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 게임 — 함께 이기는 판은 왜 늦게 왔나
승리 조건을 공유한 순간, 게임은 새로운 병리와 싸우기 시작했다
수천 년 동안 게임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장치였고, 모두가 같은 편이 되는 형식이 주류가 된 것은 21세기 들어서의 일이다. 그런데 이 형식은 갈등을 없애는 대신 새로운 병리를 낳았다. 가장 잘하는 한 명이 전원의 수를 지시해 나머지가 관객이 되는 알파 플레이어 문제다. 정보 차단, 실시간 압박, 발언 금지, 배신자 역할까지 — 협력 게임의 설계사는 그 병리와 싸운 기록이다.
1970년대 초, 짐 디코브는 게임 가게 주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누고 돕는 걸 가르치는 좋은 가족 게임을 찾는데요. 주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손님이 함께 웃지 않는 걸 보고 표정을 고친 뒤, 진지하게 가게를 뒤졌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가게 전체에서 단 하나도 찾지 못한 것이다. 디코브는 훗날 이 장면을 회고하며 자신이 왜 직접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는지 설명했다. 1972년, 그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패밀리 파스타임즈'를 차리고 첫 작품 『투게더』를 내놓는다. 협력 게임을 시장에 내놓은 최초의 회사였을지도 모른다.
이기는 것이 곧 게임이었다
이상한 공백이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게임판 앞에 모여 앉았지만, 그 판은 거의 예외 없이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장치였다. 게임의 정의 자체에 대립이 박혀 있었다. 학자들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경쟁 게임은 협력을 아예 배제하고, 협력 게임은 협력을 필수로 요구한다. 둘은 스펙트럼의 정반대 끝에 있다.
연구자들은 여기서 한 겹 더 나눈다. 각자 목적과 보상이 다른 채로 손을 잡는 것이 협조라면, 목적이 하나이고 보상과 벌을 통째로 나눠 갖는 것이 협력이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보드게임은 앞의 것조차 임시 동맹으로만 허용했다. 뒤의 것, 그러니까 게임의 승패 자체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주어를 갖는 형식은 오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협력이라는 형식은 취미 시장이 아니라 교육과 치료의 언저리에서 먼저 자랐다. 디코브의 회사가 내건 명제는 노골적이었다. 경쟁 게임은 아이에게 옳은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온타리오 퍼스 근교의 시골에서 대부분의 생산을 직접 하는 이 가내수공업 회사에게, 협력 게임은 시장의 빈틈이 아니라 신념의 문제였다. 이 회사는 이후 100종이 넘는 게임을 냈고 전부 협력 게임이었다. 그중 1982년작 『메이즈』는 체스처럼 생겼지만 규칙이 뒤집혀 있다. 말을 하나라도 잡으면 양쪽이 동시에 패배한다. 판을 절반 넘어간 내 말은 더 이상 내 통제를 벗어나 상대가 움직인다.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전쟁을 막는 게임이었다.
취미 시장이 이 형식을 받아들인 것은 한참 뒤다. 1987년 『아컴 호러』가 컬트적 추종을 얻었고, 결정적 전환은 2000년 라이너 크니치아의 『반지의 제왕』이었다. 코스모스가 독일에서, 위저즈 오브 더 코스트가 미국에서 낸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각자 호빗이 되어 사우론을 상대한다. 게임이 이기거나, 우리가 다 함께 이긴다. 슈필 데스 야레스는 이 작품에 특별상을 줬다. 그리고 2008년, 매트 리콕의 『팬데믹』이 형식을 대중의 식탁 위로 올렸다. 네 가지 질병이 세계 지도 위로 번지고, 플레이어들은 각자 다른 역할을 맡아 그것을 막는다. 다 함께 이기거나 다 함께 진다. 판매고는 자료마다 갈리지만 백만 부 단위로 팔린 것은 분명하고, 2020년 전후로 판매가 다시 뛰었다는 기록도 있다. 삼십 년 전이라면 웃음거리였을 형식이 장르가 된 것이다.
