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재판, 40년 만의 재감정
리벳 실험은 자유의지를 반증한 적이 없다
1983년 벤저민 리벳은 뇌의 준비전위가 의식적 의도보다 350밀리초 앞선다는 결과를 내놨고, 이후 40년간 이 실험은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는 증거로 인용됐다. 그런데 그 핵심 물증인 준비전위가 결정 신호가 아니라 신경 잡음의 우연한 누적일 수 있다는 재해석이 나오면서, 무엇을 보여준 실험인지가 다시 열렸다. 2025년의 새 데이터는 그 재해석마저 흔든다. 확실한 것은 판결이 사라졌다는 사실뿐이다.
1983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실험실에서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손목을 까딱였다. 머리에는 전극이 붙었고, 눈앞 오실로스코프에서는 초록 점 하나가 2.56초에 한 바퀴씩 시계판을 돌았다. 규칙은 단순했다. 내킬 때 손목을 굽힐 것. 그리고 굽히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 든 순간에 점이 어디 있었는지 기억해 둘 것. 벤저민 리벳은 그 두 시각을 나란히 놓고 뺄셈을 했다. 뇌가 준비를 시작한 시점에서, 사람이 그걸 알아차린 시점을 뺐다.
숫자는 야박했다. 준비전위는 손목이 움직이기 550밀리초 전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의도를 느꼈다고 보고한 시각은 200밀리초 전. 그 사이가 350밀리초 비었다. 뇌가 먼저 정하고 나는 나중에 통보받는다. 논문 한 편이 그렇게 읽혔고, 그 독법은 40년을 갔다.
0.55초가 헤드라인이 되기까지
리벳의 결과가 학술지 밖으로 나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뇌과학이 마침내 영혼을 해부했다는 식의 문장이 따라붙었고, 형사책임과 도덕적 비난에 관한 논의에까지 인용됐다. 2011년 네이처가 신경과학과 철학의 충돌을 정면으로 다뤘을 때도 구도는 그대로였다. 한쪽은 자유의지가 환상이라고 했고, 다른 쪽은 이 실험이 애초에 자유의지를 측정한 적 없다고 했다.
2016년 한 연구팀이 이 실험을 다룬 언론 보도를 내용분석했다. 결과는 씁쓸하다. 기사 대부분은 원 실험의 세부를 거의 전하지 않았고, 방법론적 한계가 제기됐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결론은 자유의지가 무너졌다는 쪽으로 밀고 갔다. 연구진은 신경생물학적 설명에 실제보다 높은 신뢰를 부여하는 경향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증거는 계속 쌓이는 듯 보였다. 2008년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실린 fMRI 연구는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버튼을 누를지가 본인이 결정을 자각하기 7초에서 10초 전에 이미 전두극과 두정엽 활동 패턴에 들어 있다고 보고했다. 10초라는 숫자만 떼어져 리벳의 결정타처럼 유통됐다. 그런데 그 예측의 정확도는 60% 남짓이었다. 동전 던지기가 50%다. 뇌를 10초 앞서 읽어서 얻은 우위가 10퍼센트포인트였다는 사실은 대중적 요약에서 거의 언제나 빠졌다. 오해는 데이터가 아니라 데이터를 옮기는 문장에서 생겨났다.

흔들리는 자
리벳의 결론은 두 시각의 뺄셈에 통째로 얹혀 있다. 뺄셈이 성립하려면 두 시각이 비슷한 정밀도로 재져야 한다. 준비전위는 기계가 읽는다. W라 불리는 의도 자각 시각은 사람이 읽는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뜯어보면 만만치 않다. 흐르는 경험 어딘가에서 한 지점을 잘라내고, 그 지점을 돌아가는 점의 위치로 번역하고, 그 위치를 기억했다가 나중에 말로 옮겨야 한다. 변환이 세 번 일어나고 세 번 다 오차가 낀다. 게다가 보고는 언제나 사후에 이뤄진다. 무언가를 떠올려 말하는 순간, 그 기억은 이미 그다음에 벌어진 일을 알고 있다. 손목이 실제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기억을 뒤에서 물들인다.
