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기계 — 우리는 왜 플러그를 거부하는가
이미 기계 안에 있다는 말을 들은 대학생 80명 가운데 59%가 플러그를 뽑지 않겠다고 답했다
1974년 노직이 상상한 경험 기계는 50년 동안 쾌락주의를 쓰러뜨리는 결정타로 쓰였다. 그런데 이미 기계 안에 있다고 말하고 나가겠느냐고 묻자 많은 사람이 머물기를 골랐다. 우리가 지켜 온 것은 현실이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였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노직이 틀린 것은 아니다. 무너진 것은 그의 직관을 여론조사처럼 쓰던 관행이다.
토요일 아침, 한 시간은 더 자겠다고 마음먹은 참에 초인종이 울린다. 투덜거리며 문을 열자 검은 재킷에 선글라스를 쓴 키 큰 남자가 서 있다. 자신을 스미스라고 소개한 그는 끔찍한 실수가 있었다고 말한다. 당신의 뇌는 착오로 경험 기계에 연결되어 있었고,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만든 것이라고. 원래 연결될 사람은 따로 있었다고. 그러니 고르라고 한다. 이 대화의 기억을 지우고 계속 연결되어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진짜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 2010년 철학자 펠리페 데 브리가드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학부생들에게 건넨 설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답은 반세기 동안 철학 교과서에 실려 온 직관 하나를 흔들었다.
탱크에 떠 있는 소설가
원조는 1974년이다. 로버트 노직은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의 42쪽에서 45쪽에 걸쳐 기계 하나를 상상했다. 신경과학자들이 뇌를 자극하면 당신은 위대한 소설을 쓰고, 친구를 사귀고, 흥미로운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고 느낀다. 그동안 몸은 전극을 단 채 탱크에 떠 있다. 경험 목록은 2년치씩 고르고, 2년마다 잠깐 나와 다음 2년을 고른다. 흔히 1974년판은 2년짜리, 1989년판은 평생짜리라고 요약하지만 원문의 질문은 처음부터 "평생 이 기계에 연결하겠는가"였다. 2년은 계약 기간이 아니라 메뉴를 다시 고르는 주기다.
노직은 우리가 들어가지 않을 이유를 셋 댔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는 경험이 아니라 실제로 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데, 탱크 속 사람은 용감한지 친절한지 답이 없는 "정해지지 않은 덩어리"다. 그리고 기계는 우리를 사람이 만든 현실 안에 가둔다. 그는 향정신성 약물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한 이유도 여기서 찾았다. 어떤 이에게 약물은 작은 경험 기계이고, 다른 이에게는 더 깊은 현실로 가는 통로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스스로 사는 것, 현실과 닿은 채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이 대목이 동물 윤리를 다루는 장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노직은 경험 말고 무엇이 중요한지 답하기 전에는 동물이 느끼는 것만으로 우리가 할 일의 한계를 정할 수 없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곁가지로 꺼낸 사고실험이 본론보다 오래 살아남은 셈이다.
50년짜리 결정타
그 뒤 경험 기계는 쾌락주의, 곧 좋은 삶은 결국 좋은 느낌의 총량이라는 생각을 쓰러뜨리는 표준 무기가 됐다. 논리는 단순하다. 쾌락주의가 맞다면 기계 속 삶이 더 낫다. 그런데 거의 모두가 들어가길 거부한다. 그러니 우리는 느낌 말고 다른 것, 현실을 그 자체로 아낀다. 철학자 댄 와이저스는 이 사고실험이 쾌락주의를 반박했다고 쓴 학자를 스물여덟 명까지 세었다. 쾌락주의자들의 반론도 있기는 했다. 현실을 챙기는 습관은 대개 더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몸에 밴 것이고, 기계 앞에서 움찔하는 것도 그 습관의 잔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론은 늘 궁색해 보였다. 직관이 너무 또렷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제 한가운데에 경험적 주장이 박혀 있다는 점이다. "거의 모두가 거부한다"는 것도, 거부의 이유가 "현실을 아껴서"라는 것도, 노직은 확인하지 않았다. 데 브리가드가 수업에서 비공식적으로 물었을 때도 학생 다수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유를 물으니 60%가 현실과 상관없는 답을 냈다. 프로그램이 내가 원할 것을 다 알아맞힐 리 없다, 친구도 가족도 없이 혼자 들어가기 싫다, 모든 게 미리 짜여 있으면 놀랄 일이 없어 오히려 재미없겠다는 식이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의 웰빙 항목은 경험 기계를 한 번 훑고 쾌락주의를 치워 버리는 요즘 풍조가 방법론적으로 건전하지 않다고 적는다.

