 만들어 돌려 가며 했다. 1908년 파커 브러더스는 조각을 서로 맞물리게 자르고 동물이나 글자 모양의 조각을 섞은 패스타임 퍼즐을 내놓았고, 1909년에는 보드게임 생산을 아예 멈추고 300명을 퍼즐에만 붙였다. 톱을 잡은 사람은 대부분 여성 노동자였고, 조각 수대로 돈을 받았다.

이 유행을 연구한 역사가 앤 윌리엄스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1907년의 불황을 꼽는다. 부자들의 사교 놀이로 시작한 첫 유행에도 이미 경기 침체가 깔려 있었다는 얘기다.
실톱에서 온 이름, 그러나 실톱이 아니었다
'직소'라는 이름은 조각이 맞물리는 방식과 아무 상관이 없다. 도구 이름이다. 직소는 1855년 무렵 미국에서 쓰이기 시작한 말로, 날이 위아래로 빠르게 오르내리는 톱을 가리켰다. 그 전까지 이 물건의 이름은 '조각 지도' 혹은 '조각 그림'이었다. '직소 퍼즐'이라는 말이 인쇄물에 처음 나온 것은 1906년이다. 톱과 퍼즐이 연결된 시기를 1880년 무렵으로 보는 자료도 있어서, 말이 먼저 입에 붙고 글로 남기까지 20년쯤 걸렸을 수 있다.
더 우스운 점도 있다. 스필스베리는 상감 세공용 손톱으로 잘랐고, 20세기 초 퍼즐 장인들이 실제로 쓴 것도 발로 밟는 실톱이나 스크롤 톱이었다. 퍼즐은 정작 자기를 자르지 않은 도구의 이름을 달고 있는 셈이다. 조각이 맞물리기 시작한 것은 스필스베리로부터 약 140년 뒤인 1908년 무렵이니, "맞물리게 잘라서 직소"라는 설명은 순서부터 맞지 않는다.
그래도 이름이 바뀐 것 자체는 의미가 있다. '조각 지도'는 안에 담긴 내용, 곧 배울 거리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직소 퍼즐'은 그것을 만든 손과 톱, 곧 작업을 가리킨다. 그림이 지도든 풍경이든 상관없어진 순간 이 물건은 교재에서 빠져나와 손으로 하는 일이 됐다.
수요일마다 새 퍼즐
두 번째 유행은 성격이 달랐다. 1932년, 두꺼운 종이를 쇠틀로 한 번에 찍어 내는 다이컷 퍼즐이 쏟아졌다. 종이 퍼즐 자체는 19세기 말부터 있었지만 싸구려로 보일까 봐 업계가 꺼렸던 물건이다. 불황이 그 체면을 치워 버렸다. 1932년 가을부터 '이번 주의 직소' 같은 주간 퍼즐이 매주 수요일 가판대에 25센트로 깔렸다. 대여점에서는 하룻밤에 5센트 남짓이면 빌릴 수 있었고, 일감이 끊긴 목수들은 5달러짜리 전동 실톱으로 차고에서 나무 퍼즐을 잘랐다.
더 눈여겨볼 것은 광고다. 1932년 6월 한 칫솔 회사가 칫솔을 사면 50조각 퍼즐을 공짜로 줬고, 수백 개 회사가 뒤를 따랐다. 1933년 2월에 일주일 1천만 개가 넘게 생산됐는데, 그중 700만 개 이상이 광고용이었다는 게 역사가들의 추산이다. 당시 신문은 주당 200만 개로 봤으니 숫자는 다섯 배까지 벌어진다. 어느 쪽이든 퍼즐은 팔리는 상품이기 이전에 다른 상품에 끼워 주는 미끼가 될 만큼 흔했다. 유행은 1933년 봄에 한풀 꺾였지만, 그때까지 팔린 다이컷 퍼즐이 1억 개쯤으로 추산된다. 1909년의 톱질하는 여성들 대신 이번에는 일 없는 남자들이 차고에서 톱을 돌렸다는 것도 달라진 풍경이다.

끝이 보장된 일
1908년의 뉴포트와 1933년의 차고는 소득으로 치면 정반대 끝이다. 한쪽은 남아도는 여가였고, 다른 쪽은 원치 않게 떠안은 여가였다. 그런데 사간 물건은 같았다. 퍼즐이 판 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1908년 상자에는 아예 그림이 없었고, 1933년 퍼즐의 상당수는 칫솔에 딸려 오는 광고 그림이었다. 그림이 목적이었다면 둘 다 설명이 안 된다. 사람들이 산 것은 시작과 끝이 정해진 일이었다. 조각은 반드시 다 들어맞고, 마지막 한 조각을 끼우면 일이 끝난다. 일자리도 경기도 언제 끝날지 모르던 사람들에게, 이만큼 확실하게 끝나는 일은 드물었다.
대여점이 두 유행 모두에 등장한 것도 그래서 자연스럽다. 다 맞춘 퍼즐은 다시 흩어 상자에 넣고 돌려주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물건을 가지려고 돈을 낸 게 아니라, 며칠 저녁을 채울 일감을 빌린 것이다.

그래서 퍼즐은 사람들이 집에 묶일 때마다 돌아왔다. 1950년대 텔레비전이 거실을 차지하면서 한동안 조용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2020년 3월, 미국 퍼즐 회사 세아코는 한 대형 소매점에서 판매가 전년 같은 주보다 300% 늘었다고 했고, 라벤스부르거는 미국 판매가 370% 뛰었다고 밝혔다. 둘 다 파는 쪽이 내놓은 숫자라 감안해서 들어야 하지만, 매장 선반이 비었다는 보도는 여러 곳에서 겹친다. 퍼즐은 필수품으로 분류되지 않아 여러 주에서 공장이 멈췄고, 수요가 몰리는데 물건이 끊겼다. 라벤스부르거는 그해 전 세계에서 퍼즐 2,800만 개 넘게 팔았다고 알려졌다.
플린트셔를 잃어버린 그림스톤은 새 조각을 구해 달라고 했다. 빈칸이 있으면 끝나지 않으니까. 250년이 지나도 퍼즐을 사는 이유는 그대로다. 우리는 그림을 맞추려고 퍼즐을 사는 게 아니다. 끝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