리벳도 이 문제를 몰랐던 게 아니다. 그는 손등에 약한 자극을 주고 그 시각을 같은 시계로 보고하게 하는 대조 조건을 뒀는데, 사람들은 실제 자극보다 평균 50밀리초쯤 이르게 보고했다. 보정할 여지는 생겼지만, 남의 손등을 건드린 순간을 읽는 일과 내 안에서 의도가 떠오른 순간을 읽는 일에 같은 오차가 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더 곤란한 결과도 있다. 시계판 대신 무작위로 울리는 소리를 끼워 넣어 그 순간 무엇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묻는 방식에서는, 사람들이 보고한 의도 발생 시점이 훨씬 앞당겨졌다. 어떤 경우에는 준비전위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리벳이 재려던 것이 정말 의도의 발생이었다면, 재는 방법을 바꿨다고 이렇게까지 움직여서는 곤란하다. 2021년에 나온 리벳식 실험 메타분석은 이 변동 폭이 결론의 부호를 바꿀 만큼 크다는 점을 정리했다. 자가 흔들리면 그 자로 잰 350밀리초도 함께 흔들린다.

결정 신호가 아니라 잡음이라면
더 근본적인 공격은 2012년에 왔다. 아론 슈르거와 동료들이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 낸 모형은, 준비전위가 결정의 흔적이 아니라 평균 내기가 그려낸 그림일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얘기다. 뇌 활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위아래로 끊임없이 요동친다.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는 과제에서 사람은 이 요동이 우연히 어떤 문턱을 넘는 순간에 손을 움직인다. 실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시점을 0으로 놓고 그 앞 구간을 잘라 수십 번 겹쳐 평균을 낸다. 그런데 잘라낸 구간은 정의상 전부 문턱을 넘어버린 궤적들이다. 무작위로 오르내리는 곡선 중에서 끝에 올라간 것만 골라 겹치면, 매끄럽게 상승하는 곡선 하나가 반드시 나온다. 개별 시행 어디에도 없던 완만한 경사가 평균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이 모형은 준비전위의 모양뿐 아니라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기다렸다가 움직이는지의 분포까지 함께 설명했다. 결정이 550밀리초 전에 내려졌다는 해석은, 그 시점에 무언가가 시작됐다는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슈르거의 계산에서 그 시점은 시작이 아니라 되돌아본 평균의 산물이었다. 같은 곡선을 놓고 결정의 개시로도, 우연의 누적으로도 읽을 수 있다면, 그 곡선은 애초에 둘 사이를 갈라줄 증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2021년 그가 동료들과 쓴 검토 논문의 제목은 아예 질문이다. 준비전위란 무엇인가.
그런데 그냥 잡음도 아니다
여기서 슈르거의 재해석을 새 정답으로 굳히면 40년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2025년 이미징 뉴로사이언스에 실린 연구는 움직임에 예측 가능한 소리나 시각적 결과가 뒤따를 때 준비전위가 더 커진다고 보고했다. 순수한 배경 잡음의 누적이라면 뒤에 무엇이 오든 신호는 같아야 한다. 같은 해 실린 다른 연구는 반대편으로 간다. 이른 시기의 준비전위가 운동 준비에 대한 자각과 무관하다는 결과인데, 연구진은 우연한 요동이 쌓이는 과정을 나중에 되짚어 읽는 방식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이라고 봤다. 이쪽은 리벳을 정면으로 겨눈다. 신호가 올라오는 동안 사람이 무엇을 준비하는지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 곡선을 의식보다 먼저 내려진 결정으로 읽을 근거도 함께 사라진다. 한 해에 나온 두 연구가 서로 다른 방향을 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지금 이 분야가 합의한 것과 여전히 다투는 것을 갈라 보면 이렇게 된다. 준비전위를 곧 결정 신호로 읽는 독법이 데이터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다는 점, W 시각 측정이 그런 결론을 떠받칠 만큼 튼튼하지 않다는 점은 대체로 정리됐다. 반면 그 신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활짝 열려 있다. 우연한 요동의 누적인지, 운동 준비 그 자체인지, 행위가 불러올 결과에 대한 뇌의 예측인지. 리벳 실험이 잃은 것은 자유의지에 대한 판결이지, 그 자리에 반대 방향의 새 판결이 들어선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증명됐다는 문장은 그 반대 문장만큼이나 성급하다.
