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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2026-08-2610분 읽기

성씨는 대개 국가가 붙였다

가문의 자랑이기 이전에 행정의 도구였던 이름의 역사

1808년 나폴레옹은 제국 안의 유대인에게 석 달 안에 성을 만들어 신고하라고 명령했다. 어기면 추방이었다. 세금을 걷고 사람을 징집하려면 국가는 먼저 사람을 고정된 이름으로 붙들어야 했고, 그래서 성씨는 대개 위에서 아래로 강제됐다.

1808년 7월 20일 바욘에서 나폴레옹이 서명한 칙령은 제국 안의 유대인에게 석 달을 주었다 — 그 안에 성(姓)을 정해 관청에 신고할 것, 구약성경에서 따온 이름과 도시 이름은 쓰지 말 것, 기한을 넘기면 제국 밖으로 추방할 것.

칙령 제3조는 짧고 분명했다. 구약의 이름과 도시의 이름은 명시적으로 금지된다. 제7조는 더 분명했다. 기한 안에 절차를 밟지 않은 자는 제국의 영토에서 추방된다. 이름을 바꾸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없던 이름을 만들어 내서 등록하라는 명령이었다.

우리는 성씨를 아주 오래된 것으로 여긴다. 족보의 첫 장, 가문의 내력, 조상에게 받아 자손에게 넘기는 것. 흔히 그렇게 여기지만, 유럽 인구의 상당 부분에게 성이란 겨우 200년 남짓 된 물건이고, 그것을 처음 지어 준 사람은 조상이 아니라 창구에 앉은 관청 서기였다.

관청 창구에서 빈 이름표에 성씨 도장을 찍으며 모래시계를 감시하는 장면
그림 1많은 성씨가 오래된 유산이 아니라 기한과 추방을 건 등록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관청 서기가 지어 준 이름들

동유럽 유대인을 다루는 이보(YIVO) 백과사전은 이 사정을 건조하게 요약한다. 몇몇 예외를 빼면 가족명은 19세기 전후의 짧은 기간에 발명되었으며, 그 채택은 국가 당국에 의해 강제되었다는 것이다. 1787년 이전까지 동유럽에서 유대인이 세습 성을 규칙적으로 쓰던 공동체는 프라하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지역에서 사람들은 히브리어 문서에서 '누구의 아들 누구'로 불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첫 법은 1787년 합스부르크 황제 요제프 2세가 내렸다. 제국의 모든 유대인은 세습 성을 가져야 했고, 대부분이 살던 갈리치아에 집중적으로 적용됐다. 고를 수는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관리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고르지 않으면 관리가 대신 지었다. 그래서 한 집안의 이름이 그날 담당 서기의 기분에 달렸다. 정직하다(Ehrlich), 다정하다(Freundlich), 덕이 있다(Tugendhaft) 같은 이름이 나왔고, 금과 은, 꽃과 별과 산을 조합한 로젠베르크와 골트슈타인이 무더기로 찍혀 나왔다. 반대편에는 종기(Geschwür), 오줌(Harn), 아무도아님(Niemand), 원숭이얼굴(Affengesicht) 같은 이름도 남았다. 조롱까지 포함해서, 이름은 위에서 내려왔다.

같은 일이 대륙 곳곳에서 되풀이됐다. 프로이센이 병합한 폴란드 지역은 1797년,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 거주지대는 1804년, 오스트리아의 추가 병합지는 1805년, 나폴레옹의 제국은 1808년, 러시아 치하의 회의국 폴란드는 1821년. 30여 년 사이에 한 대륙의 이름 체계가 법으로 다시 짜였다.

국가가 사람을 읽는 법

왜 하필 이름이었을까. 정치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서 근대 국가가 사회를 다루는 방식을 '가독성(legibility)'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국가는 눈앞의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다룰 수 없다. 세금을 매기려면 땅을 측량해 지적도로 만들어야 하고, 목재를 관리하려면 숲을 수종별 나무 그루 수로 환원해야 한다. 스콧이 보기에 사람에게 고정된 세습 성을 붙이는 일도 정확히 같은 계열의 작업이었다. 징세 대장, 징집 명부, 토지 등기, 재판 기록을 서로 맞춰 보려면 한 사람이 해마다 같은 이름으로 같은 칸에 있어야 한다.

