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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역사]2026-08-1110분 읽기

고통 없는 수술이라는 혁명 — 마취는 통증이 아니라 의식을 껐다

1846년 에테르 데이, 외과가 통째로 다시 쓰이던 날

마취 이전 수술은 속도전이었다. 가장 빠른 칼이 최고의 명의였다. 1846년 에테르 데이는 통증을 없앤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타인의 의식을 껐다 켤 수 있음을 처음 증명한 사건이었다. 우선권 다툼과 세 발견자의 말로, 그리고 지금도 풀리지 않은 질문 — 왜 의식이 꺼지는가.

수술대 위의 남자는 깨어 있었다. 1840년대 런던, 조수 넷이 그의 어깨와 다리를 짓눌러 고정하는 동안, 로버트 리스턴은 칼을 입에 물고 회중시계를 든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 "시간을 재 보시오, 여러분." 다음 순간 칼이 허벅지를 돌아 뼈를 드러냈고, 톱이 지나가고, 동맥이 묶이고, 절단된 다리가 바닥의 톱밥 통으로 떨어졌다. 28초. 리스턴이 세운 기록이었다. 환자는 그 28초 내내 비명을 질렀다. 이것이 마취 이전의 수술이었다. 잘 드는 칼이 아니라 빠른 칼이 최고의 외과의였다.

리스턴(1794~1847)은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빠른 칼"이라 불렸다. 이건 별명 이상이었다. 마취가 없던 시대에 속도는 취향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통증에 노출되는 시간, 출혈량, 쇼크로 죽을 확률이 모두 칼이 지나가는 초 단위에 달려 있었다. 1835년부터 1840년까지 리스턴은 66건의 절단 수술에서 10명을 잃었다. 여섯 명에 한 명꼴. 당대 평균이 네 명에 한 명이었으니 그는 명의였다. 명의의 기준이 '얼마나 빠른가'였던 것이다.

그러니 마취가 등장하기 전 외과란 지금 우리가 아는 그것이 아니었다. 배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종양을 찾아 떼어 내고, 부러진 뼈를 맞추는 일 따위는 상상 밖이었다. 환자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외과의가 할 수 있는 일은 체표에서 몇 분 안에 끝나는 것뿐이었다. 절단, 방광 결석 제거, 종기 절개. 수술실은 도살장에 가까웠고, 환자는 그 사실을 알면서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수술 날짜가 잡히면 환자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고 한다. 위스키나 아편이 있었지만 통증을 무디게 할 뿐 지우지는 못했다. 수술실 문 앞에서 달아나거나, 아예 수술을 포기하고 병으로 죽는 편을 택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외과의에게 요구된 자질은 손끝의 정교함만이 아니라, 사람의 비명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이었다. 그것은 기술이자 동시에 일종의 잔인함이기도 했다. 이 오래된 조건이 1846년 가을을 기점으로 통째로 사라진다.

1846년 10월 16일, 에테르 돔

그날 보스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계단식 수술 강의실에는 회의적인 의사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무명의 치과의사 윌리엄 T. G. 모튼이 자기가 가져온 유리 기구로 환자를 재우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환자는 에드워드 길버트 애벗, 스물몇 살의 인쇄공으로 목에 혈관종이 있었다. 집도의는 뉴잉글랜드 외과의 원로 존 콜린스 워런. 그는 이미 이런 종류의 '기적'을 여러 번 속임수로 목격한 사람이었다.

모튼이 에테르 증기를 흡입시키자 애벗은 잠에 빠졌다. 워런이 종양을 절개하는 동안 환자는 몸부림치지 않았다. 비명도 없었다. 수술이 끝나고 애벗이 깨어나 "목을 긁힌 것 같다"고 말했을 때, 강의실은 침묵했다. 워런은 청중을 돌아보며 한 문장을 남겼다. "여러분, 이것은 사기가 아닙니다(Gentlemen, this is no humbug)." 그 방은 이후 '에테르 돔'이라 불리게 된다.

핵심은 워런의 그 단어, '사기(humbug)'에 있다. 고통 없는 수술은 사기꾼과 돌팔이의 단골 상품이었다. 그날 달라진 것은 통증을 없애는 물질이 처음 발견됐다는 사실이 아니다. 인간이 타인의 의식을 껐다가 다시 켤 수 있으며, 그동안 몸에 무슨 짓을 해도 본인은 모른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공개된 자리에서 반박 불가능하게 증명됐다는 점이다. 소식은 몇 주 만에 대서양을 건넜다. 리스턴은 에테르 데이 두 달 뒤인 1846년 12월 21일, 런던에서 집사 프레더릭 처칠의 다리를 에테르 아래 잘라 냈다. 그가 청중에게 던진 말이 시대의 전환을 요약한다. "오늘은 양키들의 수법을 한번 써 봅시다."