철학 쪽에서는 더 앞선 지점을 짚는다. 설령 뇌가 의식보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게 사실이더라도, 그것이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지는 자유의지를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달렸다. 내 결정이 내 뇌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그 결정이 내 것이 아니라는 뜻과 같지 않다. 무의식적 과정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마음을 요구하는 자유의지 개념이라면 애초에 어떤 실험 결과와도 화해할 수 없다. 신경과학이 자유의지를 반증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반복해서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무엇을 재려는지가 합의되기 전에 자부터 들이댄 것이다.
리벳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정작 리벳 본인은 자유의지를 폐기하지 않았다. 그는 의식이 행동을 개시하지는 못해도 중단시킬 수는 있다고 봤고, 이를 거부권이라 불렀다. 1999년에 쓴 글에서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의식적 자유의지의 역할은 자발적 행위를 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실제로 일어날지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가 든 예는 소박하다. 강의실에서 교수에게 욕설을 뱉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가 삼켜지는 순간. 실험실 밖에서 누구나 겪는 그 일이 그에게는 거부권의 증거였다. 실제로 그는 피험자들이 미리 정해둔 시각에 하기로 한 동작을 실행 직전 100~200밀리초 구간에서 취소해냈다고 적었다. 취소된 시행에도 커다란 준비전위가 앞서 있었다. 신호가 올라온다고 해서 행동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같은 글에서 그는 결정론과 비결정론이 모두 입증되지 않은 이론이며, 자유의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편이 부정하는 쪽보다 적어도 못하지 않은 과학적 선택지라고 썼다. 이 실험을 자유의지의 반증으로 인용해온 40년의 관행은, 실험을 설계한 사람의 결론과 정반대였던 셈이다.

거부권은 말로만 남지 않았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로 준비전위를 실시간 검출해 정지 신호를 쏘아 보내는 연구에서, 사람들은 신호가 움직임 시작 200밀리초 전보다 일찍 도착하면 동작을 취소해냈다.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 지점은 준비전위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보다 한참 뒤, 근육이 움직이기 직전에 있었다.
단추와 1000달러 사이
남은 질문은 더 크다. 아무 이유 없이 손목을 굽히는 일과, 무엇이 옳은지 따져보고 정하는 일이 과연 같은 종류인가.
2019년 마오즈 연구팀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1000달러를 여러 비영리단체 중 한 곳에 기부하게 했다. 아무렇게나 고르라고 한 조건에서는 예상대로 준비전위가 나타났다. 어디에 기부할지 숙고하는 조건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신호가 없다는 결과는 있다는 결과보다 해석이 조심스럽고, 아직 한 편의 연구다. 그래도 겨냥은 정확하다. 철학이 자유의지를 이야기할 때 문제 삼는 것은 임의의 손목이 아니라 이유를 따져 내린 결정이고, 리벳의 패러다임이 다룬 것은 정확히 그 반대편이었다. 이유가 필요 없어서 선택된 행동으로 이유를 따지는 능력을 판정한 셈이다.

리벳이 숙고적 결정을 연구 대상으로 골랐다면, 어쩌면 신경과학이 자유의지를 환상으로 증명했다는 논쟁 전체를 우리는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마오즈의 동료 리아드 무드릭이 올해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40년 동안 법정에 세워진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손목이었는지도 모른다. 물증으로 제출된 그 곡선은 지금 다시 감정을 받는 중이고, 무엇을 찍은 사진인지조차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판결은 어디로 갔을까. 애초에 내려진 적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40년 동안 대체 무엇을 믿고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