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2.2026 / --:-- KST
[취미·군사사]2026-09-0911분 읽기

장군들의 보드게임 — 크릭스슈필에서 국방부까지

크릭스슈필에서 국방부까지

1824년 프로이센의 한 중위가 지형도 위에 나무 블록을 올렸다. 참모총장은 그것을 보고 게임이 아니라 훈련이라고 선언했다. 그 판은 이후 미 해군대학의 게임실과 랜드연구소를 거쳐 오늘의 팬데믹 도상연습까지 이어진다. 전쟁 게임이 전쟁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판 위에서 먼저 굴러본 것이 교리가 되어 현실로 나간 계보의 이야기다.

1824년, 베를린. 프로이센 육군 참모총장 카를 폰 뮈플링 장군은 한 젊은 중위가 탁자 위에 지형도를 펼치고 나무 블록을 늘어놓는 것을 지루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또 장교 클럽의 소일거리겠거니 했을 것이다. 그런데 판이 굴러가는 동안 노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게임이 끝나자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전쟁을 위한 훈련이다. 나는 이것을 전군에 열정적으로 추천하겠다.

아버지의 모래판, 아들의 지도

이야기의 시작은 그보다 13년 앞선다. 1811년, 브레슬라우의 프로이센 전쟁고문관이던 레오폴트 폰 라이스비츠 남작은 체스의 격자와 교대 수순을 버린 물건을 만들었다. 모래로 실제 지형의 축소 모형을 뜨고, 연대 색으로 칠한 블록이 부대의 실제 정면 폭만큼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공간과 시간이 하나의 축척으로 묶인 것이다. 왕자들이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이걸 보여주자고 졸랐고, 남작은 왕에게 바칠 물건을 만드느라 1년을 더 썼다. 모래판은 도자기 타일로 바뀌었고, 부품은 근사한 캐비닛에 담겼다. 1820년 겨울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훗날의 프로이센 왕과 훗날의 러시아 황제가 이 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기도 했다.

문제는 그게 여전히 왕자 교육용이었다는 점이다. 판을 군대의 물건으로 바꾼 사람은 아들 게오르크 폰 라이스비츠 중위였다. 그는 나폴레옹 이후 팽창한 군대에 은행가와 관료의 아들로 편입된 신참 장교였고, 대대로 전쟁을 배운 귀족 동기들만큼 자기가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824년 그가 한 일은 소박하다. 값비싼 입체 지형 탁자를 버리고 값싼 종이 지형도를 썼다. 연대 색을 없애고 한쪽은 빨강, 한쪽은 파랑으로 통일했다. 그 결과 판은 싸지고, 접혀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고, 실재하는 장소 위에서 굴릴 수 있게 됐다. 판정은 심판이 맡았다. 양측은 명령서를 써서 심판에게 넘기고, 심판은 사거리와 지형을 표에서 찾아 손실의 범위를 정한 뒤 주사위로 정확한 수치를 뽑았다. 그리고 각 편에는 그 편이 실제로 알 만한 것만 알려줬다.

dkdk가 큰 지도 한가운데에 높은 칸막이를 세워 양쪽이 서로 다른 절반만 보게 해 놓고, 자기는 칸막이 위로 목을 빼 양쪽을 모두 내려다본다
그림 1각 편에는 그 편이 실제로 알 만한 것만 알려줬다

왕은 훈장과 대위 진급으로 답했다. 뮈플링은 모든 수비대에 크릭스슈필을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정작 라이스비츠 본인은 베를린에서 좌천되었고, 자기가 만든 성가신 게임의 심판으로 불려 다니며 상급자들을 판 위에서 지게 만들었다. 그는 1827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표가 정하는가, 사람이 정하는가

라이스비츠의 판에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균열이 하나 들어 있었다. 결과를 무엇이 정하는가. 표와 주사위인가, 사람인가.

초기 크릭스슈필은 표 쪽이었다. 이른바 엄격형이다. 계산은 정직하지만 느렸고, 장교들은 한 시간짜리 전투를 판정하느라 저녁을 다 쓰는 걸 싫어했다. 1873년부터 1876년 사이, 메켈과 베르디 뒤 베르누아를 비롯한 독일 장교들이 대안을 내놓는다. 규칙 대부분을 전투 경험이 있는 장교의 판단으로 대체하자는 것. 자유형 크릭스슈필이다. 베르디의 계산은 명쾌했다. 크릭스슈필에 정말 필요한 것은 심판과 감춰진 정보, 그 둘뿐이다.

