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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2026-08-2610분 읽기

도시의 밤: 어둠을 몰아낸 대가

가로등은 편의가 아니라 통치 장치였다

1667년 파리에 처음 매달린 가로등은 시민의 편의가 아니라 루이 14세가 만든 경찰총감의 관할이었다. 통행금지와 야경꾼에서 가스등과 문라이트 타워, 혁명기의 '가로등으로!'를 거쳐 오늘의 빛공해와 야간 노동까지 — 밤을 밝히는 일이 언제나 밤을 감시하는 일이었던 350년의 내력.

1667년 가을, 파리 거리에 낯선 물건이 걸렸다. 밧줄과 도르래에 매달린 유리 초롱이었다. 해가 지면 사람이 줄을 내려 심지에 불을 붙이고 다시 끌어올렸다. 그 초롱을 관리한 곳은 시청이 아니었다. 그해 3월 루이 14세가 새로 만든 자리, 초대 경찰총감 가브리엘 니콜라 드 라 레니의 소관이었다. 콜베르가 왕에게 올린 그 칙령은 거리와 교차로에 등을 설치하고 유지하라고 명하면서, 같은 문서 안에서 등을 부수거나 훔친 자를 무겁게 처벌하라고 못박았다. 도시를 밝히는 일과 도시를 단속하는 일은 처음부터 한 장의 종이 위에 있었다. 122년 뒤 파리 사람들이 바로 그 초롱줄에 사람을 매달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유였다.

밤은 오래도록 통치 바깥의 시간이었다

통행금지를 뜻하는 영어 curfew는 옛 프랑스어 couvre-feu, 곧 '불을 덮어라'에서 왔다. 정복왕 윌리엄이 저녁 8시 종소리에 맞춰 모든 불과 등을 꺼서 덮게 했다는 이야기가 그 어원에 붙어 있다. 명분은 화재였다. 목조 도시에서 잉걸불 하나는 마을 전체를 태웠으니까. 그런데 종이 울리면 불만 덮인 게 아니었다. 성문이 잠기고, 위험한 구역으로 통하는 길목이 막혔다.

잉글랜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1285년 윈체스터 법령은 야경 조직을 규정하면서 이른바 '밤길 걷는 자' 조항을 두었다. 해가 진 뒤 정당한 이유 없이 거리에 있는 사람은 붙잡아 조사할 수 있었다. 야경꾼들은 밤 아홉 시나 열 시부터 동틀 때까지 순찰하며 시각을 외치고 다녔다. 조선도 다르지 않았다. 밤 열 시 반 인정에 종이 울리면 통행이 끊겼고, 새벽 네 시 반 파루에 다시 풀렸다.

핵심은 조명이 아니라 혐의였다. 근대 이전의 도시에서 밤에 거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절반쯤 죄였다. 밤을 다스리는 방법은 단 하나, 사람들을 집 안에 가둬두는 것이었다. 예외는 축제뿐이어서, 조선에서도 정월 초하루와 대보름 밤에는 통행을 열어줬다. 일 년에 며칠, 국가가 밤을 잠깐 빌려주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방식은 사실 잘 작동하지 않았다. 야경꾼은 대개 늙었고 박봉이었고 졸았다. 그림과 희곡 속의 야경꾼은 거의 언제나 무능한 조연이다. 런던은 17세기 후반부터 무보수 의무였던 야경을 유급직으로 돌렸고 1737년 야경법으로 급료를 연 13파운드에 맞췄지만, 결국 1820년대에 로버트 필이 이 체계를 갈아엎고 1829년 수도경찰을 세우게 된다. 사람의 눈으로 밤을 지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다른 눈이 필요했다.

거대한 통금 종을 당겨 성문을 닫고 마지막 불씨에 덮개를 씌우는 장면
그림 1근대 이전에는 밤을 밝히기보다 사람을 집 안에 가두어 통치했음을 보여준다.