협력이 만든 새 병리
여기서 통념 하나를 걷어내야 한다. 협력 게임은 갈등이 없어서 순한 장르라는 생각 말이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이렇다.
『팬데믹』 판 위. 네 사람이 앉아 있는데 한 명이 말한다. "자, 나는 내 턴에 런던으로 가고, 너는 나한테 카드를 주고, 그다음 내가 그걸 써서…" 나머지 셋은 자기 캐릭터의 능력을 아직 다 읽지도 못했다. 십 분쯤 지나면 테이블에는 한 명의 플레이어와 세 명의 관객이 남는다. 손은 넷이 움직이지만 결정하는 뇌는 하나다.

이것이 알파 플레이어 문제, 미식축구에 빗대 퀸터베이킹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놀라운 것은 이 병리가 장르의 성공보다 먼저 진단됐다는 점이다. 2006년, 호세 사갈과 요헨 릭, 이드리스 시는 학술지 『시뮬레이션 앤드 게이밍』에 크니치아의 『반지의 제왕』을 해부한 논문을 실으면서 세 개의 함정을 정리했다. 첫 번째 함정이 바로 이것이었다. 협력 게임이 "한 명이 팀의 결정을 다 내리는 상태로 퇴화하지 않으려면 충분한 협력의 근거를 제공해야 한다." 그들은 이 퇴화한 상태를 '솔리테어 게임'이라고 불렀다. 여럿이 앉아 있지만 실은 혼자 하는 게임.
퀸터베이킹은 협력 게임이 주는 짜릿한 이득을 빼앗아 간다. 협력 게임은 진짜 연대 같은 것을 어떻게 이뤄내는지에 대한 모델을 자주 제시하는데, 그것이 사라진다.
작가 에릭 서름의 진단이다. 비평가 에릭 트와이스는 한 걸음 더 나간다. 알파 플레이어는 병이 아니라 열이라는 것. 그 아래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게임의 깊이가 얕아서 최선의 수가 뻔하거나, 실력 차가 너무 크거나, 그냥 그 사람이 무례하거나. 그러니까 협력 게임의 설계사는 갈등을 없앤 역사가 아니다. 승리 조건을 공유하는 순간 새로 태어난 병리와 싸운 역사다.
정보를 자르는 쪽
첫 번째 처방은 정보 차단이었다. 사갈의 논문은 이미 『반지의 제왕』에서 그 씨앗을 봤다. 자원을 각자 가리게 해서 아무도 전체 판을 볼 수 없게 만든 설계다. 정보 이론의 관점에서는 비효율이지만, 플레이 관점에서는 정확한 선택이다. 잘하는 플레이어도 남들의 도움 없이는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 2010년 앙투안 보자의 『하나비』다. 플레이어는 자기 카드를 자기 쪽이 아니라 남들 쪽으로 돌려 쥔다. 내 손패만 못 보는 것이다. 줄 수 있는 힌트의 형식과 개수도 제한된다. 슈필 데스 야레스 심사위원단은 2013년 이 게임에 대상을 주면서, 모두가 카드를 거꾸로 들고 있는 광경이 진기할 뿐 아니라 "집중된 상호작용을 촉진한다"고 썼다. 2019년 토마스 징의 『더 크루』는 같은 원리를 트릭테이킹에 심었다. 50개의 미션을 통과하는 동안 플레이어들은 손패에 관해 아주 제한된 정보만 나눌 수 있다. 이 작품은 2020년 케너슈필 데스 야레스를 받았다.
시계와 배신자
두 번째 처방은 시간이다. 2008년 블라다 흐바틸의 『스페이스 얼럿』은 실시간으로 흘러간다. 토론에 쓰는 1초는 실행에서 빠지는 1초다. 지시할 시간 자체를 없애 버린 것이다.

