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정의 — 심장이 뛰는데 죽었다고 말하기까지
심장사에서 뇌사로, 인공호흡기가 만든 새로운 상태 앞에서 의학과 법은 어디에 선을 다시 그었나
죽음의 기준이 심장 정지에서 뇌 기능 상실로 옮겨 간 것은 새로운 생물학적 발견 때문이 아니었다. 1968년 하버드 특별위원회는 그 정의가 필요한 이유로 소생술의 발전과 이식용 장기를 둘러싼 논란, 두 가지를 스스로 적어 두었다. 그 뒤로 영국과 미국의 정의가 갈렸고, 뉴저지와 일본과 한국은 각기 다른 예외와 절차를 법에 새겼다. 죽음이 순수한 생물학적 사실이라면, 왜 국경을 건널 때마다 달라지는가.
심장이 멈추면 죽은 것이다. 이 문장은 수천 년 동안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맥을 짚고, 코앞에 거울을 대 보고, 서리지 않으면 끝이었다. 판정은 관찰이었고 관찰은 곧 사실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의 어느 병실에서 이 문장이 처음으로 작동을 멈췄다. 심장은 뛰는데 죽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새로운 병도, 새로운 발견도 아니었다. 기계였다.
기계가 만든, 이전에 없던 상태
양압 인공호흡기가 병상에 들어온 직후인 1959년, 프랑스 신경학자 피에르 몰라레와 모리스 굴롱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환자를 부를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새 말을 만들었다. coma dépassé, 혼수를 넘어선 상태. 고전적 혼수가 의식과 운동, 감각, 반사 같은 관계적 기능의 상실이라면 이 상태에서는 자발호흡과 체온 조절 같은 식물적 기능까지 함께 무너져 있었다. 다만 기계가 대신 숨을 넣어 주는 동안 심장은 계속 뛰었다.

순서가 중요하다. 이 상태는 발견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다. 인공호흡기 이전에 뇌간이 완전히 망가진 사람은 몇 분 안에 심정지로 넘어갔고, 심장사라는 낡은 기준은 아무 문제 없이 작동했다. 기계가 그 몇 분을 몇 주로 늘리자 비로소 기준과 몸 사이에 틈이 생겼다. 몰라레와 굴롱이 한 일은 죽음을 다시 정의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어느 칸에도 들어가지 않는 환자가 존재한다고 보고한 것이었다. 정의를 요구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 환자들이 누워 있던 병상이었다. 그리고 이 관찰은 크리스티안 바너드의 첫 심장이식보다 8년 앞선다. 인공호흡기가 범주를 만들었고, 이식은 그 범주에 이름과 법적 지위를 붙이는 일을 급하게 만들었다. 두 사건은 같지 않다.
1968년, 위원회가 스스로 밝힌 이유
1968년 8월 5일, 하버드 의대 특별위원회가 마취과 의사 헨리 비처의 주도로 「불가역적 혼수의 정의」를 발표했다. 이 짧은 문서가 이후 반세기 임상을 지배한다. 위원회는 첫 문단에서 목적을 밝힌다. 불가역적 혼수를 죽음의 새로운 기준으로 정의하는 것. 그리고 왜 그런 정의가 필요한지를 두 가지로 적었다. 첫째, 소생술과 보조수단의 발전이 뇌가 회복 불가능하게 손상된 사람을 만들어 냈고 이것이 환자와 가족, 병원, 병상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부담이 된다. 둘째, 낡은 죽음의 기준이 이식용 장기를 얻는 과정에서 논란을 낳는다.
위원회가 내놓은 확인 방법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소박했다. 외부 자극에 대한 완전한 무반응, 자발적 움직임과 자발호흡의 부재, 반사의 소실, 그리고 평탄한 뇌파. 자발호흡을 보려고 인공호흡기를 3분간 떼어 보았고, 같은 검사를 24시간 뒤에 반복해 변화가 없어야 했다. 저체온이나 중추신경 억제제의 영향은 미리 배제해야 했다. 오늘날의 판정 지침은 이 뼈대를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지 뒤집은 것이 아니다.