왕이 밤을 사들이다

1667년의 파리가 바꾼 것은 그 전략이다. 사람을 어둠에서 쫓아내는 대신, 어둠 자체를 걷어내기로 한 것이다. 라 레니는 1667년 3월부터 1697년 1월까지 30년간 파리 치안을 쥐고 등을 늘려나갔다. 17세기가 끝날 무렵 파리의 가로등은 2,700개를 넘었고, 1730년에는 약 5,400개로 두 배가 됐다.

이건 파리만의 일이 아니었다. 역사가 크레이그 코슬롭스키는 『저녁의 제국(Evening's Empire)』에서 1660년부터 1700년 사이 유럽 도시들이 거의 동시에 가로등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정리한다. 그가 붙인 이름은 '야간화'다. 궁정과 상인과 평민이 저마다의 이유로 밤 시간을 쓰기 시작했고, 국가는 그 밤에 관할권을 세웠다. 도시를 '평정'하고 통치를 어둠 속까지 연장하는 일. 조명은 그 도구였다.

거래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등이 켜진 만큼 사람들은 밤에 나올 수 있었다. 커피하우스가 밤늦게까지 열렸고, 극장이 저녁 공연을 붙였고, 정치적 대화가 낮의 광장에서 밤의 실내로 옮겨갔다. 밤에 대한 공포와 밤에 대한 기대가 같은 시기에 함께 자랐다. 다만 그 밤은 누군가 켜준 밤이었고, 켜준 쪽은 언제든 끌 수 있었다.

가로등은 어둠을 없애지 않았다. 어둠에 주소를 부여했다. 빛이 닿는 곳은 국가의 관할이 되었고, 빛이 닿지 않는 곳은 그때부터 비로소 '뒷골목'이 되었다.

도르래로 가로등을 올리며 빛이 닿는 바닥에 관할 도장을 찍는 장면
그림 2가로등이 편의가 아니라 경찰의 관할을 어둠까지 연장한 장치였음을 각인한다.

흔히 파리가 아름다워서 '빛의 도시'라지만

이 별칭의 내력은 생각보다 지저분하다. 백과사전들은 대체로 18세기 계몽의 시대를 가리킨다. 파리가 교육과 과학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빛의 도시'가 됐다는 설명이다. 다른 계보도 있다. 1877년 루브르 백화점에 러시아 기술자 파벨 야블로치코프가 만든 아크등 80개가 켜졌고, 이듬해 만국박람회 때는 오페라 대로와 오페라 광장에 램프 64개가 늘어섰다. 그 무렵부터 파리를 빛의 도시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느 쪽이든 '아름다워서'는 아니다. 그리고 훨씬 널리 퍼진 통념 하나가 더 있다. 가로등이 시민의 편의를 위해 생겼다는 믿음이다. 1667년 칙령을 다시 읽어보면 그것은 편의에 관한 문서가 아니라 치안에 관한 문서다. 등의 개수와 위치를 정한 사람은 주민이 아니라 경찰총감이었고, 등을 부순 자에게 매긴 형벌은 재물 손괴가 아니라 공권력 방해에 가까웠다. 밤길이 편해진 것은 결과였지 목적이 아니었다.

가스등이 하루를 늘렸다

윌리엄 머독은 1792년 콘월 레드루스의 자택에 가스등을 들였고, 1798년 소호 주조공장을, 1802년에는 공장 외벽을 밝혀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1807년 6월 4일 프레더릭 윈저가 런던 폴몰에서 가스 가로등을 공개 시연했다. 1810년 세워진 가스라이트앤코크사는 1812년 의회 특허를 받아 세계 최초의 가스 회사가 됐고, 1813년 마지막 날 웨스트민스터 다리에 불이 들어왔다. 볼티모어가 1816년, 파리가 1820년에 뒤를 이었다. 1817년 런던에서는 두 회사가 하루 25 콜드런의 석탄을 태워 8만 4천 개의 등에 가스를 댔다.