마을 안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장간 옆 큰 요한, 절름발이 요한, 방앗간집 요한이면 아무도 헷갈리지 않는다. 이름은 관계 속에서만 작동하면 됐고, 그 관계는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문제는 마을 밖에서 들어오는 손, 곧 세리와 징병관이었다.

성씨는 가문이 아래에서 쌓아 올린 것이기 이전에, 국가가 위에서 내려 그은 좌표였다. 사람을 세금과 병역에 붙들어 매려면, 먼저 그 사람이 해마다 같은 이름으로 같은 자리에 있어야 했다.

뒤엉킨 별칭 실타래를 큰 장부의 같은 칸에 꿰어 고정하는 장면
그림 2고정 성씨의 목적이 징세·징집·등기 기록을 맞추는 데 있었음을 드러낸다.

허락에서 의무로 — 메이지 일본

일본은 이 과정을 교과서처럼 압축해 보여 준다. 에도 시대에 성은 무사와 일부 특권층의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1870년 9월, 평민도 성을 써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런데 잘 퍼지지 않았다. 그래서 1875년 2월 13일, 태정관 포고 제22호로 못을 박는다. 포고문 자체가 그 사정을 그대로 적어 놓았다. 메이지 3년 9월에 평민의 성 사용을 허락했으나 이제부터는 반드시 성을 쓰라, 그리고 조상 이래 성이 분명치 않은 자는 새로 성을 만들라.

허락에서 의무로 넘어가는 데 4년 반이 걸렸다. 그 사이인 1873년에 징병령이 시행됐다. 두 법의 순서를 두고 인과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국민개병을 선언한 나라가 곧바로 전 국민의 이름을 고정한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사람을 부르려면 먼저 이름표를 붙여야 했다.

같은 논리가 20세기에도 반복됐다. 오스만 제국에는 애초에 성 제도가 없었고, 그 자리를 물려받은 터키 공화국이 1934년 6월 21일 성씨법(제2525호)을 통과시켜 전 국민에게 고정 세습 성을 의무화했다. 이 법은 군 계급이나 관직, 부족과 외국 민족을 가리키는 이름을 금지했다. 행정의 도구인 동시에 소수민족의 이름을 지우는 도구이기도 했던 셈이다.

느슨한 ‘허락’ 표찰을 거대한 나사로 조여 ‘의무’ 금속판으로 굳히는 장면
그림 31870년의 허락이 1875년 의무로 바뀌며 전국민 동원과 맞물렸음을 보여준다.

조선의 성, 아래로 퍼지고 위에서 굳다

한국은 성씨의 역사가 유난히 길어 보이는 나라다. 실제로 신라 진흥왕 때 김씨 성이 쓰였고, 940년 3월 고려 태조 왕건은 전국 군현의 이름을 고치면서 지역 호족들에게 토성을 나눠 정했다. 여기서도 성을 정해 준 주체는 국가였다.

다만 그 성이 모두의 것은 아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조선 전기까지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인구의 대략 절반을 차지했고, 성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많았다. 조선 후기에 신분제가 흔들리고 족보와 호적을 통한 신분 상승이 이어지면서 성은 아래로 번져 갔다. 다만 이 확산의 구체적 경로와 규모는 호적 기재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걸려 있어, 어디까지가 실제 신분 이동이고 어디까지가 문서상의 변화인지는 아직 갈린다. 확실한 것은 제도의 매듭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과 계급이 타파되며 성의 대중화가 촉진됐고, 1909년 3월 법률 제8호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비로소 누구나 성과 본을 갖도록 법제화됐다. 그 민적법의 목적은 백과사전의 표현대로 인민의 가족 신분 관계를 법률상 명확히 하는 동시에 전국의 호구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은 흔히 일본식 이름으로 갈아 끼운 일로 뭉뚱그려지지만, 법적으로는 성격이 다른 두 가지가 한 묶음이었다. 1939년 11월 10일 조선민사령 개정(제령 제19호)에 따라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여섯 달 동안 호주는 일본식 씨(氏)를 정해 신고해야 했다. 신고하면 설정창씨, 신고하지 않으면 호주의 기존 성이 그대로 씨가 되는 법정창씨였다. 신고를 하든 안 하든 모든 조선인에게 씨가 생겼다는 뜻이다. 반면 개명, 곧 이름 자체를 바꾸는 일은 의무가 아니었고 기한도 없었으며 대신 허가와 수수료가 필요했다. 숫자가 그 차이를 보여 준다. 시행 초기 몇 달 동안 씨를 신고한 가구는 한 자릿수에 머물렀으나, 총독부가 관청과 학교와 직장을 동원해 압박하자 최종 신고율은 80퍼센트 안팎까지 올라갔다. 자료마다 마감 시점과 수치가 조금씩 엇갈리지만 이 급등의 폭만큼은 일치한다. 반면 조선에 살던 조선인 가운데 이름까지 바꾼 비율은 10퍼센트에 미치지 못했다. 강제의 무게가 성씨 쪽에 실려 있었다는 뜻이다.