스미스 씨의 설문
데 브리가드는 질문을 뒤집었다. 들어갈지 묻는 대신 이미 들어가 있다고 말하고 나갈지 물었다. 1994년 애덤 콜버가 처음 제안한 이른바 거꾸로 된 경험 기계를 실제 설문으로 옮긴 것이다. 철학 수업을 들은 적 없는 학부생 72명을 세 집단으로 나눴다. 진짜 삶에 대해 아무 정보도 주지 않은 집단에서는 54%가 현실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진짜 당신은 교도소 수감자라는 말을 들은 집단에서는 13%만 돌아가겠다고 했다. 진짜 당신은 모나코에 사는 억만장자 예술가라는 말을 들은 집단은 정확히 반반으로 갈렸다.
여기서 짚을 것이 있다. 이 연구를 인용하는 글 상당수가 "13%만 현실을 골랐다"를 대표 수치로 쓰지만 그건 수감자 조건 하나다. 아무 정보가 없을 때는 오히려 과반이 나가겠다고 했다. 데 브리가드도 이 점을 알았다. 그래서 학생 80명에게 한 가지만 바꾼 설문을 다시 돌렸다. 바깥의 삶은 지금까지 겪은 삶과 전혀 다르다는 한 문장을 덧붙인 것이다. 그러자 59%가 연결된 채 남겠다고 했다. 나가겠다는 41% 가운데 현실을 이유로 든 사람은 3분의 1뿐이었고, 나머지는 지금 삶이 불만이라거나 바깥이 궁금하다고 답했다.
억만장자로 돌아갈 기회를 절반이 마다했다는 것, 익숙한 삶이 바뀐다는 말 한마디에 판단이 뒤집혔다는 것. 데 브리가드의 해석은 현상유지 편향이었다. 사람들은 현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를 잃기 싫어서 머문다. 그렇다면 노직의 기계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같은 이유로 거부하고 있을 수 있다.

편향을 걷어내면
경제학자들은 이 편향을 오래 알고 있었다. 머그잔을 받은 사람은 머그잔을, 초콜릿을 받은 사람은 초콜릿을 쥐고 바꾸지 않는다. 경험 기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노직의 직관은 현실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손실 회피의 메아리다.
하지만 데 브리가드의 연구는 표본이 작고 절차 설명도 짧았다. 와이저스가 이 약점을 보완하며 다시 파고들었다. 노직의 원래 시나리오를 주자 84%가 거부했다. 거부한 사람 셋 중 하나는 기계가 고장 날까 걱정하는 식으로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전제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편향을 최대한 걷어낸 판을 짰다. 내가 아닌 낯선 사람을 위해 고르게 하고, 그 사람은 이미 삶의 절반을 기계 안에서 보냈다고 설정했다. 어느 쪽도 그의 현상유지가 아니게 만든 것이다. 기계를 고른 쪽이 55%로 근소하게 많았다고 보고된다.
