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수 — 무기가 없다는 증명이 아니었다
가장 오래된 악수 그림 속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두 왕은, 칼을 찬 채 손을 맞잡고 있다.
악수가 손에 무기가 없음을 보이려고 시작됐다는 설명은 어디에나 있지만, 출처를 따라가면 19세기 말의 추측에 닿는다. 고대의 맞잡은 손은 동맹과 맹세, 작별의 표시였고, 누구에게나 건네는 인사로 악수를 밀어붙인 것은 모자 벗기와 절을 거부한 17세기 퀘이커였다. 그리고 19세기 예법서는 누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지를 정해, 평등의 몸짓에 다시 서열을 심었다.
1962년, 이라크 북부 님루드의 옛 요새 터에서 커다란 돌 받침대 하나가 흙 밖으로 나왔다. 기원전 9세기 중엽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 3세의 옥좌를 받치던 돌이다. 앞면에 두 왕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이 샬마네세르, 왼쪽이 반란을 겪던 바빌론 왕 마르두크자키르슈미. 둘은 차양 아래 마주 서서 오른손을 맞잡고 있다. 그리고 둘 다 칼을 찼고, 등 뒤에는 무장한 호위병이 줄지어 서 있다. 흔히 '가장 오래된 악수 그림'으로 불리는 이 장면에서, 누구도 손에 무기가 없다는 걸 보여 주려 애쓰지 않는다. 지금 바그다드의 이라크 박물관에 있는 이 돌은, 우리가 악수에 대해 당연하게 믿어 온 이야기와 처음부터 어긋나 있다.
그 이야기란 이렇다. 옛날 사람들은 낯선 이를 만나면 칼 쥐는 손인 오른손을 내밀어 비어 있음을 보였고, 손을 위아래로 흔든 건 소매에 숨긴 단검을 털어 내기 위해서였다. 여행 가이드도, 교양 방송도, 비즈니스 매너 강의도 이 설명을 되풀이한다. 그럴듯하다. 그런데 출처를 따라가 보면 바닥이 금방 드러난다.
빈손 이야기는 어디서 왔나
19세기 후반 학자들은 인사 동작의 기원을 앞다퉈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가 내놓은 설은 무기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1891년 미국 인류학자 개릭 맬러리가 요약한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이 서로 상대의 손에 입을 맞추려다 서로 말리는 실랑이가 되풀이되면서 손을 흔드는 동작이 굳었다는 것이다. 맬러리는 『파퓰러 사이언스 먼슬리』에 실은 그 글에서 스펜서를 반박하며, 무기 없는 손을 내보이는 일이 악수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고 썼다. 그는 이것을 칼이나 총을 들어 올리는 군대식 경례와 묶어, 잠시 무방비를 드러내는 신뢰의 몸짓이라고 해석했다. 재미있게도 맬러리는 같은 글에서 '흔드는' 동작 자체를 부차적인 것으로 치웠다. 옛 관습은 손을 흔드는 게 아니라 잡고 꾹 누르는 것이었다는 이유다. 단검을 털어 낸다는 설명이 기대는 바로 그 동작을, 당대 연구자는 본질이 아니라고 본 셈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두 가지다. 당대 최고의 이론가들조차 서로 다른 기원을 내세웠고, 무기 설명은 증거가 아니라 '그랬을 수도 있다'는 추론의 모양으로 등장한다. 이 글을 쓰며 추적한 범위에서는 맬러리보다 앞선 문헌을 찾지 못했다. 더 이른 기록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어느 쪽이든, 고대나 중세 사람이 "무기가 없음을 보이려고 손을 잡는다"고 직접 적은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18~19세기 영국의 악수 확산을 연구한 역사학자 퍼넬러피 코필드도 선을 긋는다. 빈손이 안전하다는 연상은 분명 있었지만, 악수는 몸을 뒤지는 무기 검사가 아니었고 폭력이 줄어든 사회 분위기는 확산을 돕는 조건이었을 뿐 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고인류학자 엘라 알샤마히는 아예 이 통념이 설득력 있는 근거 없이 반복되어 왔다고 말한다.
