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 세계를 움직인 한 알
향신료를 향한 욕망이 지도를 다시 그리고 근대 세계를 열었다
한때 유럽인들은 나무 열매 하나를 얻으려 지구 반대편까지 배를 몰고 가 사람을 죽였다. 후추·정향·육두구는 대항해시대의 진짜 엔진이었고, 제국을 일으키고 한 섬을 지운 힘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왜 그토록 향신료에 미쳐 있었는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다르다.
한때 유럽인들은 나무 열매 하나를 얻으려고 지구 반대편까지 배를 몰고 가 사람을 죽였다.
그 열매는 육두구였다. 16세기까지 세계에서 오직 인도네시아의 반다 제도라는 작은 섬 무리에서만 났고, 유럽에서는 같은 무게의 금에 비길 만큼 값이 나갔다. 후추, 정향, 육두구 — 지금은 부엌 선반에 굴러다니는 이 향신료들이, 근세의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리고 제국을 일으키고 대량학살을 부른 도화선이었다. 왜 인류는 향신료 한 줌에 이토록 미쳐 있었을까.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는 다르다.
부엌의 값을 매기다
향신료가 얼마나 귀했는지는 숫자로 보면 실감이 난다. 15세기 런던에서 숙련 석공의 하루 품삯으로 살 수 있는 후추는 약 이틀 치 임금어치였고, 정향은 나흘 반, 사프란은 무려 스무날 치가 넘었다. 같은 하루 품삯으로 우유 여덟 갤런이나 달걀 쉰한 개를 살 수 있었던 시절이다. 후추는 중세에 지참금이나 집세, 세금을 대신 치르는 화폐로 쓰일 정도였다.
이유는 산지 독점에 있었다. 정향과 육두구는 인도네시아 말루쿠의 몇몇 섬에서만 자랐고, 유럽까지 오는 길에 아랍과 베네치아 상인의 손을 거칠 때마다 값이 몇 배씩 뛰었다. 산지에서 소비지까지 후추 값이 열 배, 스무 배로 부푸는 것은 예사였다. 부엌의 양념 하나가 대륙 사이의 거리와 권력을 그대로 값으로 환산한 셈이다.

향신료가 대양을 열었다
이 욕망이 세계사를 움직였다. 1453년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유럽의 육상 교역로가 막히자, 유럽은 향신료를 직접 구할 바닷길을 찾아 나섰다. 콜럼버스가 1492년 서쪽으로 배를 몬 것도 아시아의 향신료 항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 그는 엉뚱하게 아메리카에 닿았다. 바스쿠 다 가마는 1498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 캘리컷에 도착해, 유럽인 최초로 바닷길로 인도에 이르렀다. 그의 첫 항해는 선원 170명 가운데 55명만 살아 돌아온 참혹한 여정이었지만, 싣고 온 향신료의 값이 원정 비용을 아득히 넘겼다고 전해진다. 대항해시대의 진짜 엔진은 모험심이 아니라 향신료였다.

육두구를 위한 학살
향신료를 향한 욕망은 곧 피를 불렀다. 포르투갈에 이어 등장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1602년 설립된, 조약을 맺고 전쟁을 벌이고 화폐를 찍고 사람을 처형할 권한까지 가진 "국가 속의 국가"였다. 전성기에는 상선 150여 척과 직원 5만 명, 사병 1만 명을 거느렸다.
1621년, VOC 총독 얀 피터르손 쿤은 육두구를 완전히 독점하려고 반다 제도를 정복했다. 원주민 지도자 40여 명을 붙잡아 처형했고, 전쟁과 기아와 노예화 속에 반다의 인구는 약 1만 5천 명에서 천 명 미만으로 줄었다.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사라진 이 사건을 많은 역사가는 제노사이드로 부른다. 향신료의 향기 뒤에는 이런 냄새가 배어 있다.
나무 열매 하나의 독점을 위해, 한 섬의 사람들이 거의 전부 사라졌다.

정향의 섬, 최초의 주식회사
육두구가 반다의 비극이었다면, 정향은 그 북쪽 테르나테와 티도레 섬의 이야기였다. VOC는 정향 값을 떠받치려고 지정된 섬 밖의 정향나무를 모조리 베어 없앴다. 공급을 인위적으로 죄어 값을 유지한 것이다. 나무 한 그루를 베는 것이 곧 시세를 지키는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VOC는 흔히 세계 최초의 진정한 다국적 주식회사로 꼽힌다. 여러 상인이 자본을 모아 위험을 나누고 배당을 받는 오늘날 주식회사의 원형이, 향신료라는 고위험 고수익 사업에서 태어난 것이다. 자본주의의 익숙한 장치들 — 주식, 배당, 증권거래 — 이 실은 이 후추와 육두구의 바다에서 벼려졌다. 1623년 암본 섬의 충돌로 영국 세력이 향신료 제도에서 밀려나면서, 한동안 이 바다의 주인은 네덜란드로 굳어졌다.
맨해튼과 바꾼 섬
향신료의 시대를 상징하는 유명한 거래가 하나 있다. 1667년 브레다 조약에서 네덜란드는 육두구 섬 룬(Run)을 차지하는 대신, 영국에게 맨해튼(당시 뉴암스테르담)을 넘겼다. 당시로선 네덜란드가 이긴 거래로 여겨졌다. 세계 육두구 독점이 북미의 늪지 교역소보다 훨씬 값져 보였으니까.
다만 이 이야기는 흔히 과장된다. 맨해튼과 향신료 섬을 협상 테이블에서 직접 맞바꾼 것은 아니다. 영국은 이미 뉴암스테르담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였고, 조약은 각자 차지한 땅을 그대로 확정한 것에 가깝다. "역사의 아이러니"로 유명해진 것은, 훗날 맨해튼의 값이 상상 못 할 만큼 치솟은 뒤에 돌아본 사후의 시선 덕분이다.
썩은 고기 신화
그런데 유럽인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향신료를 원했을까. 널리 퍼진 답은 "상한 고기의 냄새를 감추려고"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썩어가는 고기를 향신료로 덮어 먹었다는 것이다. 그럴듯하지만, 이건 거짓이다.
논리를 뒤집어 보면 금방 드러난다. 향신료를 살 만큼 부유한 사람은 애초에 상한 고기를 먹을 이유가 없었다. 반대로 상한 고기밖에 못 먹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향신료를 살 수 없었다. 게다가 향신료는 방부 효과가 미미해서, 보존은 소금절임과 훈제와 건조가 담당했다. 당대의 의학이 향신료를 몸의 균형을 잡는 약재로 여겼고, 흑사병이 돌 때는 정향과 육두구를 방역제라 믿어 향낭을 목에 걸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훨씬 단순하다. 그들은 그 맛을 사랑했고, 무엇보다 향신료가 곧 부와 지위의 과시였다. 먼 대양 너머와 연결돼 있다는 증표를, 사람들은 연회의 식탁 위에 올려 자랑했다.
향신료는 이제 아무 데서나 몇 천 원에 살 수 있다. 값이 떨어지자 광기도, 제국도, 학살도 함께 잊혔다. 하지만 다음에 육두구 가루를 커피에 뿌릴 때 잠깐 떠올려 봐도 좋겠다. 이 흔한 갈색 가루 한 꼬집이, 한때 세계를 움직이고 한 섬을 지운 힘이었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