에테르 돔에서 통증 경보를 끄는 레버를 당기는 dkdk
그림 1수술의 속도전이 의식 조절의 시대로 바뀐 역사적 장면을 압축한다.

누가 먼저였는가, 그리고 그 다툼의 진짜 교훈

흔히 '에테르 마취는 모튼이 발명했다'고 말한다. 사실은 훨씬 지저분하다. 조지아주 시골 마을 제퍼슨의 의사 크로퍼드 롱은 모튼보다 4년 앞선 1842년 3월 30일, 제임스 베너블의 목에서 낭종을 떼어 낼 때 이미 황산에테르를 썼다. 환자는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롱은 이 사실을 1849년에야 발표했다. 7년의 침묵. 바로 그 침묵이 결정적이다. 그의 첫 사용은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아무도 몰랐으니까.

여기에 또 한 사람, 하트퍼드의 치과의사 호러스 웰스가 있다. 그는 1844년 12월 11일 순회 흥행사 가드너 콜튼의 '웃음가스'(아산화질소) 시연을 보고, 가스에 취한 사람이 다리를 다치고도 아파하지 않는 것을 목격했다. 다음 날 그는 스스로 가스를 마신 뒤 동료 존 릭스에게 자기 사랑니를 뽑게 했고, "핀에 찔린 정도"밖에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1845년 1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공개 시연에서 가스 주머니를 너무 빨리 거두는 바람에 환자가 신음했고, 청중은 그를 "사기꾼"이라 비웃었다. 맞는 원리를 손에 쥐고도 무대에서 무너진 것이다.

모튼에게 에테르를 쓰라고 귀띔한 사람은 화학자 찰스 잭슨이었다. 그는 아이디어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모튼은 물질의 정체를 '레테온'이라는 이름 뒤에 숨기고 특허를 내려 했지만, 그것이 그저 에테르라는 사실은 곧 들통났고 특허는 무력화됐다. 그렇게 롱·웰스·잭슨·모튼 넷이 우선권을 두고 수십 년을 싸웠다.

마취는 단순히 통증을 없앤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의식을 스위치처럼 껐다 켤 수 있게 된 사건이다. 그런데 그 스위치를 누가 처음 눌렀는지는, 정작 아무도 깔끔하게 답하지 못한다.

발견 티켓과 공개의 문 사이에서 우선권을 심사하는 dkdk
그림 2먼저 발견하는 일과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공개하는 일이 다름을 보여준다.

세 사람의 말로, 그리고 후대가 지어낸 이야기

이 다툼의 결말은 흔히 이렇게 전해진다. 웰스는 1848년 1월, 클로로폼에 중독된 채 뉴욕의 감옥에서 서른셋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튼은 특허로 한 푼도 못 벌고 의회 보상을 구걸하다 1868년 뇌졸중으로 마흔여덟에 가난 속에 죽었다. 잭슨은 1873년 정신이상 판정을 받고 매클린 정신병원에 수용돼 1880년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마취라는 축복을 세상에 준 세 남자가 그 공을 다투다 모두 파멸했다는, 극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다.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의심스럽다. 실제로 후대 의학사 연구는 이 '세 명의 몰락' 서사 상당 부분이 20세기에 덧칠된 신화임을 지적한다. 잭슨의 경우, 그의 말년 '광기'는 언어 영역을 침범한 뇌졸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의학은 그것을 정신이상과 구별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마취의 저주가 그를 미치게 한 것이 아니라, 늙은 몸의 혈관이 그를 쓰러뜨렸을 뿐이다. 깔끔한 인과응보의 드라마는 사실보다 우리의 도덕감정에 봉사한다. 정작 진짜 교훈은 밋밋하다. 발견은 한 명의 천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여러 손을 거치는 과정이며, 역사는 '먼저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꾼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

클로로폼과 여왕, 고통이 죄를 벗던 날

에테르는 자극적이고 인화성이 강했다. 1847년 11월, 에든버러의 산과의사 제임스 영 심슨이 대안을 찾아냈다. 클로로폼이었다. 냄새가 덜 역하고 작용이 빨라 순식간에 유럽을 휩쓸었다. 하지만 마취는 곧 의학 밖의 저항에 부딪힌다. 특히 출산이 문제였다. 성경은 여자가 수고하여 자식을 낳으리라 했으니, 산통은 하와의 죄에 대한 형벌이며 이를 지우는 것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반발이 거셌다.