처음에는 잘 굴러갔다. 판정이 빨라지자 판은 더 큰 부대와 더 긴 기간을, 나중에는 전역 전체를 다룰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두 가지가 이 방식을 갉아먹었다. 첫째, 1871년의 참전 세대가 늙고 죽었다. 그들의 판단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둘째는 오늘날 지휘 영향이라 부르는 것이다. 심판보다 계급이 높은 참가자는 심판의 판단보다 자기 판단을 신뢰한다. 표는 별을 단 사람 앞에서도 같은 숫자를 내놓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dkdk가 저울 한쪽에 주사위와 두꺼운 계산표를 올리고 반대쪽에 심판 호루라기 하나를 올려 균형을 재고 있다
그림 2표는 별을 단 사람 앞에서도 같은 숫자를 내놓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 긴장은 해소된 적이 없다. 엄격형은 느리고 무엇을 왜 그렇게 계산했는지가 눈에 보이는 대신 규칙에 없는 일을 다루지 못한다. 자유형은 빠르고 무엇이든 다룰 수 있는 대신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정했는지가 심판의 머릿속에 남는다. 어느 쪽을 고르든 대가가 있고, 이후 200년의 워게임사는 상당 부분 이 저울을 이쪽저쪽으로 옮겨 단 기록이다.

판 위에서 먼저 벌어진 태평양

전쟁 게임이 전쟁을 모방한 오락이라는 통념은, 적어도 몇 대목에서는 순서가 거꾸로다. 미 해군대학은 1887년부터 판을 굴렸다. 두 차례 대전 사이, 뉴포트의 게임실에서는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이 거듭 다시 치러졌다. 대일 전쟁계획인 오렌지 계획은 그 판들과 함께 다듬어졌다. 항모 운용 개념도, 함정 설계 검증도 판을 거쳤다. 경순양함 브루클린급의 설계가 워게임으로 검증된 것이 한 예다. 예산이 거의 없던 해병대는 도상 게임과 실기동 연습을 오가며 상륙작전 교리를 만들어냈는데, 그 결과물이 없었다면 노르망디도 불가능했다는 것이 이 분야 연구자들의 평가다. 현실이 판을 베낀 것이 아니라, 판 위에서 먼저 시험된 것이 교리와 계획이 되어 현실로 나갔다.

dkdk가 판 위의 작은 기물 하나를 집어 판 밖에 내려놓자, 그 기물의 그림자만 실제 크기의 함선으로 길게 늘어난다
그림 3판 위에서 먼저 시험된 것이 교리와 계획이 되어 현실로 나갔다

물론 판이 알려준 것을 군대가 늘 받아 적은 것은 아니다. 해군의 실기동 연습인 함대문제에서 오아후에 대한 기습 항공 공격은 두 번이나 성공으로 판정됐다. 1932년의 함대문제 13호에서는 일요일 아침에 실시되어 완전한 기습을 달성했고, 1938년의 19호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도 1941년 12월 7일 오아후의 방어망이 제대로 작동하기까지는 몇 시간이 걸렸다. 왜 그 판정이 더 큰 반향을 낳지 못했는지는 이 분야 연구자들도 수수께끼로 남겨둔다. 판은 답을 주는 기계가 아니라 질문을 앞당겨 던지는 장치이고, 그 질문을 주워 담는 일은 판 바깥의 몫이다.

니미츠 제독이 훗날 해군대학에서 남긴 말은 자주 인용된다. 일본과의 전쟁은 이 게임실에서 하도 많은 사람이 하도 여러 방식으로 치러본 탓에, 전쟁 중 벌어진 어떤 일도 놀랍지 않았다고. 다만 그는 곧바로 단서를 달았다. 가미카제 전술, 오직 그것만은 예외였다고. 그리고 이 문장은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같은 해병대의 판이 타라와 상륙의 양상은 제대로 맞히지 못했고, 그 어긋난 교훈은 잘못된 교리와 장비 구매로 이어졌다. 판은 정확했던 게 아니라 거의 맞았을 뿐이고, 해병대가 배운 것은 거의 맞는 것을 고치는 편이 맨땅에서 만드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이었다.

황제의 편은 언제나 이긴다

자유형의 취약점은 곧 정치의 문이 됐다. 빌헬름 2세는 자신을 군사적 천재로 여겨 참모여행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몰트케라면 가장 말단 장교에게 먼저 의견을 물었을 자리에서, 황제는 곧바로 완벽한 작전안을 발표했다. 게임이 시작되면 참가자들은 고르게 갈리지 않았다. 모두가 황제 편에 서고 싶어 했다. 황제의 편은 언제나 이겼다.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이 광경을 멈추는 대신, 아예 움직임이 짜여 있고 결과가 미리 정해진 연례 황제기동을 추가했다.

같은 병은 다른 얼굴로 계속 돌아온다. 1933년 히틀러는 전략 수준의 워게임을 중단시켰다. 전략적 결정은 자신이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1938년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가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판 위에 올렸을 때, 게임은 독일의 승리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그 승리가 독일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킨다고 알렸다. 히틀러는 그 결과를 무시했다.