맹세하는 손
그렇다면 고대의 맞잡은 손은 무엇이었나. 님루드의 돌부터 보자. 샬마네세르는 기원전 851~850년 반란을 일으킨 동생에 맞서 바빌론 왕을 도왔고, 그 동맹을 자기 옥좌 받침에 새겼다. 손은 인사가 아니라 약속의 도장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6권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전장에서 맞닥뜨린 그리스의 디오메데스와 트로이 편의 글라우코스는 조상 대부터 손님과 주인으로 맺어진 사이임을 알고 싸움을 멈춘다. 둘은 전차에서 뛰어내려 손을 맞잡고 신의를 맹세한 뒤 갑옷을 바꾼다. 무장한 두 전사가 무장을 푼 게 아니라, 무장한 채로 맹세한 것이다.
기원전 5~4세기 아테네의 묘비에는 오른손을 맞잡은 인물이 자주 나온다. 학자들이 덱시오시스라고 부르는 이 모티프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작별, 저세상에서의 재회, 끊기지 않는 가족의 끈을 뜻했다. 로마로 가면 맞잡은 오른손은 혼인과 계약, 충성 서약의 표시가 된다. 그리스어 동사에 '맞이하다'는 뜻도 있었으니 인사와 아주 무관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남아 있는 그림과 글에서 손을 맞잡는 순간은 대개 무게가 실린 순간이다. 동맹, 맹세, 혼인, 이별. 길에서 스치듯 나누는 가벼운 몸짓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모자를 벗지 않은 사람들
악수가 오늘날처럼 누구에게나 건네는 인사가 된 과정에서 가장 자주 불려 나오는 이름이 17세기 영국의 퀘이커다. 창시자 조지 폭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주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실 때, 높은 자에게든 낮은 자에게든 모자를 벗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부자나 가난한 자, 큰 자나 작은 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남녀를 '너'라고 불러야 했다.
당시 영국에서 인사는 서열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아랫사람은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혔고, 윗사람은 모자를 쓴 채 고개만 끄덕였다. 퀘이커는 이 '모자 예법'이 사람을 신처럼 섬기는 일이라며 거부했고, 그 대가로 매를 맞고 벌금을 물고 감옥에 갔다. 폭스는 사람들에게 모자를 벗지 않았다는 이유로 얼마나 얻어맞고 갇혔는지, 모자를 억지로 벗겨 내던져 버린 일까지 적어 두었다. 다만 그의 일기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무엇을 거부하라는 쪽이다. 모자를 벗지 말 것, 허리 굽혀 절하지 말 것, '좋은 아침입니다' 같은 인사말도 하지 말 것. 그 빈자리를 악수로 채우라는 지시는 적혀 있지 않다.

그런데 퀘이커가 악수를 발명한 것은 아니다. 역사학자 존 월터는 2024년 논문에서 그보다 훨씬 이른 증거를 모았다. 1557년 영국을 찾은 베네치아 사람은 "영국인들은 만나면 독일식으로 악수한다"고 적었고, 1607년 스코틀랜드의 한 논객은 "두 오른손을 맞잡아 흔드는 스코틀랜드의 좋은 옛 방식"을 칭찬했다. 1662년의 한 기록은 아예 "친구를 만나면 악수하는 것이 우리네 풍습"이라고 말한다. 폭스의 일기에도 퀘이커가 아닌 치안판사가 그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 흔드는" 장면이 나온다. 월터가 강조하는 건 이 악수에도 자격이 따랐다는 점이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없었고, 왕은 신하와 악수하지 않았다. 악수는 원래 친구나 대등한 사이에서, 신분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오가던 몸짓이었다.
퀘이커가 바꾼 것은 바로 그 범위다. 절과 모자를 모두 버린 그들에게 남은 인사는 악수였고, 그들은 그것을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내밀었다. 코필드는 퀘이커가 악수를 가장 눈에 띄게, 원칙에 따라 쓰는 집단이었으며 상인들의 거래 관행과 함께 18세기 도시에 이 인사를 퍼뜨렸다고 본다. 악수가 널리 퍼진 힘은 빈손의 안전이 아니라 이 평등이었다. 1776년 무렵 판화가 토머스 뷰익은 삼각모를 쓴 두 상인이 악수하는 장면을 아무렇지 않은 일상처럼 새겼고, 1816년 제인 오스틴의 『에마』에서 해리엇은 상류층 아가씨가 드디어 자기와 악수해 주었다며 들떠 집에 돌아간다. 악수는 흔해졌지만, 누가 누구의 손을 잡아 주느냐는 여전히 사건이었다.
