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재다 — 미터법과 표준의 탄생
제각각이던 자를 하나로 묶으려던 혁명의 꿈, 그리고 그 안에 봉인된 오차
미터법은 중립적 약속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였다. 25만 개의 단위가 뒤엉킨 혁명 전야에서, 지구 자오선을 재려다 오차를 은폐한 두 천문학자를 지나, 물건에서 상수로 넘어간 2019년 재정의까지 — 세계를 하나의 척도로 묶으려 한 시도의 정치사.
1792년 여름, 두 남자가 파리를 떠나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한 사람은 북쪽 됭케르크로, 다른 한 사람은 남쪽 바르셀로나로. 짐마차에는 번쩍이는 놋쇠 원통과 망원경, 정체 모를 눈금판이 실려 있었다. 혁명의 열기가 프랑스를 집어삼키던 시절, 교회 첨탑에 기어올라 밤새 별을 겨누고 낯선 기계를 조작하는 이방인은 곧 첩자였다. 성난 군중이 그들을 끌어내렸고, 통행증은 번번이 의심받았으며, 한 사람은 감옥 문턱까지 갔다. 그들이 재려던 것은 국경도 요새도 아니었다. 지구 그 자체였다 — 정확히는, 북극에서 적도까지 이어지는 자오선 한 조각. 그 길이의 천만분의 일을 잘라내면, 인류가 처음으로 갖게 될 '자연에서 온 자', 미터가 될 참이었다.
한 나라에 25만 개의 자
혁명 직전 프랑스에는 서로 다른 도량형이 25만 개쯤 쓰였다고 추정된다. 파리의 한 되와 옆 마을의 한 되가 달랐고, 같은 이름의 무게가 도시마다 미묘하게 어긋났다. 옷감을 재는 '오느'는 지방마다, 심지어 천의 종류마다 길이가 제각각이었다. 단위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지역의 관습이었고, 관습을 정하는 것은 그 땅을 다스리는 자였다.
그래서 됫박은 늘 정치였다. 영주는 소작농에게서 곡물을 걷을 때 쓰는 됫박을 슬그머니 키웠고, 상인은 살 때의 저울과 팔 때의 저울을 따로 두었다. 농민은 자기가 낸 것이 정확히 얼마인지 끝내 알 수 없었다. 단위의 혼란은 불편이 아니라 착취의 통로였고, 그 통로를 누가 여닫느냐가 곧 힘의 문제였다.
측정은 결코 중립적 약속이 아니었다. 됫박의 크기를 정하는 자가 세금과 지대의 크기를 정했고, 자의 눈금을 쥔 자가 거래의 조건을 쥐었다.
혁명가들에게 단위 통일은 곁가지 개혁이 아니라 이성으로 세계를 다시 그리는 상징이었다. 왕도 영주도 아닌 자연에 기준을 두겠다는 발상. 지구를 재서 그 몫으로 자를 만들면, 프랑스의 자도 브르타뉴의 자도 언젠가 올 후손의 자도 하나로 묶인다. "모든 시대를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 미터법의 이 표어는 계몽의 자신감이자, 세계를 프랑스의 이성으로 다시 재단하겠다는 야심이기도 했다.

지구에서 잘라낸 자
1790년, 국민의회는 과학 아카데미에 새 도량형을 맡겼다. 처음엔 일정하게 흔들리는 진자의 길이를 기준으로 삼자는 안이 유력했지만, 진자 주기는 위도와 중력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유로 폐기됐다. 아카데미가 택한 것은 더 웅장하고 더 까다로운 길이었다. 미터는 북극에서 적도까지 자오선 4분의 1, 그 길이의 천만분의 일로 정한다. 어느 나라의 소유물도 아닌 지구를, 자의 근거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지구를 실제로 재야 한다는 데 있었다. 아카데미는 됭케르크에서 파리를 지나 바르셀로나에 이르는 자오선 호를 삼각측량으로 재기로 했다. 이 구간은 전체 사분원의 약 10분의 1에 해당했고, 나머지는 지구 타원율로 환산해 채운다는 계획이었다. 북쪽 절반은 장바티스트 들랑브르가, 남쪽 절반은 피에르 메솅이 맡았다.