2002년의 밀레니엄 챌린지는 이 문제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2억 5천만 달러, 인원 1만 3,500명, 미 전역 25개 지점. 홍군을 맡았던 퇴역 해병 중장 폴 반 라이퍼는 특정 국면에서 홍군이 부당하게 제약을 받았고 그 탓에 청군의 기술과 개념이 실제 적을 상대할 때보다 잘 작동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언론은 이를 게임이 조작됐다는 이야기로 옮겼다. 주최 측은 통제된 실험 단계에서는 자유로운 플레이가 부적절했다고 답했고, 반 라이퍼는 실험을 워게임이라 부르면 결과가 받을 자격 이상의 신뢰를 얻는다고 반박했다. 이 소동 뒤 미군 내부에서 정리된 위험의 이름이 정치화다. 지휘부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판을 기울이는 것.

dkdk가 판 밑에 굄목을 몰래 끼워 넣자 기물들이 저절로 한쪽으로 주르륵 굴러 모인다
그림 4지휘부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판을 기울이는 것

산타모니카에서 갈라진 두 갈래

전후 미 공군이 작전연구 인력을 붙들어두려고 만든 랜드연구소는 1948년부터 위기 게임을 실험했다. 1954년에는 미소 냉전 경쟁의 컴퓨터 모형을 돌리기 시작했고, 공군대학과 국무부의 요구에 따라 정치·경제 변수를 집어넣었다. 오늘날 정치군사 게임이라 부르는 물건이 그렇게 태어났다. 흥미로운 건 방향이다. 유연성을 얻으려고 랜드는 결국 자유형 크릭스슈필 방식으로 돌아갔다. 산타모니카가 19세기 프로이센의 해법을 다시 발명한 셈이다. 1959년 허버트 골드해머와 한스 슈파이어의 랜드 보고서가 정리한 정치 게임의 효용은, 이 계보 전체의 요약처럼 읽힌다.

정치 게임의 이득은 교육 도구로서의 쓸모, 역사 자체가 내리는 시험에 앞서 전략을 시험해본다는 점, 그리고 추가 연구가 필요한 문제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취미 시장이 갈라져 나온 지점도 여기 근처다. 찰스 로버츠가 지도 기반 보드게임 택틱스를 민간에 팔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다. 정확한 연도는 자료마다 1952년에서 1954년 사이로 갈린다. 1958년 그는 애벌론 힐을 세웠고, 이듬해 라이프지에 실린 랜드연구소 워게임 사진을 보다가 지도 위의 육각 격자를 발견한다. 체스식 사각 격자보다 이동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단순하다는 것을 알아본 순간이었다. 오늘날 수천 종의 취미 워게임을 지배하는 헥스는, 오락이 군대에 준 것이 아니라 연구소의 판에서 거실로 건너온 물건이다.

dkdk가 연구소 문에서 육각형 타일 한 장을 들고 걸어 나와 거실 탁자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그림 5오락이 군대에 준 것이 아니라 연구소의 판에서 거실로 건너온 물건이다

주사위 없는 판, 지금 여기

계보의 끝은 군복 바깥에 있다. 2001년 6월 22일부터 23일까지 존스홉킨스 보건안보센터 등이 공동 주관한 다크 윈터는 미국에 대한 은밀한 천연두 공격을 상정한 도상연습이었고, 이후 여섯 차례의 의회 청문회를 낳았다. 2019년 10월 18일 뉴욕에서 열린 이벤트 201은 세계경제포럼, 게이츠 재단과 함께한 3시간 30분짜리 판이었다. 주최 측 설명은 조심스럽다. 이것은 허구의 시나리오에 기반한 훈련용 도상연습이며, 영향 추정에 쓰인 입력값 역시 허구라고 명시되어 있다. 같은 해 미 보건복지부가 주관한 크림슨 컨테이전은 시나리오상의 사상자 추정과 함께, 연방 기관 사이의 역할 혼선과 방호장비 생산 능력 부족을 기록으로 남겼다. 판이 미래를 맞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판이 먼저 물어본 질문의 목록이 남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판들은 대부분 자유형이다. 주사위도 표도 없고, 진행자와 감춰진 정보만 있다. 반대편에서는 랜드연구소가 여전히 해병대의 차세대 워게임을 위해 계산 엔진을 검토한다. 라이스비츠의 표와 베르디의 재량은 200년째 같은 탁자를 나눠 쓰고 있다.

모의는 늘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미리 겪게 해주고, 우리가 이미 믿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앞의 일은 판이 하고, 뒤의 일은 판을 쥔 사람이 한다. 다음에 어떤 판이 당신 앞에 놓일 때, 물어볼 만한 질문은 하나다. 이 판의 심판은 누구이고, 그는 누구에게 결과를 보고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