이 대목은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보고서가 제시한 것은 죽음에 관한 새로운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었다. 침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임상 특징의 목록과, 그 기준이 필요한 제도적 이유였다. 그러므로 "장기이식 때문에 죽음의 정의가 바뀌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사료가 허락하는 것보다 한 발 더 나간 말이다. 확인되는 사실은 이것이다. 위원회 자신이 이식을 두 이유 중 하나로 문서에 적어 두었다는 것. 이후 로버트 비치와 로버트 트루오그를 비롯한 생명윤리학자들은 바로 그 문장을 근거로, 이 기준이 생물학적 논증이 아니라 실용적 필요에서 출발했다고 비판해 왔다. 문서가 말한 것과 후대가 지적한 것은 구분해 두는 편이 정확하다.

낡은 죽음의 기준은 이식용 장기를 얻는 데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이것이 1968년 보고서가 스스로 적어 둔 두 번째 이유였다.
법이 선을 받아 적다
1981년 미국 대통령 직속 생명윤리위원회는 「죽음의 정의」 보고서를 냈고, 같은 해 통일주법위원회는 미국의사협회, 미국변호사협회와 함께 통일사망판정법을 채택했다. 조문은 간결하다. 순환·호흡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 또는 뇌간을 포함한 뇌 전체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 둘 중 하나면 사망이다. 하나의 죽음에 두 개의 문이 달린 셈이다.

위원회 보고서는 철학 논문이 아니었다. 스스로 밝혔듯 공공정책을 만드는 과정의 일부였고, 목표는 개념의 완결이 아니라 여러 주에서 채택될 수 있는 문안이었다. 이 점은 두 개의 문이 왜 그런 모양이 되었는지도 설명한다. 심폐 기준을 없애고 뇌 기준으로 갈아탄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을 그대로 둔 채 옆에 문을 하나 더 낸 것이다. 대다수 사람은 여전히 첫 번째 문으로 죽고, 두 번째 문은 인공호흡기가 붙어 있는 소수의 병상에서만 열린다.
채택 범위는 자료마다 다르게 서술된다. 39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가 이 법을 받아들였다는 기술이 있는가 하면, 이후 50개 주 전부가 어떤 형태로든 채택했지만 조문을 그대로 옮기지 않은 주가 많다는 기술도 있다. 분명한 것은 동일한 문장이 미국 전역에 그대로 깔린 적은 없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설계가 하나 더 있다. 법은 죽음의 개념만 정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구체적 검사는 의학계의 몫으로 남겼다. 개념은 입법의 산물이고 절차는 학회의 산물이라는 이 분업이, 이후 나라마다 선이 달라지는 여지를 만든다.
같은 죽음, 다른 선
영국은 뇌간사를 쓴다. 뇌 전체의 기능 정지를 확인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남아 있을지 모르는 기능 가운데 의식을 시사하는 것이 없으면 된다고 본다. 의식할 능력의 불가역적 상실과 숨 쉴 능력의 불가역적 상실, 이 둘이 뇌간 기능 상실만으로 충족될 수 있고 대개 임상적으로 진단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미국은 뇌간을 포함한 뇌 전체를 요구하고 보조검사를 더 넓게 쓴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나온다. 보조검사를 쓰지 않는다면 침상에서 실제로 하는 진찰은 두 나라가 사실상 같다. 갈라지는 것은 검사가 아니라 정의다. 실제로 뇌간사가 확정된 뒤에도 뇌 일부에 전기활동이 남아 있는 사례가 보고되어 왔고, 그럼에도 그 상태에서 의식을 회복한 환자는 보고된 바 없다. 2020년 국제 협업으로 발표된 세계뇌사프로젝트는 136개국에 접촉해 83개국의 공식 프로토콜을 확보했는데, 약물 배제를 명시한 곳이 82퍼센트, 체온이 78퍼센트, 검사 수치가 72퍼센트, 관찰 시간이 47퍼센트, 혈압이 44퍼센트였다.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조차 합의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연락이 닿은 나라 중에서도 공식 프로토콜 자체가 없는 곳이 적지 않았다. 같은 몸을 두고 어떤 나라에서는 관찰 시간을 정해 두고 어떤 나라에서는 정해 두지 않는다면, 사망 시각은 물론이고 사망 여부까지 판정하는 사람의 재량에 얹히게 된다.