두 사람은 보르다 반복원이라는 정밀 측각기를 들고, 언덕과 성탑과 대성당 꼭대기를 삼각형으로 잇는 지루한 관측을 시작했다. 같은 각도를 수십 번 겹쳐 재 오차를 깎아내는 이 기계 덕분에 그들은 각을 1초 단위까지 좁힐 수 있었지만, 삼각형 하나를 확정하려면 며칠씩 좋은 날씨와 맑은 시야를 기다려야 했다. 계획은 1년이었지만, 실제로는 7년이 걸렸다. 그사이 왕이 처형됐고, 공포정치가 밀려왔고, 아카데미 자체가 해산됐다. 후원자의 이름이 위험해지고, 측량 허가증이 하루아침에 휴지가 되는 시대에, 신호용으로 첨탑에 내건 흰 천이 왕당파의 깃발로 오해받기도 했다. 두 천문학자는 그렇게 별을 겨누며 프랑스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메솅의 비밀
흔히 미터는 지구 자오선을 정밀하게 측량해 완벽하게 정의됐다고들 말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터의 탄생 한복판에는, 한 사람이 무덤까지 안고 간 오차가 있었다.
남쪽 끝 바르셀로나에서, 메솅은 별의 고도로 위도를 확정하는 결정적 관측을 두 곳에서 했다. 도심의 폰타나 데 오로 여관과 몽주익 요새. 두 지점의 위도 차는 계산으로 예측되는 값과 3.2초쯤 어긋났다. 각도로는 사소해 보여도, 그것을 천만 배로 늘려 지구 전체로 환산하는 순간 오차는 재앙이 된다. 스페인에 발이 묶여 여관방에 갇힌 처지에서 재측정한 값마저 앞의 값과 맞지 않자, 메솅은 어느 쪽도 믿을 수 없게 됐다.
그는 진실을 밝히는 대신 감췄다. 데이터를 다듬어 이미 임시로 채택돼 있던 미터 값에 더 가깝게 맞춘 뒤, 마지못해 넘겼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둘, 메솅과 들랑브르뿐이었다. 메솅은 이 비밀에 십 년을 시달렸고, 오차를 스스로 바로잡겠다며 다시 스페인으로 측량을 나섰다가 1804년 황열병으로 죽었다. 역사학자 켄 앨더가 『측정의 역사』에서 되살려낸 것이 바로 이 은폐의 전말이다. 앨더의 표현대로, 미터법의 공개된 승리 뒤에는 비밀스러운 오차가 있었고, 그 오차는 이후의 모든 미터 정의에 대물림됐다.
더 얄궂은 것은, 그 오차가 반드시 메솅의 손이 서툴러서 생긴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현대 분석에 따르면 지금의 미터는 애초 의도한 값보다 약 0.2밀리미터 짧다. 원인의 대부분은 관측 실수가 아니라, 지구를 매끈한 타원체로 가정한 전제 자체에 있었다. 실제 지구는 중력이 고르지 않게 굽은 울퉁불퉁한 덩어리였다.
자연에서 자를 얻겠다는 꿈의 역설은 여기에 있었다. 자연은 매끈한 기준이 아니었다. 지구는 완벽한 타원체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감자였고, 그 몸에서 깔끔한 눈금을 잘라낼 방법은 없었다.

자연에서 금속으로
그래서 벌어진 일은 상징적이다. 지구에서 자를 캐내겠다며 7년을 헤맨 끝에, 프랑스가 손에 쥔 것은 결국 금속 막대 하나였다. 1799년, 측량 결과를 근거로 백금으로 만든 '아카이브 미터'와 '아카이브 킬로그램'이 제작돼 국립문서보관소에 봉인됐다. 이 순간 정의의 무게중심이 조용히 옮겨갔다. 미터는 더 이상 '지구 자오선의 천만분의 일'이 아니라, '여기 이 막대의 길이'가 된 것이다. 자연에서 출발한 정의가, 인공물로 후퇴했다.
이 후퇴는 실용적으로는 오히려 이득이었다. 아무도 자를 확인하려고 다시 북극까지 재러 갈 수는 없으니, 만질 수 있는 원기(原器) 하나가 세계의 기준이 되는 편이 훨씬 편했다. 1875년, 열일곱 나라가 미터협약에 서명하며 파리 근교 세브르에 국제도량형국을 세웠다. 표준은 이제 한 나라의 재산이 아니라 국제 조약의 대상이 되었다.
