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운 —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서로를 심판한다
같은 행동을 했는데 결과가 갈리면, 우리는 책임도 다르게 묻는다
같은 취기로 같은 길을 달린 두 운전자의 형량이 갈린다. 차이를 만든 것은 그 시각 횡단보도에 누가 서 있었느냐뿐이다. 1976년 버나드 윌리엄스와 토머스 네이글은 이 흔한 장면이 도덕의 기본 전제를 무너뜨린다고 보았다. 책임은 정말 의도에 비례하는가.
밤 열한 시, 같은 술집에서 나온 두 사람이 각자의 차에 오른다. 혈중알코올농도는 둘 다 0.12퍼센트. 같은 도로를, 비슷한 속도로, 똑같이 흐릿해진 판단력으로 달린다. 한 사람의 차 앞 횡단보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의 차 앞에는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의 남은 인생이 갈라진다. 앞사람에게 도로교통법 제148조의2는 1년 이상 2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상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예고한다. 뒷사람에게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1은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을 예고한다. 두 사람이 한 행동은 같았다. 달랐던 것은 그 시각 그 횡단보도에 누가 서 있었느냐뿐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는 심판하지 않는다는 약속
우리가 도덕에 대해 품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 하나를 철학자들은 통제 원칙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만 도덕적으로 평가받는다는 원칙이다. 여기에는 곧바로 따라붙는 결론이 하나 있다. 두 사람의 차이가 오로지 그들이 통제할 수 없었던 요소에서 비롯되었다면, 두 사람을 도덕적으로 다르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은 낯설지 않다. 애덤 스미스는 어떤 행위에 정당하게 주어질 수 있는 모든 칭찬과 비난은 궁극적으로 의도와 마음의 성향에 속한다고 썼다. 우리가 아이에게 "그래도 네 잘못은 아니잖아"라고 말할 때, 면접에서 "결과 말고 과정을 보겠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원칙을 쓰고 있다. 그런데 스미스 본인도 알고 있었다. 실제 인간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1976년, 같은 제목의 두 논문
1976년 아리스토텔레스 학회 심포지엄에서 버나드 윌리엄스와 토머스 네이글이 나란히 「도덕적 운(Moral Luck)」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같은 보충권 50호에 115쪽부터 152쪽까지 실렸다. 윌리엄스가 이 표현을 만들었을 때 그는 그것이 형용모순처럼 들리기를 기대했다. 도덕이란 원래 운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어야 하니까.
두 사람이 겨눈 과녁은 달랐다. 윌리엄스의 관심은 정당화와 후회였다. 그는 가족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러 떠나는 화가를 상상한다. 그 결단이 정당했는지는 그가 끝내 훌륭한 화가가 되었는지에 달려 있는데, 그것은 떠나는 순간에는 알 수 없고 본인이 정할 수도 없다. 정당화가 사후에, 그것도 운에 실려 도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윌리엄스에게는 트럭 운전사가 있다. 아무 잘못 없이 아이를 치어 죽인 사람.
우리는 그 운전사를 안쓰러워한다. 그러나 그 감정은 그와 이 사건 사이에 무언가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며, 그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었다"는 말로 지워지지 않는다.
윌리엄스는 이 감정을 행위자 후회라고 불렀다. 방관자의 안타까움과는 종류가 다른, "내가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일인칭의 생각. 훗날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칸트적 의미의 도덕은 확실히 운을 배제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최고의 가치라는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붙들 것은 좁은 의미의 도덕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더 넓은 윤리라는 것이다.
네이글의 칼끝은 다른 곳을 향했다. 그는 도덕 판단이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
진정한 행위 주체성의 영역, 따라서 정당한 도덕 판단의 영역은 이 검토 아래에서 넓이 없는 한 점으로 쪼그라드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를 빼고, 상황을 빼고, 성격을 빼고, 선택 자체까지 빼고 나면 비난하거나 칭찬할 대상이 남지 않는다. 남는 것은 그저 사건의 연쇄뿐이다. 윌리엄스가 도덕의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면, 네이글은 도덕이 제 논리를 끝까지 밀면 자기 발밑을 판다고 말한 셈이다.

네 겹의 운
네이글의 진짜 기여는 운을 네 종류로 갈라놓은 것이다. 순서대로 따라가면 물러설 자리가 없어진다.

결과적 운은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의 운이다. 평소엔 성실하지만 둘 다 브레이크 점검을 미룬 운전자 둘이 있다. 둘 다 브레이크가 나간다. 한 사람의 차 앞에만 아이가 있었다. 부주의의 크기는 같았고, 그 뒤는 아이가 어디 있었느냐의 문제다. 미수와 기수도 같은 구조다.
상황적 운은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의 운이다. 네이글의 사고실험은 1930년대 독일이다. 그곳에 남아 협력자가 된 사람은 비난받는다. 그런데 만약 그가 1929년에 회사 발령으로 아르헨티나에 갔다면, 그는 아마 무난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시험대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고른 것이 아니다.
구성적 운은 내가 어떤 사람이냐의 운이다. 겁이 많은 것, 질투가 심한 것, 쉽게 화가 나는 것. 유전과 양육과 환경이 빚은 기질이고 아무도 자기 기질을 주문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행동만 평가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야"라고 말할 때 심판대에 오르는 것은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사람 자체다. 그 사람을 만든 재료는 아무도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인과적 운은 선행하는 조건들에 의해 내가 결정되는 방식의 운이다. 여기서부터는 사실상 자유의지 논쟁이다. 네이글 자신도 이 항목이 고전적인 결정론 문제와 겹친다고 말한다. 그 논쟁은 별개의 전선이니 이 글은 여기서 멈춘다. 다만 기억해둘 것은, 앞의 세 겹만으로도 통제 원칙은 이미 충분히 곤란해진다는 점이다.
법전은 이미 결과를 처벌하고 있다
법은 이 문제에 대해 오래전에 입장을 정했다. 우리 형법 제25조 제2항은 "미수범의 형은 기수범보다 감경할 수 있다"고 쓴다. 총을 쏜 두 사람 중 하나는 맞혔고 하나는 빗나갔다. 겨눈 마음이 같아도 형은 갈릴 수 있다. 제26조는 스스로 그만둔 사람의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하고, 제27조는 애초에 결과가 불가능했던 경우를 따로 다룬다. 법은 결과를 하나의 독립된 저울추로 올려둔다.