누가 먼저 손을 내미는가
흥미롭게도 17~18세기 영국의 예법서들은 악수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코필드에 따르면 그 책들은 여전히 모자를 벗는 법, 한쪽 다리를 빼며 절하는 법, 무릎을 굽히는 법을 가르쳤다. 악수는 예법서 바깥에서, 거리와 시장에서 퍼졌다.
19세기에 들어 예법서가 마침내 악수를 받아들였을 때, 그들이 먼저 한 일은 규칙을 붙이는 것이었다. 1847년 미국의 여성용 예법서는 처음 소개받은 자리에서 악수하는 것은 "교양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1877년 필라델피아에서 나온 일라이자 더피의 예법서는 악수를 할지 말지는 "나이 많은 쪽, 혹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쪽"이 정할 일이라고 적고, 한 권위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끝맺는다.
손을 내밀지 말지는 윗사람의 특권이다. 그러니 아랫사람은 결코 먼저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
같은 책은 남자는 숙녀가 손을 내밀기 전까지 그 손을 잡을 권리가 없다고 했고, 장갑을 벗는 관습은 기사가 쇠 장갑을 벗던 데서 왔다는 그럴듯한 기원담까지 곁들였다. 책은 그 근거를 한 줄도 대지 않는다. 기원담은 이렇게 쉽게 만들어진다. '귀족의 일원'이 썼다는 영국 예법서 『좋은 사회의 예법과 규칙』은 1918년에 39판을 찍었는데, 여기서도 신사가 소개될 때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숙녀의 특권"이다.
'특권'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먼저 손을 내밀 권리는 숙녀에게, 윗사람에게, 연장자에게, 주인에게 있었다. 아랫사람은 기다려야 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밀던 손에 다시 순서가 매겨졌다. 월터가 16세기에서 찾아낸 자격의 논리가 퀘이커를 지나 인쇄된 규칙으로 돌아온 셈이다. 평등의 몸짓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안에 서열이 다시 들어앉았다.

2020년 봄, 거둬들인 손
2020년 4월, 미국 전염병 대응을 이끌던 앤서니 파우치는 월스트리트저널 팟캐스트에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다시는 악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뿐 아니라 독감도 크게 줄 거라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다른 방송에서는 "그 관습을 끊어야 한다"고도 했다. 빈손이 안전의 증거라던 오래된 이야기가 무색하게, 이번에는 빈손 그 자체가 위험이 됐다. 한동안 세계는 정말 손을 거둬들였다. 팔꿈치를 부딪치고,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악수는 돌아왔다. 수천 년 된 동작이 몇 해의 공백을 쉽게 견딘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악수가 무기 검사였다면 사람들이 칼을 차고 다니지 않게 된 순간 쓸모를 잃었어야 한다. 하지만 악수가 말하는 것은 따로 있다. 나는 당신 앞에서 몸을 굽히지 않고, 당신도 내 앞에서 굽히지 않는다는 것. 적어도 손이 맞닿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같은 높이에 서 있다는 것.

그 약속은 한 번도 완전히 지켜진 적이 없다. 고대의 왕들은 동맹을 맺으며 누가 더 큰지를 따졌고, 19세기 응접실은 누가 먼저 손을 내밀지를 정했다. 오늘도 우리는 악수하기 전에 잠깐 계산한다. 먼저 내밀어도 되는 사람인가. 악수가 안전을 알리는 신호로 태어났다는 증거는 없다. 악수는 평등을 알리는 신호로 퍼졌고, 사람들은 그 평등을 곧바로 서열 속에 다시 길들였다. 손을 내밀기 전 그 짧은 머뭇거림이, 그 오래된 줄다리기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