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 선을 긋는다는 것
제도판 위에서 결정된 선들과, 아직 끝나지 않은 청구서
국경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그어진 것이다. 토르데시야스의 자오선부터 5주 만에 인도를 가른 래드클리프 라인까지, 대부분의 직선 국경은 그 땅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협상 테이블에서 정해졌다. 그 임의성의 대가는 지금도 치러지고 있다.
1947년 8월 17일, 인도와 파키스탄 사람들은 라디오를 듣고서야 자기 집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알았다. 독립 선포가 이틀 지난 뒤였다. 선을 그은 사람은 그때 이미 그 땅에 없었다. 시릴 래드클리프는 독립일인 8월 15일에 비행기를 탔고, 자기가 만든 지도가 공개되는 것을 보지 않았다. 그가 인도 땅을 처음 밟은 건 그해 7월 8일이다. 인도에 와본 적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5주. 그 5주에 걸린 것은 17만 5천 제곱마일의 땅과 8,800만 명의 인생이었다.
원래는 선이 아니라 지대였다
근대 이전의 경계는 선이 아니었다. 폭이 있는 땅, 그러니까 변경(frontier)이었다. 왕의 힘은 수도에서 멀어질수록 옅어졌고, 어느 지점부터 남의 것인지를 자로 재듯 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 사이에는 조공을 바치는 부족이 살았고, 양쪽에 세금을 내는 마을이 있었고,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산과 늪이 있었다.
지도 위의 실선 하나가 이쪽과 저쪽을 완전히 가르는 방식은 근대 국가와 함께 왔다. 국가가 영토 안의 모든 곳에 똑같은 세금을 매기고 똑같은 법을 적용하고 똑같이 징집하려면, 어디까지가 안이고 어디부터 밖인지 한 치도 남기지 않고 정해야 했다. 애매한 땅은 행정의 적이다. 경계 지대는 그렇게 경계선으로 압축됐다.
문제는 그 압축 작업을 누가 어디서 했느냐다. 살던 사람이 밭두렁과 물길을 따라 합의한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멀리 떨어진 도시의 제도판 위, 그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사람들의 손에서 정해졌다. 아프리카 국경의 상당수가 위도와 경도를 그대로 따르는 직선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알베르토 알레시나 연구진이 '인공 국가'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런 선이다. 땅의 생김새도, 사는 사람의 구성도 반영하지 않은 채 종이 위의 기하학만 따른 선.

지구를 반으로 접은 줄
1494년 6월 7일, 스페인의 작은 도시 토르데시야스.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이 조약에 서명했다.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370레구아, 약 2,100킬로미터 지점에 자오선을 하나 긋고 서쪽은 카스티야, 동쪽은 포르투갈이 갖기로 했다. 그 전해 5월 4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칙서 인테르 카에테라로 100레구아 선을 그었는데, 포르투갈이 반발해 270레구아를 서쪽으로 밀어낸 결과였다.
밀려난 270레구아 안에 브라질이 들어왔다. 브라질이 남미에서 혼자 포르투갈어를 쓰는 이유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 땅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조약문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1529년 사라고사 조약은 같은 방식으로 반대편 반구에도 선을 그었다. 유럽이 아직 지구의 대부분을 본 적도 없을 때 벌어진 일이다.
선을 먼저 긋고 땅은 나중에 확인한다. 근대 국경의 원형은 탐사가 아니라 협상이었다.

베를린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
흔히 "1884년 베를린에서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지도를 펼쳐놓고 자를 대고 나눠 가졌다"고들 한다. 절반만 맞는 말이다.