법 안에 새겨 둔 예외
1991년 뉴저지는 사망선언법에 종교적 예외를 넣었다. 신경학적 기준에 따른 사망선언이 환자 본인의 종교적 신념에 반한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으면, 의사는 심폐 기준으로만 사망을 선언한다. 하레디 유대교와 여러 불교 전통이 신경학적 죽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법이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같은 신체 상태가 강 하나를 건너면 사망이 되고 건너지 않으면 생존이 된다.

뉴저지는 예외를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예외를 택한 환자의 건강보험 적용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조항까지 함께 두었다. 신념을 지키는 데 비용이 든다면 예외는 이름뿐이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1997년 장기이식법에서 본인의 서면 의사와 가족의 동의가 모두 갖춰졌을 때에만 법적 뇌사판정을 시행하도록 했다. 기증자 연령도 15세 이상으로 제한했고, 이 제한은 2009년 개정과 이듬해 시행을 거쳐서야 완화된다. 죽음의 확정 자체가 선택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한국은 다른 방식으로 같은 문제를 다룬다.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은 뇌사판정위원회를 두고, 전문의인 위원 2명 이상과 의료인이 아닌 위원 1명 이상을 포함한 과반수의 출석, 그리고 출석위원 전원의 찬성으로 뇌사를 판정하게 한다. 죽음이 만장일치로 확정된다. 여기에 비의료인 한 명이 반드시 앉아 있어야 한다는 조항만큼, 이 판정의 성격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문장도 드물다.
아직 닫히지 않은 것
1998년 신경학자 앨런 슈먼은 1만 2천여 편의 문헌에서 약 175건의 사례를 추리고 그중 56건을 상세 분석해, 뇌 기능이 모두 소실된 몸이 인공적 지지 아래 수 주에서 수 개월, 때로는 수 년간 유지될 수 있음을 보였다. 상처가 아물고, 아이의 몸이 자라고, 임신이 유지되기도 했다. 뇌가 몸을 하나로 통합하기 때문에 뇌의 죽음이 곧 사람의 죽음이라던 표준 논거는 이 자료 앞에서 흔들렸다. 슈먼의 결론은 뇌사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려면 통합 기능 상실보다 나은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병상에서 더 자주 부딪히는 물음은 더 실무적이다. 뇌사 판정 검사를 시행하는 데 가족의 동의가 필요한가. 가족이 판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판정에 관여하는 의사 가운데 절반가량이 이의를 제기하는 가족을 겪어 봤다는 조사가 있지만, 이 상황을 다루는 법적 지침은 놀랄 만큼 얇다. 죽음이 확정된 사람을 두고 동의를 논하는 것은 언뜻 모순처럼 들리는데, 그 모순이야말로 이 선의 성격을 보여 준다.
논쟁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통일주법위원회는 통일사망판정법 개정을 위한 위원회를 꾸렸다가 2023년 가을 작업을 무기한 중단했다. 개정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했지만, 어떻게 고칠지를 두고 폭넓게 채택될 만한 문안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미국신경과학회가 새 판정 지침을 냈지만 달라진 것은 주로 보조검사 항목이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뇌 기능이 불가역적으로 소실된 사람이 회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학적 합의다. 그 상태를 죽음이라 부를지, 어디까지 소실되어야 하는지, 누가 어떤 절차로 확인하는지는 여전히 열려 있는 물음이다. 죽음의 기준이 심장에서 뇌로 옮겨 간 것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새로 알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기계와 제도가 만든 새로운 상황 앞에서 어딘가에 선을 다시 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선은 지금도 나라마다, 주마다, 병원마다 조금씩 다른 자리에 그어져 있다. 어떤 사실이 나라를 건너면서 달라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