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에 값을 매기다 — 보험의 발명
보험과 도박을 갈라놓은 것은 수학이 아니라 법이었다
보험은 도박의 반대가 아니다. 둘은 우연에 돈을 거는 같은 계약에서 갈라져 나왔고, 18세기 초 런던에서는 남의 배와 남의 목숨에 증권을 끊는 일이 시장의 일부였다. 둘을 잘라낸 것은 확률론이 아니라 피보험이익을 요구한 두 개의 영국 법이었다. 그리고 위험에 값이 붙은 순간,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의 크기가 달라졌다.
배 한 척이 항구를 떠나면, 그 배가 돌아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고대 지중해의 상인들은 그 무지를 없애려 들지 않았다. 대신 값을 매겼다. 보텀리(bottomry)라 불린 해상 대차가 그것이다. 상인은 항해 자금을 빌리되, 배가 가라앉으면 빚이 소멸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 대가로 이자가 비쌌다. 로마법은 이자율에 상한을 두었으면서도 해상 항해에는 그 상한을 풀어주었는데, 근거가 명쾌했다. 값은 위험에 대해 치르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위험은 이미 사고팔리고 있었다. 다만 아무도 그것을 계산할 줄 몰랐을 뿐이다.
내기와 보험은 같은 서류였다
보험을 도박의 반대편에 놓는 습관이 있다. 하나는 위험을 줄이고 하나는 위험을 만든다는 것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구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둘은 문서상 완전히 같은 물건에서 갈라져 나왔다. 불확실한 사건에 돈을 걸고, 그 사건이 일어나면 한쪽이 다른 쪽에 지급하는 계약. 이것이 보험증권의 정의이자 내기의 정의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런던의 보험시장은 이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자기 배가 아닌 남의 배에 보험을 드는 일이 흔했고, 아예 화물이 존재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증권에는 '이익의 유무를 불문하고(interest or no interest)'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손해를 입증할 필요도 없고, 증권 자체가 이익의 증거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도 배가 침몰하기를 기대하며 돈을 걸 수 있었다.
생명보험은 더 노골적이었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생면부지 타인의 목숨에 증권을 끊는 일이 성행했다. 유럽 대부분에서 불법이던 관행이 런던에서는 버젓한 상품이었다. 포위된 도시가 언제 함락될지, 전쟁의 승패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에도 증권이 발행됐다. 역사가 제프리 클라크가 이 시기를 다루며 붙인 책 제목이 그대로 요약이다. 목숨에 걸다.
이 구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손실에서 이익을 얻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손실을 앞당길 이유가 생긴다. 뒷날 의회가 남긴 기록이 이 점을 정확히 짚는다. 이해관계 없는 증권 탓에 수많은 배와 화물이 사기로 침몰하거나 파괴되었고, 전시에는 적에게 넘겨지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도덕적 해이라는 말이 생기기 훨씬 전에 시장은 그것을 실물로 겪고 있었다.
갈라놓은 것은 수학이 아니었다
여기서 흔한 오해가 하나 더 끼어든다. 확률론이 발달하면서 계산 가능한 보험이 계산 불가능한 도박을 밀어냈다는 이야기다. 실제 순서는 그렇지 않았다. 둘을 갈라놓은 것은 정확성이 아니라 입법이었다.

