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 — 음식을 시간에서 꺼내다
음식을 시간에서 꺼내다
니콜라 아페르는 1810년에 밀봉과 가열로 음식이 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립했지만, 왜 그런지는 끝내 설명하지 못했다. 부패의 범인이 공기가 아니라 미생물이라는 답은 반세기 뒤 파스퇴르에게서 왔고, 가장 위험한 균의 이름은 그보다 더 늦게 붙었다. 유리병에서 깡통으로, 군함의 보급 목록에서 북극의 유해까지 — 설명 없이 먼저 작동한 기술이 안전해지기까지 치른 대가의 기록.
1810년, 파리 남쪽 마시의 한 작업장에서 니콜라 아페르는 유리병에 음식을 채우고 코르크로 막은 뒤 병째 끓는 물에 담갔다. 몇 달이 지나 병을 열어도 안에 든 것은 여전히 먹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절차를 십수 년에 걸쳐 다듬었고, 무엇을 어떤 순서로 얼마나 오래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끝내 몰랐다.
우리는 보통 순서를 반대로 상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음식을 상하게 한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냈고, 그 앎에서 죽이는 방법이 나왔다고. 통조림의 역사는 이 순서를 통째로 뒤집는다. 밀봉하고 가열해 시간을 멈추는 기술은, 그것을 설명해 줄 미생물학이 도착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함대를 먹이고 극지를 건너고 있었다.
상금이 아니라 매입이었다
아페르는 제과사이자 요리사였다. 그는 1804년 마시에 세계 최초의 식품 병조림 공장을 차렸고, 1806년에는 프랑스 해군이 그의 병조림을 항해에 실어 시험했다. 널리 퍼진 이야기는 이렇다. 1795년 프랑스 정부가 군용 식량 보존법을 공모하며 12,000프랑의 현상금을 걸었고, 십수 년의 시행착오 끝에 아페르가 그것을 탔다는 것. 그런데 1차 자료가 보여주는 그림은 조금 다르다. 아페르가 1810년에 낸 책의 서두에는 내무장관 몽탈리베 백작의 편지가 실려 있다. 장관은 12,000프랑을 주겠다며 조건을 하나 붙였다. 공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출판하고, 그 책 200부를 기술심의국에 납본하라는 것.

이것이 12,000프랑의 지급에 대해 내가 당신에게 부과하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1795년의 공개 경연이었는지, 1810년에 이루어진 일회성 보상 지급이었는지는 자료마다 갈린다. 확실한 것은 1810년이라는 해, 12,000프랑이라는 액수, 그리고 국가가 돈을 주고 산 것이 설명이 아니라 재현 가능한 절차였다는 사실이다. 심의국에는 당대 최고의 화학자 게이뤼삭이 앉아 있었다. 위원회가 서명해 준 내용은 아페르의 이론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들 앞에서 한 실험이 책에 적힌 그대로였다는 것이었다.
공기를 쫓아낸다는 착각
아페르에게도 설명은 있었다. 틀렸을 뿐이다. 그는 밀봉된 통 안의 포도주가 오래 견디는 것을 보고 부패의 범인을 공기로 지목했다. 그가 정리한 원칙은 두 줄이다. 외부 공기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할 것, 그리고 중탕으로 열을 가할 것. 앞의 것은 절반만 맞았고, 뒤의 것은 이유가 통째로 비어 있었다. 열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그는 "불에는 분해로 향하는 자연적 경향을 여러 해 동안 지연시키는 고유한 성질이 있다"고 썼다. 성질이 있다는 말은 설명이 아니다.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이것이 무능의 증거는 아니다. 그는 재료마다 다른 가열 시간을 실험으로 알아냈고, 병 크기와 밀봉 방식의 차이가 결과를 바꾼다는 것도 알았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그는 공정 변수를 통제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변수들이 왜 중요한지 물으면 답이 없었다.
당시 화학의 어휘에는 그 자리를 채울 단어가 없었다. 산소는 모든 변질의 유력한 용의자였고, 미생물이라는 개념은 논쟁의 변두리에 있었다. 아페르는 자기 시대가 가진 가장 그럴듯한 틀 안에서 자기 성공을 이해했고, 그 틀 안에서 그의 설명은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설명이 틀렸다는 사실은 그의 병조림이 상하는 것을 막아 주는 능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기술은 자기가 왜 작동하는지 몰라도 작동한다.