1889년 제1차 국제도량형총회는 백금 90퍼센트에 이리듐 10퍼센트를 섞어 만든 국제미터원기와 국제킬로그램원기를 공인했다. 지름과 높이가 약 39밀리미터인 이 작은 금속 실린더가, 이후 130년 동안 지구상 모든 질량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인류가 무게를 재는 궁극의 근거가, 세브르의 금고에 잠긴 물건 하나에 매달려 있었다.

미국이 놓친 미터
표준이 곧 힘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거부한 나라의 역사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의 초대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은 십진 도량형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프랑스는 그의 요청에 화답해 1794년, 식물학자 조제프 동베를 새 표준과 함께 대서양 너머로 보냈다. 동베의 짐에는 1미터짜리 막대와 '그라브'라 불린 구리 킬로그램 원기가 실려 있었다.
배는 폭풍에 항로를 잃고 영국 사략선에 나포됐다. 동베는 카리브해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몸값이 오기 전에 병들어 죽었고, 표준들은 제퍼슨에게 끝내 닿지 못했다. 이 극적인 일화는 종종 "해적 때문에 미국이 미터법을 놓쳤다"는 이야기로 회자되지만, 진실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미국의 미온적 태도는 더 뿌리 깊었고, 결국 미국도 영국도 자기들의 야드와 파운드를 놓지 않았다.
여기서 표준의 정치가 드러난다. 미터법 세계와 야드·파운드 세계로 갈라진 지도는 단순한 관습의 차이가 아니라, 누구의 척도로 세계를 잴 것인가를 둘러싼 세력권의 선이었다. 표준을 쥔 쪽이 무역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를 함께 쥔다. 두 세기가 지나 화성 탐사선이 단위 혼용으로 추락하는 사고에 이르기까지, 그 분열의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물건에서 상수로
세브르 금고의 킬로그램 원기에는 처음부터 은밀한 결함이 있었다. 물건은 변한다. 100여 년에 걸쳐 원기는 복제본들과 비교했을 때 수십 마이크로그램만큼 어긋났다. 무엇이 무거워지고 무엇이 가벼워졌는지조차 확언할 수 없었다. 온 세계가 그 하나에 맞춰 무게를 재는데, 정작 그 하나가 변한다면 킬로그램의 정의 자체가 흔들린다. 자연에서 도망쳐 물건에 기댄 대가였다.
해법은 다시 자연으로, 그러나 이번엔 지구가 아니라 물리 상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에 기준을 두려면, 아무리 정밀해도 결국 닳고 변하는 물건을 버리고 우주 어디서나 똑같은 상수 위에 정의를 세워야 했다. 2018년 11월 16일 베르사유에 모인 국제도량형총회는 국제단위계를 근본부터 다시 짜기로 의결했고, 2019년 5월 20일 세계 측정의 날, 킬로그램은 플랑크 상수로 재정의됐다. 플랑크 상수의 값을 6.62607015×10⁻³⁴ 줄·초로 못 박고, 그로부터 질량을 거꾸로 끌어내는 방식이다. 이를 실제로 구현하는 저울이 전자기력으로 무게를 견주는 키블 저울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국제단위계의 일곱 기본단위는 모두 물건이 아니라 자연의 상수 위에 서게 됐고, 130년을 군림하던 세브르의 킬로그램 원기는 박물관의 유물로 물러났다.
돌이켜보면 하나의 원이 닫힌 셈이다. 혁명가들은 왕도 물건도 아닌 자연에서 자를 얻으려 했지만, 지구는 매끈한 자가 되어주지 못했고 그들은 220년간 금속 막대에 매여 있었다. 마침내 정의가 자연으로 돌아갔을 때, 그것을 내어준 것은 지구의 곡률이 아니라 물리학의 가장 깊은 상수였다. 이제 자는 파리의 금고가 아니라 우주 어디에서든 같은 값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중립적인' 상수조차, 누가 정의하고 누가 검증하며 누가 그 정밀한 저울을 소유하는가를 묻는 순간 다시 힘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성탑에 기어올라 별을 겨누던 두 천문학자가 끝내 재려 했던 것은, 어쩌면 지구가 아니라 바로 그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세계를 하나의 척도로 묶는 일은, 언제나 그 척도를 누가 쥐느냐는 물음과 함께 왔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