성이 없어도 되는 나라

아이슬란드는 이 흐름에서 비켜서 있다. 1996년 인명법 제45호 제8조는 이렇게 정한다. 모든 사람은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라 자신을 일컬어야 하며, 가문명(ættarnafn)을 가질 권리가 있는 사람만 예외로 한다. 요운의 아들은 요운손, 요운의 딸은 요운스도티르가 된다. 아버지가 에이나르손이어도 아들은 에이나르손이 아니다. 성이 대를 잇지 않으니 한 가족 안에서도 마지막 이름이 저마다 다르다.

같은 법 제8조에는 한 문장이 더 붙어 있다. 이 나라에서 새로운 가문명을 취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미 가진 사람과 그 후손만 이어 쓸 수 있으니, 가문명은 늘어나지 않고 서서히 줄어드는 유산이다. 대신 이름 자체는 인명위원회의 심사를 받는다. 아이슬란드어 격변화에 맞아떨어져야 하고, 아이슬란드 문자로 적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이름을 지닐 사람에게 괴로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을 강제하지 않는 대신 이름을 심사하는 나라. 국가가 사람을 읽어야 한다는 요구는 사라지지 않고 다른 창구로 옮겨 갔을 뿐이다.

이름 뒤에 붙은 열세 자리

한국의 마지막 장은 성씨가 아니라 숫자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사건이 벌어졌고, 정부는 전 국민에게 단일한 신분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해 주민등록법이 개정돼 연말까지 1,500만여 명에게 고유 번호가 붙었다. 첫 번호를 받은 사람은 박정희와 육영수였고, 뒷자리는 각각 100001과 200001이었다. 당시엔 열두 자리였고 지금의 열세 자리가 된 것은 1975년이다. 국가기록원의 설명은 담담하다. 주민의 동태를 파악하고 불온분자를 색출하기 위해서였다고.

이름은 여전히 김이고 이박이지만, 실무에서 사람을 특정하는 것은 이제 성이 아니라 번호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확인된 성씨는 5,582개, 그중 한자가 없는 성씨가 4,075개였다. 그러나 상위 10개 본관이 인구의 35.7퍼센트를 차지한다. 성씨는 사람을 구별하는 기능을 사실상 잃었다. 그 자리를 열세 자리 숫자가, 그리고 인도의 아드하르 같은 생체정보 기반 디지털 신분증이 넘겨받았다.

빨랫줄을 당겨 성씨 표찰·열세 자리 번호표·지문 카드를 차례로 관청 창구에 지나게 하는 장면
그림 4사람을 고정하는 좌표만 바뀌었을 뿐 목적은 이어졌음을 남긴다.

1808년의 서기는 펜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고, 1968년의 공무원은 번호를 찍어 주었으며, 오늘의 시스템은 지문과 홍채와 얼굴을 읽는다. 방식은 계속 바뀌었지만 목적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고정된 좌표로 붙들어 두는 것.

성씨가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은 어디서 온 걸까. 그리고 지금 우리 손안에서 매일 갱신되는 그 숫자와 생체정보는, 200년쯤 뒤의 누군가에게 어떤 유산으로 읽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