유리는 깨지고, 깡통은 안 열린다
유리병은 무겁고 잘 깨졌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는 특히. 아페르의 책이 나온 바로 그해 영국에서 피터 듀랜드가 주석을 입힌 철제 용기에 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특허를 받았고, 몇 해 뒤 브라이언 돈킨과 존 홀이 런던 버몬지에 공장을 세워 실제로 깡통을 찍어 내기 시작했다. 재료가 바뀌자 성격이 바뀌었다. 깨지지 않고 쌓아 올릴 수 있는 용기는 곧 배와 마차에 실을 수 있는 용기였다. 원리는 아페르의 것 그대로였다. 넣고, 막고, 끓인다. 바뀐 것은 그릇의 재질뿐인데 그 하나가 사거리를 바꿨다.
문제는 여는 쪽이었다. 초기 깡통은 두꺼운 연철에 주석을 입힌 물건이라 내용물보다 용기가 더 무거운 경우도 있었다. 뚜껑에는 정과 망치로 가장자리를 따라 돌려 가며 깨라는 취지의 안내가 붙었다. 군인들은 총검으로 찔러 열었고, 안 되면 돌로 내리쳤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의 깡통따개, 그러니까 지렛대와 날로 뚜껑만 도려내는 도구는 미국의 에즈라 워너가 1858년에 특허를 받았고, 회전하는 칼날을 쓴 윌리엄 라이먼의 설계는 1870년에 나온다. 밀봉 기술과 개봉 기술 사이에 반세기 가까운 시차가 있었던 셈이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에 대한 설명은 싱겁다. 초기 고객이 군인과 선원이었고, 그들에게는 이미 총검과 도끼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용 도구를 만들 이유는 깡통이 부엌으로 들어온 다음에야 생겼다. 시간을 멈추는 방법이 먼저 발명되고, 멈춘 시간을 다시 여는 방법은 한참 뒤에야 도착했다.

보급선이 산업을 키웠다
이 기술을 키운 것은 가정의 식탁이 아니라 보급선이었다. 초기 통조림은 비쌌고, 비싼 값을 지불할 이유가 있는 고객은 군대와 해군, 그리고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나는 탐험대였다. 1820년대부터 영국 극지 원정대의 짐칸에는 깡통이 실렸고, 식민지 주둔군의 배급 목록에도 올랐다. 신선한 식재료를 구할 수 없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는 일이 갑자기 계산 가능해졌다. 보급이란 결국 산술이다. 몇 인분을 며칠치, 몇 상자로. 깡통은 음식을 셀 수 있는 단위로 만들었고, 셀 수 있는 것은 곧 계약할 수 있고 입찰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납품과 검수라는 관료제가 이 산업의 진짜 성장 엔진이었다.