회담은 1884년 11월 15일에 열려 1885년 2월 26일에 끝났다. 레오폴드 2세의 요청을 받은 비스마르크가 소집했고 14개국이 참가했다. 아프리카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잔지바르의 술탄 바르가시가 참석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런데 일반의정서가 실제로 정한 것은 땅의 분배가 아니라 규칙이었다. 콩고 분지의 자유무역, 니제르강과 콩고강의 자유 항행, 레오폴드가 세운 국제콩고협회의 소유권 승인, 그리고 실효적 점유 원칙이다. 땅을 차지하려면 실제로 지배력을 세워야 하고 다른 나라에 미리 통고해야 한다는 것. 이 조항은 주로 해안 획득에 적용됐고, 34조를 지렛대 삼아 해안만 점유하면 내륙까지 주장할 수 있다는 배후지 원칙이 파생됐다. 회담에서 실제로 확정된 경계는 콩고 일대 정도다. 아프리카 국경 대부분은 그 뒤 20년 넘게 영국·프랑스·독일·포르투갈이 서로 맺은 양자 조약으로 하나씩 굳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베를린은 분할의 현장이 아니라 분할의 규칙을 만든 자리다. 지리학자 미셸 푸셰를 비롯해 아프리카 국경을 연구해온 이들이 통념을 다시 따져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이 정정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정이 더 나쁘다. 회담장 하나가 아니라 수십 번의 협상 테이블에서, 매번 그 땅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 결정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의성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20년 넘게 이어진 관행이었다. 한 번의 실수라면 바로잡을 수도 있지만, 관행은 그렇지 않다.
값은 지금도 나가고 있다. 스텔리오스 미할로풀로스와 엘리아스 파파이오아누가 아프리카 종족 집단의 원거주지 자료를 국경과 겹쳐 분석한 연구를 보면, 국경에 의해 갈라진 집단의 고향에서 정치폭력의 발생 빈도와 강도와 지속 기간이 모두 높았다. 이웃 나라의 군사 개입도 잦았다. 갈라진 집단은 중앙정부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됐고, 개인 단위로 보면 공공 서비스 접근성과 교육 수준까지 낮았다.
5주
래드클리프에게는 두 개의 위원회가 있었다. 펀자브와 벵골. 각 위원회는 다섯 명으로, 의장인 그를 빼면 국민회의 추천 판사 두 명과 무슬림연맹 추천 판사 두 명이었다. 넷이 반으로 갈리면 그가 결정한다. 실제로 매번 갈렸다. 결국 두 나라의 국경은 인도에 온 지 한 달 된 영국 변호사 한 사람의 판단이었다.
구르다스푸르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은 무슬림이 50.2퍼센트로 근소한 다수였는데, 네 개 테실 가운데 샤카르가르 하나만 파키스탄으로 가고 나머지는 인도에 남았다. 1941년 인구조사로 보면 구르다스푸르 테실은 무슬림 52.16퍼센트, 바탈라 테실은 55.07퍼센트였다. 둘 다 무슬림이 다수인데 인도로 갔다는 뜻이다. 파키스탄은 이 결정이 인도에 카슈미르로 가는 길을 열어줬다고 본다. 페로즈푸르에서는 무슬림 다수 지역이 인도로 넘어갔는데, 관개 수로의 취수 시설과 군사 기반을 지키려는 마운트배튼의 개입이 있었다는 주장이 따라붙는다.
재정은 8월 9일에서 12일 사이에 끝났다. 그러나 공표는 8월 17일로 미뤄졌다. 독립 축하 행사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는 판단이었다. 루시 체스터는 래드클리프 국경위원회를 다룬 연구에서 이 작업의 성격을 사법적 결정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이라고 짚는다. 그리고 지도가 공개되기 전 며칠 동안, 사람들은 이미 어느 쪽으로든 걷기 시작한 뒤였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의 규모는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종교를 따라 이동한 사람이 1,200만에서 2,000만 명 사이로 추정된다. 사망자 추정치는 20만 명에서 200만 명까지 열 배 차이가 난다. 연구자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사람을 세는 일을 맡을 행정 조직이 그때 막 둘로 쪼개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선을 긋느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셀 사람이 남지 않았다.

여권도 오래된 물건이 아니다
통행증 자체는 오래됐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는 여권, 그러니까 모든 국민이 하나씩 가지고 사진이 붙어 있고 없으면 국경을 넘지 못하는 그 물건은 1차 세계대전의 산물이다.