법은 이 낙차를 숨기지도 않는다. 감경할 수 있다는 조문은 감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해서, 판사는 매번 결과의 무게를 얼마로 칠지 직접 정해야 한다. 통제 원칙과 결과주의적 직관 사이의 흥정이 조문 안에 그대로 들어 있는 셈이다.
교통 영역에서는 그 낙차가 더 가파르다. 앞서 본 두 운전자가 그렇다. 같은 취기, 같은 운전, 그러나 한쪽은 벌금형이 가능한 구간에 있고 다른 쪽은 무기징역이 가능한 구간에 있다. 킴벌리 케슬러는 1994년 논문에서 형법이 이렇게 운에 의존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정면으로 물었고, 데이비드 이노크와 안드레이 마모어는 2007년 「도덕적 운에 반대하는 논변」에서 결과에 따른 차등이 도덕적으로는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반대편에는 로버트 하트먼처럼 운이 칭찬과 비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류가 아니라 도덕의 실제 문법이라고 정면으로 옹호하는 쪽이 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운이 아니라 정보일 뿐이라는 반론
가장 강력한 반론은 이렇게 말한다. 결과가 다를 때 우리가 다르게 반응하는 것은 책임이 실제로 달라서가 아니라, 결과가 그 사람의 의도와 부주의의 크기를 알려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의 마음을 직접 볼 수 없으니 결과라는 불완전한 창을 쓴다. 만약 두 사람의 의도와 각오가 완전히 같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우리는 둘을 똑같이 대할 것이다. 이 인식론적 대응은 리처즈, 레셔, 로즈버리, 톰슨 같은 이름들과 함께 제기됐다.
이와는 결이 다른 반론도 있다. 마이클 지머먼은 통제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책임의 범위와 정도를 나눈다. 성공한 살인자는 실패한 살인자보다 더 많은 것에 대해 책임이 있지만, 비난받을 만한 정도는 같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로 떠난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똑같이 했을 것이므로 동등하게 비난받을 만하다. 두 반론은 겨냥점이 다르다. 앞의 것은 우리 반응이 착시라고 말하고, 뒤의 것은 반응은 그대로 두되 책임 개념을 둘로 쪼갠다.
실험 쪽 소식은 더 얄궂다. 마르쿠스 크네어와 에두아르 마셰리가 2019년 학술지 『인지(Cognition)』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운 좋은 행위자와 운 나쁜 행위자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게 하면 대다수가 둘을 똑같이 비난받을 만하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한 사례만 보여주면 결과는 잘못됨, 비난, 허용 가능성, 처벌 네 가지 판단 모두를 움직인다. 특히 처벌 판단이 비난 판단보다 결과에 훨씬 더 민감했다. 우리 안에서 도덕과 형벌은 애초에 다른 저울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결과는 양쪽 모두에게 무기가 된다. 인식론적 대응 쪽은 "나란히 놓고 차분히 보면 사람들도 결국 같게 판단하지 않느냐"고 읽을 것이고, 도덕적 운을 옹호하는 쪽은 "현실의 심판은 언제나 한 사례씩 도착하며 그때 결과는 어김없이 작동한다"고 읽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논쟁 중인 것은 결과가 우리 판단을 움직인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움직임이 바로잡아야 할 오류인지, 아니면 도덕이 원래 그렇게 생겼다는 증거인지다.
그리고 성과 평가 시즌
같은 분기에 같은 전략 문서를 쓴 두 사람을 생각해보자. 리스크 분석의 깊이도, 준비의 성실함도 비슷했다. 한쪽 시장이 열렸고 한쪽 시장은 닫혔다. 연말에 한 사람은 판단력이 좋다는 평을 얻고, 다른 사람은 신중함이 부족했다는 평을 얻는다. 다음 해 두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회의 크기가 달라지고, 그 기회가 다시 다음 결과를 만든다. 운은 한 번 개입하고 끝나지 않는다. 복리로 쌓인다. 우리가 흔히 "실력"이라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지나간 운이 굳어져 이력서에 적힌 형태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오면 선택지는 두 갈래로 보인다. 통제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실제 반응 대부분을 착오라고 선언하든지, 아니면 실제 반응을 인정하고 통제 원칙을 놓든지. 윌리엄스와 네이글이 반세기 전에 열어둔 이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다만 하나는 지금도 해볼 수 있다. 누군가를 평가하기 직전에, 만약 그날 그 횡단보도가 비어 있었다면 나는 이 사람을 어떻게 불렀을까 하고 한 번 물어보는 것. 대답이 달라진다면, 지금 나는 그 사람을 심판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에게 일어난 일을 심판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