가장 급진적인 사례는 2017년 카스퍼 랍의 『매직 메이즈』다. 말하는 것도, 손짓하는 것도 금지된다. 각자는 말을 하나 맡는 게 아니라 방향을 하나 맡는다. 누군가 북쪽으로 가야 하는데 북쪽 타일을 쥔 사람이 딴 데를 보고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은 '뭐라도 좀 해' 폰을 그 사람 앞에 탁 놓는 것뿐이다. 3분짜리 모래시계가 흐르는 동안 테이블은 침묵 속에서 몸을 뒤튼다. 랍은 이 침묵이 도덕이 아니라 난이도의 문제였다고 말한다.
그냥 디자인 공모전에 낼 웃긴 게임을 만들고 싶었어요. 플레이어들이 협력해서 말들을 움직여야 한다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러다 그게 어려운 게임이 되려면 침묵 속에서 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세 번째 처방은 아예 갈등을 되돌려 놓는 것이다. 2005년 『섀도우 오버 카멜롯』은 원탁의 기사 중에 배신자가 섞여 있을 수 있게 했다. 2014년 『데드 오브 윈터』는 모두에게 비밀 개인 목표를 쥐여 준다. 옆 사람의 조언이 진심인지 알 수 없을 때, 알파 플레이어의 지시는 그냥 지시가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 된다. 협력의 순도를 낮춤으로써 협력을 되살리는 역설이다.
설계로 안 되는 부분
이 대응들을 한자리에 모아 분류한 사람도 있다. 게임 연구 매체 『아날로그 게임 스터디스』에 실린 한 논문은 퀸터베이킹에 맞서는 기계적 처방을 네 갈래로 정리한다. 정보를 자르는 것, 판을 한 사람이 다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각자에게 대체 불가능한 몫을 주어 계속 바쁘게 만드는 것, 그리고 협력을 일부러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 배신자 역할은 마지막 갈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그러나 같은 글은 설계의 한계도 함께 짚는다. 발언을 막는 처방은 가장 확실한 만큼 가장 난폭하다. 테이블 토크는 많은 사람에게 보드게임의 본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계 바깥의 대응도 늘 함께 이야기된다. 규칙 설명을 끝까지 다 해 놓고 시작할 것, 매 라운드 실행 가능한 계획을 최소 두 개는 테이블에 올려 둘 것, 단정 대신 질문으로 말할 것. "이게 유일한 정답이야" 대신 "이게 될 것 같은데, 다른 길 보이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한 가지 더. 협력 게임은 원래 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몇 번의 시원한 패배를 함께 겪은 뒤에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온다. 남들이 실패할 기회를 뺏으면, 팀은 영원히 한 사람만큼만 잘하게 된다.

주어가 복수가 될 때
트와이스는 정보 제한이 알파 플레이어를 막아 주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것들이 하는 일은 협력 자체를 난이도로 만드는 것이다. 힌트를 짜내고, 암호처럼 말하고, 상대의 머릿속을 추론하는 일이 게임의 본체가 된다. 이 차이는 크다. 협력을 도구로 두면 가장 유능한 한 명이 그 도구를 독점하고, 협력을 과제로 두면 한 명으로는 애초에 풀 수가 없다.
'이겼다'의 주어가 개인에서 팀으로 옮겨 갈 때 재미의 구조도 바뀐다. 경쟁 게임에서 나의 실수는 나의 손해다. 협력 게임에서 나의 실수는 남의 턴을 망친다. 사갈의 논문이 꼽은 좋은 협력 게임의 조건 중 하나가 정확히 이것이었다. 플레이어는 결과를 자기 결정까지 되짚을 수 있어야 하고, 개인에게 좋은 수와 팀에게 좋은 수 사이의 긴장을 느껴야 한다. 갈등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자리를 옮겼다. 나와 너 사이에 있던 것이 나와 우리 사이로 들어온 것이다.
수천 년이 걸린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이기는 판을 만드는 건 쉽고, 함께 이기면서도 각자가 여전히 무언가를 결정하는 판을 만드는 건 어렵다. 다음에 협력 게임을 펼칠 때 한번 세어 보시길. 그 테이블에는 몇 개의 뇌가 켜져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