영국 국립기록보관소의 여권 안내는 이렇게 적는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해외로 여행하는 사람이 여권을 신청할 의무가 없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철도가 깔리고 유럽 안의 이동량이 폭증하면서, 전쟁 직전 30년쯤은 오히려 여권 체계가 느슨해진 시기였다. 국경을 넘는 일은 꽤 간단했다.
전쟁이 그걸 뒤집었다. 각국 정부는 보안을 이유로, 또 쓸 만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빠져나가는 걸 막으려고 여권 검사를 도입했다. 1914년 영국 국적·외국인지위법이 시민권 개념을 정리하고 소책자 형태의 여권을 만들었다. 1920년에는 국제연맹이 파리에서 여권·통관절차·직통승차권에 관한 회의를 열어 판형과 지침을 통일했고, 1926년과 1927년에 후속 회의가 이어졌다. 공항에서 내미는 그 작은 책자의 규격은 100년 전 그 회의실에서 정해졌다.
국경이 선이 되자 사람에게도 선이 필요해졌다. 여권은 국경이 낳은 부산물이다.

선이 남긴 것들
인도와 방글라데시 국경에는 최근까지 월경지가 있었다. 방글라데시 안의 인도 땅 102곳, 인도 안의 방글라데시 땅 71곳, 그 인도 땅 안에 다시 박힌 방글라데시 땅 21곳, 그리고 그 안에 또 들어앉은 인도 땅 한 곳. 다할라 카그라바리라는 이름의 세계 유일한 3차 월경지였다. 2010년 공동 인구조사에서 5만 1,549명이 그 안에 살고 있었다. 전기도 학교도 병원도 닿지 않았다. 방글라데시가 자국 월경지에 송전선을 놓으려 하자 인도가 통과를 거부해 보건소가 무용지물이 된 곳도 있다. 기원은 1713년 쿠치비하르 왕국과 무굴 제국이 맺은 조약의 혼선이었다. 300년 뒤인 2015년 7월 31일 자정, 두 나라는 마침내 땅을 맞바꿨다. 이때 오간 땅은 인도 쪽 111곳과 방글라데시 쪽 51곳으로 집계됐다. 무엇을 하나로 세느냐에 따라 숫자가 달라질 만큼, 그 선은 끝까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안 풀린 것들이 더 많다. 1893년 11월 12일 모티머 듀랜드와 아미르 압두르 라만 칸이 서명한 2,640킬로미터의 듀랜드 라인은 파슈툰 사람들의 거주지를 한가운데로 관통한다. 1949년 7월 26일 아프가니스탄 로야 지르가는 이 합의가 강압 아래 이뤄졌다며 무효를 선언했고, 그 뒤 어떤 아프간 정부도 이 선을 국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서사하라를 두고 국제사법재판소는 1975년 10월 16일 권고적 의견에서, 그 땅은 주인 없는 땅이 아니었으며 모로코와 모리타니 어느 쪽에도 영토주권의 유대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자결권이 적용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선을 그은 사람들은 대개 그 선 근처에 살지 않았다. 래드클리프는 지도가 공개되기 전에 떠났고, 토르데시야스의 협상가들은 브라질을 본 적이 없으며, 베를린 회담장에는 아프리카인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지도는 원래 세상을 옮겨 적는 물건이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이 지도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강이 흐르는 대로 마을이 생기는 게 아니라, 선이 지나가는 대로 사람이 갈라졌다.
국경을 자연처럼 여기는 습관은 꽤 강하다. 산맥이나 해안선처럼 원래 거기 있던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지구 위의 거의 모든 선에는 그것을 그은 날짜와 그은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다. 대개 100년에서 500년 사이의 일이고, 서명한 사람은 그 땅에 살지 않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그 선은 누가 어디서 언제 그은 것일까. 그리고 다시 긋는다면, 이번에는 누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