대가도 함께 실렸다. 1845년 출항한 존 프랭클린의 북극 원정대는 전원이 사라졌고, 1980년대에 오언 비티 연구팀이 발굴한 유해에서 높은 납 농도가 나오자 조잡하게 흘러내린 깡통 납땜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널리 알려진 이 가설은 그러나 확정된 결론이 아니다. 뼈 미세구조를 정밀 촬영한 2018년 연구는 납이 생애 전반에 고르게 분포해 있고 그 수준이 같은 시대 영국 해군 병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하면서, 납이 원정대의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결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영양 결핍을 더 무겁게 보는 견해도 나왔다. 한편 2003년에는 범인이 통조림인 것은 맞되 납이 아니라 보툴리누스 중독이었다는 가설도 제기됐다. 남은 것은 답이 아니라 논쟁이다. 1850년대 초에는 영국 해군이 납품받은 보존육 깡통이 부패한 채 대량 폐기되는 일도 있었다. 산업은 팽창하는데 품질을 판정할 원리가 없었다. 검수관이 할 수 있는 일은 뚜껑을 따서 냄새를 맡는 것뿐이었다. 20세기 초까지도 영국에서는 통조림 육류의 안전성을 두고 조사위원회가 꾸려지고 보고서가 나왔다. 무엇을 검사해야 하는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 채로.
이유는 반세기 뒤에 도착했다
설명이 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루이 파스퇴르는 1861년 부티르산 발효를 연구하다 산소 없이 살아가는 미생물의 존재를 확인했고, 1863년에는 호기성과 혐기성을 구분했다. 부패는 공기가 일으키는 화학 반응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들이 하는 일이었다. 비슷한 무렵 그는 목이 구부러진 플라스크로 자연발생설을 반박한다. 끓인 국물은 공기가 드나들어도 멀쩡했고, 목을 꺾어 먼지가 들어오게 하자 비로소 흐려졌다. 아페르가 차단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은 공기 자체가 아니라 공기에 실려 오는 것들이었다. 절반은 맞았던 원칙에 마침내 이유가 붙은 것이다. 아페르가 병을 끓이기 시작하고 반세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열이 무엇을 죽이는지 알기 전에,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오십 년째 죽이고 있었다.

가장 위험한 손님의 정체는 더 늦게 밝혀졌다. 19세기 초 독일 남부에서는 보존 소시지를 먹고 마비되어 죽는 사고가 반복됐고, 의사 유스티누스 케르너가 이를 체계적으로 기록해 '소시지 독'이라 불렀다. 프랑스에서 사람의 보툴리누스 중독이 처음 보고된 것은 1875년이다. 원인균을 분리해 이름을 붙인 사람은 19세기 말 벨기에의 에밀 반 에르멩엠으로, 그가 명명한 '바실루스 보툴리누스'는 오늘날 클로스트리디움 보툴리눔으로 불린다. 라틴어 보툴루스, 곧 소시지에서 온 이름이다. 밀봉된 무산소 공간은 이 균에게 최적의 서식지다. 통조림은 부패를 막는 그릇인 동시에, 특정한 생물에게는 초대장이었다.
100도로는 모자랐다
그래서 아페르의 방법에는 그가 알 수 없었던 구멍이 있었다. 끓는 물의 100도는 대부분의 미생물을 처리하지만 보툴리눔의 아포는 살아남는다. 아포를 확실히 죽이려면 압력을 걸어 121도까지 올려야 한다. 1960년대 이후 저산성 통조림에 요구되는 최소 살균 강도는 이 온도 기준으로 3분에 해당하는 값으로 정해졌다. 업계에서 이 기준을 부르는 이름이 '보툴리눔 쿡'이다. 온도와 시간이라는 두 숫자에, 100년 넘게 이름조차 없던 위험이 마침내 계량 단위로 박힌 것이다. 산도가 pH 4.6 이하로 낮은 식품이라면 그 온도가 필요 없다. 균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저산성 통조림을 만드는 업체는 시설을 등록하고 가열 공정을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규제 문서 한 장이 아페르가 비워 둔 자리를 채우고 있는 셈이다.
정리하면 순서는 이렇다. 절차가 먼저 있었고, 산업이 그 위에 세워졌고, 배가 떠났고, 사람이 죽었고, 그다음에 이유가 왔고, 이유를 알고 나서야 온도와 시간이 숫자로 못 박혔다. 설명은 기술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이미 굴러가던 기술을 안전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매일 쓰면서도 왜 되는지는 대충 넘기고 있는 것들 가운데, 아직 설명이 도착하지 않은 자리는 어디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