이 논쟁을 끝낸 것은 논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결정이었다. 1853년, 영국 최초의 전문 마취의라 할 존 스노가 빅토리아 여왕의 여덟째 아이 레오폴드 왕자 출산 때 클로로폼을 투여했다. 여왕은 만족했고, 다음 출산 때도 다시 요청했다. 이후 클로로폼 무통분만은 '여왕의 마취(chloroform à la reine)'라 불렸다. 대영제국의 군주가 몸소 통증을 거부하자, 통증을 견디는 것이 미덕이라는 오랜 도덕이 하룻밤 사이 힘을 잃었다. 마취는 이렇게 수술실을 넘어 인간이 고통과 맺는 관계 자체를 다시 썼다.

클로로폼 병에 감긴 고통의 사슬을 끊는 dkdk
그림 3고통을 도덕적 의무로 보던 관념이 의학적 관리 대상으로 바뀌는 전환을 드러낸다.

못 느낀 것인가, 못 기억하는 것인가

여기서 가장 섬뜩한 오해를 걷어내야 한다. 우리는 마취를 '깊은 잠'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전신마취 상태는 잠이 아니라 서로 다른 네 가지 목표의 조합이다. 무의식, 기억상실, 진통, 그리고 부동(움직이지 않음). 문제는 이 넷이 각각 따로 논다는 점이다. 하나가 걸려 있다고 나머지가 보장되지 않는다.

현대 마취에서는 대개 근이완제를 함께 쓴다. 환자를 완전히 못 움직이게 만드는 약이다. 그런데 바로 이 약이 위험한 회색지대를 만든다. 마취 깊이가 얕아 환자의 의식이 돌아와도, 근육이 마비돼 있으니 눈짓 하나 손끝 하나 움직여 "나 깨어 있다"고 신호할 수가 없다. 이것이 '수술 중 각성'이다. 드물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어떤 환자는 살이 갈리는 감각과 숨 막히는 마비를 동시에 겪고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취에 진짜로 기대하는 것은 '통증을 못 느끼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겪은 통증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이 둘은 전혀 다른 일이고, 어떤 마취약은 사실 후자에 더 가깝게 작동한다.

통증과 의식과 기억을 각각 조절하는 스위치 상자를 다루는 dkdk
그림 4마취가 하나의 단일 효과가 아니라 여러 신경 기능의 조합임을 분리해 이해하게 한다.

그런데, 왜 의식이 꺼지는지 아무도 모른다

가장 놀라운 사실을 마지막에 둔다. 에테르 데이로부터 175년이 넘게 지났고, 마취는 매일 지구상에서 수백만 번 시행되지만, 전신마취약이 정확히 어떻게 의식을 끄는지는 지금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건 의학의 게으름 탓이 아니다. 오히려 백 년 넘게 최고의 두뇌들이 매달렸는데도 풀리지 않은 문제라는 뜻이다. 20세기 초 마이어와 오버턴은 마취약의 효력이 그 물질의 지질 용해도에 비례한다는 놀라운 상관관계를 발견했다. 단세포 생물부터 인간까지 들어맞는 이 규칙은 오랫동안 '마취는 세포막의 기름 성분에 녹아들어 작동한다'는 믿음을 낳았다. 하지만 이 이론은 무너졌다. 사슬이 긴 알코올은 지질 용해도가 계속 커지는데도 어느 길이를 넘으면 마취 효력이 더는 늘지 않는다. 순수한 '기름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오늘날 연구는 마취약이 신경세포의 특정 이온 채널에 직접 달라붙는다는 쪽으로 옮겨 갔지만, '왜 그 결합이 의식이라는 현상을 통째로 정지시키는가'에 대한 통일된 답은 여전히 없다.

의식 스위치의 전선이 검은 장막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dkdk
그림 5임상적으로 다루는 능력과 기전을 완전히 설명하는 능력 사이의 간극을 남긴다.

생각해 보면 기묘한 일이다. 우리는 의식을 매일 안전하게 껐다가 켠다. 그것에 사람의 목숨을 맡기고, 배를 열고 심장을 멈췄다 다시 뛰게 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스위치의 작동 원리는 모른다. 마취의 역사는 인간이 고통을 정복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은 정반대다. 우리는 의식이라는 것이 껐다 켜질 수 있다는 사실만 겨우 알아냈을 뿐, 그것이 무엇인지, 왜 꺼지는지는 여전히 모른 채로, 매일 그 스위치를 누르고 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사라졌던 그 몇 시간은 정말로 '잠들어' 있던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