이것으로 쾌락주의가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와이저스 자신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 편향을 걷어낸 시나리오는 쾌락주의를 반박하지도 지지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결정타는 사라졌지만 반대편 결정타가 생긴 것도 아니다. 철학자라고 다르지도 않았다. 귀도 뢰어의 조사에서는 현실을 고른 철학자의 46%가 전제를 거부하거나 없는 조건을 덧붙이는 실수를 했다. 일반인의 39%보다 오히려 높았다. 자기는 안 들어가겠다면서 낯선 사람에게는 평생 들어가라고 권하는 엇갈린 응답도 나왔다. 전문가의 직관이라고 해서 편향에서 자유롭다는 방어는 통하지 않았다.

알약이라면 삼키겠는가
프랑크 힌드릭스와 이고르 다우번은 다른 방향으로 흔들었다. 기계 대신 알약을 내밀었다. 먹으면 평생 좋은 경험만 하게 되는 알약이다. 탱크와 전극이 사라지자 받아들이겠다는 응답은 29%에서 53%로 뛰었다. 지금의 나를 전반적으로 더 잘 기능하게 해 주는 알약이라면 열에 아홉 가까이가 먹겠다고 했다고 보고된다.
이 결과는 현상유지 편향과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사람들이 거부한 것은 변화 그 자체라기보다 평소의 삶에서 얼마나 멀리 끌려가느냐였다. 탱크는 멀고, 알약은 가깝다. 게다가 이 알약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지 않고 기분만 끌어올린다. 현실과의 접촉을 덜 건드리는 셈이니, 응답이 늘었다고 곧바로 현실이 덜 중요해졌다고 읽을 수도 없다. 경험 기계의 거부감 가운데 상당 부분은 현실에 대한 사랑도, 지금 자리에 대한 집착도 아닌, 낯설고 침습적인 장치에 대한 거부일 수 있다. 그래도 기계를 내민 판에서 열에 일곱은 여전히 거부했다. 현상유지 편향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되느냐는 물음에 연구들은 한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래도 남는 것
그럼 노직은 틀렸나. 1989년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에서 그가 이 기계를 다시 꺼냈을 때 한 말을 보면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는 이것이 가치에 관한 질문이고, 하나의 물음만 떼어내려고 설계한 사고실험이라고 못박았다. 그리고 들어가겠다고 답하는 독자에게, 혹시 첫 충동은 거부였는데 나중에 이론을 대고 뒤집은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여론조사를 한 것이 아니다. 다수결이 뒤집힌다고 논증이 통째로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는 잠깐 써 보는 것은 괜찮다고도 했다. 뭔가를 배우거나 적당한 양의 즐거움을 얻는 데는 쓸 만하다고. 문제 삼은 것은 남은 평생을 현실과 끊긴 채 보내는 삶이었다.
무너진 쪽은 노직의 직관을 인구 통계처럼 쓰던 관행이다. "사람들은 거부한다, 고로 현실은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추론은 이제 버티기 어렵다. 거부의 상당 부분이 편향과 낯섦과 전제 거부에서 나온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철학자 에덴 린이 정리했듯 경험 기계는 쾌락주의를 결정적으로 쓰러뜨리지는 못하지만, 버릴 이유를 어느 정도는 준다.
그 어느 정도가 무엇인지는 노직이 1989년에 든 다른 예에 남아 있다. 자식이 평생 행복하게 살지만, 그 행복이 전부 속임수에 기대고 있다고 해 보자. 작품을 칭찬하던 비평가는 뒤에서 비웃고, 다정한 배우자는 몰래 바람을 피운다. 이 삶을 보고 "속에서 느끼기엔 행복하니 멋진 인생"이라고 말할 사람은 드물다. 이 판단에는 내가 떠나기 싫은 자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남의 삶이고, 무엇을 잃을지 따질 것도 없다. 경험 기계가 50년 동안 드러낸 것은 어쩌면 우리가 현실을 얼마나 아끼는지보다 지금 있는 자리를 얼마나 떠나기 싫어하는지였다. 하지만 그 소음을 걸러내고 나서도, 속고 있는 누군가를 보며 느끼는 서늘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