1745년 회기에 영국 의회는 해상보험법을 통과시켰다. 19 Geo. II c. 37. 문헌에 따라 1745년법으로도 1746년법으로도 불리는데, 회기 연도와 시행 연도가 갈리기 때문이다. 이 법은 '이익의 유무를 불문하고' 체결된 해상보험증권을 전부 무효로 만들었다. 배나 화물에 실제 이해관계가 있는 자만 보험을 들 수 있게 한 것이다. 법률 용어로는 이렇게 부른다. 피보험이익, insurable interest.
29년 뒤, 같은 조치가 사람의 목숨에도 내려왔다. 1774년 생명보험법(14 Geo. 3 c. 48)은 피보험자의 생사에 이해관계가 없는 자의 보험계약을 금지했고, 증권에 수익자의 이름을 반드시 적게 했으며, 이해관계의 크기를 넘는 보험금 수령을 막았다. 이 법은 지금도 살아 있고, 사람들이 붙인 통칭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도박법, Gambling Act.
두 법의 전문(前文)을 나란히 놓아 보면 거의 같은 문장이 나온다. 해상보험법은 이렇게 적었다.
선박의 위험을 인수한다는 구실 아래, 해로운 종류의 도박 또는 내기가 행해져 왔다.
생명보험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피보험자에게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생명 또는 사건에 대하여 보험을 체결하는 일이 해로운 종류의 도박을 초래해 왔음이 경험으로 확인된바.
보험이 도박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은 수학자가 아니라 의회였다. 그것도 보험의 상당 부분이 도박이었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피보험이익이라는 요건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칼이었다. 그 칼이 같은 뿌리에서 자란 두 가지 중 한쪽을 잘라냈고, 잘리고 남은 쪽이 오늘 우리가 보험이라 부르는 것이다.
법만 개입한 것도 아니었다. 1720년 남해 거품 사태의 와중에 의회는 거품법(Bubble Act)을 통과시키면서, 그 법으로 왕립거래소보험과 런던보험 두 회사에는 특허장을 내주고 해상보험 주식회사 영업의 독점을 안겨주었다. 1824년까지 이 두 곳 외에는 법인 형태로 해상보험을 인수할 수 없었다. 위험을 파는 일이 아무나 뛰어드는 판에서 허가받은 기관의 업무로 옮겨 가는 과정이었다.
표는 있었지만, 아무도 쓰지 않았다
숫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1662년 런던의 포목상 존 그론트는 역병을 추적하려고 교구가 집계하던 사망표를 뒤졌다. 그리고 태어난 사람 중 몇 명이 각 나이까지 살아남는지를 추린 표를 만들었다. 통계학도 인구학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가 만든 것이 실제 사망 기록에 기반한 최초의 생명표로 꼽힌다. 그는 왕립학회의 창립회원이기도 했다.
1693년에는 에드먼드 핼리가 브레슬라우시의 출생·사망 기록을 분석해 훨씬 정교한 표를 내놓았다. 런던과 달리 인구 이동이 적은 도시라 자료가 깨끗했다. 핼리는 논문 제목에 목적을 아예 못 박았다. 인류 사망률의 정도에 대한 추정, 그리고 생명연금의 가격을 확정하려는 시도. 값을 매기겠다는 선언이 제목에 들어 있었다. 20년 뒤인 1713년에는 야코프 베르누이의 유고가 출간되어, 표본이 커질수록 관측된 빈도가 참된 확률에 수렴한다는 정리가 증명됐다. 베르누이 자신은 이것을 황금 정리라 불렀다. 오늘날의 이름은 대수의 법칙. 우연을 다루는 수학이 마침내 주사위판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재료는 다 나와 있었다. 그런데 시장은 반세기 넘게 그것을 무시했다. 1706년 앤 여왕의 특허로 설립된 어미커블 소사이어티는 세계 최초의 상호 생명보험 조직으로 꼽히지만, 나이와 무관하게 같은 부담금을 걷었다. 열두 살과 쉰다섯 살이 같은 값을 냈다. 게다가 유족이 받는 금액은 고정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해 죽은 회원 수에 따라 공동 기금을 나눠 가졌으니, 이웃이 오래 살아야 내 유족이 손해를 보지 않는 구조였다.
바꾼 사람은 수학자 제임스 도드슨이다. 마흔다섯을 넘겼다는 이유로 어미커블 가입을 거절당한 그는, 나이별 사망률을 반영해 보험료를 매기면 누구든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그 설계 위에 1762년 에퀴터블 생명보험회사가 세워졌다. 마침내 우연에 거는 판돈이 아니라 계산된 값을 파는 회사가 나온 것이다.
다만 에퀴터블이 문을 열었다고 해서 내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이별로 정직하게 값을 매기는 회사와, 남의 죽음에 증권을 끊어 파는 사무실이 같은 도시에서 12년을 더 나란히 영업했다. 후자를 닫은 것은 경쟁도 계산도 아니었다. 1774년의 법이었다.
런던이 불타고 난 자리에서
1666년 런던 대화재는 나흘 만에 도시의 중세 구역 대부분을 태웠다. 집 1만 3천 채, 교구 교회 87곳이 사라지고 10만 명 가까이가 잘 곳을 잃었다. 니컬러스 바번은 그때부터 화재로 소실되는 건물을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1680년 파이어 오피스를 열었다. 세계 최초의 재산보험 회사로 불린다. 남아 있는 1682년 증권 한 장에는 바비컨의 집 한 채가 130파운드로 평가되어 있고, 집주인이 낸 돈은 5파운드 19실링 2펜스다. 불에 타 없어질 수 있는 것에 값이 매겨지고, 그 값을 지키는 데 드는 값이 따로 매겨진 것이다.
값이 붙으면, 손실을 줄이려는 사람이 생긴다
여기서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손실에 값이 붙자, 그 값을 줄이려는 유인이 생긴 것이다. 보험사가 불을 끄면 보험금을 덜 내도 된다. 회사들은 보험에 든 집 벽에 금속 표식을 박았다. 거리에 번지가 붙기 전이었으니 실용적인 표시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 소방대를 꾸렸다. 바번은 템스강 뱃사공들을 고용해 장비와 제복을 쥐여주었다. 다른 회사가 든 집에 불이 났을 때 대신 꺼주고 비용을 정산하는 상호 협정까지 생겼다. 국가가 손을 놓고 있던 2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런던의 소방을 실질적으로 떠맡은 것은 보험회사였다. 값을 매기는 행위가 값을 낮추려는 조직을 낳았다.

대수의 법칙은 당신에게 하는 약속이 아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는 끝내 풀리지 않는 매듭이 하나 남는다.
대수의 법칙은 큰 표본에서만 작동한다. 배 만 척의 침몰률은 놀랄 만큼 안정적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당신의 배는 한 척이고, 그 한 척에게 확률 3퍼센트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라앉거나 가라앉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당신 집이 불에 타는 사건에 확률 따위는 없다. 타면 100퍼센트다. 보험료는 만 척의 평균에서 계산되지만 손실은 언제나 한 척에게 통째로 떨어진다.

보험이 하는 일은 그 격차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격차를 감당할 주체를 개인에서 집단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핼리의 표는 브레슬라우 시민 전체에 관해 참이었을 뿐, 그중 누구 한 사람에 관해서도 참이 아니었다. 통계는 무리에게 말을 걸고, 재난은 언제나 한 사람을 찾아온다. 보험은 그 사이를 잇는 번역기일 뿐, 그 한 사람의 밤을 대신 자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보험의 발명은 불운을 줄인 사건이 아니었다. 불운을 계량 가능한 것으로 바꿔 사고팔 수 있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들이 감당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위험의 크기가 달라졌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항로에 배를 띄우고, 무너질 수도 있는 건물을 올리고, 자기가 살아서 갚지 못할 수도 있는 돈을 빌린다. 값이 매겨진 위험은 더 이상 사람을 멈춰 세우지 않는다.
한 가지만 남는다. 값을 매길 수 있다는 것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우리가 오늘 태연히 서명하는 계약들 중에, 값은 정확히 계산됐지만 정작 누가 그 손실을 통째로 뒤집어쓰는지는 흐려진 것이 몇 개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