가스가 바꾼 것은 거리만이 아니다. 공장이었다. 등을 켜면 겨울에도 해가 진 뒤 몇 시간을 더 돌릴 수 있었고, 어떤 설비는 아예 멈추지 않았다. 노동시간은 해의 길이가 아니라 회계장부의 길이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볼프강 시벨부시가 『빛 잃은 밤(Disenchanted Night)』에서 19세기 조명의 산업화라 부른 것이 이것이다. 밤이 사람에게 열린 게 아니라, 낮이 밤을 삼켰다.

미국은 더 노골적이었다. 1880년대 도시들은 50미터가 넘는 '문라이트 타워'를 세워 몇 블록을 한꺼번에 비췄다. 1882년 디트로이트는 53미터 탑 122기를 300~360미터 간격으로 박아 도심 21제곱마일을 덮었고, 1895년 오스틴의 탑은 아크등 여섯 개로 반경 460미터 안에서 손목시계를 읽을 만큼 밝았다. 인공 달을 만들어 도시 위에 매달겠다는 발상이었다. 물론 잘 되진 않았다. 1883년 미니애폴리스의 탑은 그림자만 짙게 만들 뿐 정작 길바닥을 못 비춰서 1892년 철거됐다.

가스등 아래에서 작은 해 모양 시간 조각을 공장 반죽기에 밀어 넣어 긴 작업띠를 뽑는 장면
그림 3가스등이 자유 시간을 늘린 동시에 노동을 해의 길이에서 분리했음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 등을 부쉈다

1789년 여름 파리에서 가장 자주 들린 말은 "아 라 랑테른!"이었다. 가로등으로! 그레브 광장과 바느리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의 가로등이 그 무대였다. 시청 정면, 루이 14세의 흉상 바로 아래. 왕의 눈앞에서 민중의 재판이 집행되도록 고른 자리였다. 7월 22일 재무총감 조제프 풀롱 드 두에가 여기 매달렸다. 밧줄이 끊어지자 군중은 그의 목을 베어 창끝에 꽂았고, 같은 날 그의 사위 베르티에 드 소비니가 뒤를 따랐다. 혁명가 '사 이라'는 귀족을 가로등으로 보내자고 노래했다.

우연이 아니다. 그 등을 세운 것이 왕의 경찰이었기 때문에, 그 등에 왕의 사람을 매다는 것이 문장이 됐다. 이후 유럽의 봉기마다 가로등은 가장 먼저 깨지는 물건이었다. 시벨부시가 19세기 조명사를 쓰면서 가로등의 정치적 상징성을 따로 한 장으로 다룬 이유가 여기 있다. 폭도의 무의미한 파괴로 기록된 장면들은 대개 그렇게 무의미하지 않았다.

군중이 가로등을 깨뜨릴 때 그들이 깬 것은 조명이 아니었다. 자기를 내려다보던 눈이었다.

어둠이라는, 사라진 공유지

우리는 이겼다. 2016년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실린 인공 밤하늘 밝기 세계 지도는 결과를 이렇게 적었다. 세계 인구의 약 83퍼센트가 인공광으로 밝아진 하늘 아래 산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비율이 99퍼센트를 넘는다. 인류의 3분의 1 이상이 은하수를 볼 수 없고, 유럽인은 60퍼센트, 북미인은 약 80퍼센트가 그렇다. 싱가포르에서는 국민 전체가 눈의 암순응이 시작되지도 못하는 밝기 아래 산다.

대가는 하늘만이 아니다. 국제암연구소는 2019년 야간 교대근무를 인체 발암 추정 물질군인 2군 A로 재확인했고, 그 평가는 단행본 124권으로 묶여 나왔다. 밤에 일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 요인이라는 뜻이다. 라 레니의 초롱에서 시작된 선을 끝까지 그으면 편의점 야간 근무자의 형광등에 닿는다.

한국의 밤도 이 선 위에 있다. 1945년 9월 7일 미군정 포고로 시작된 야간 통행금지는 처음엔 저녁 여덟 시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였고, 1961년 이후 자정부터 새벽 네 시까지로 굳어졌다. 부처님 오신 날과 성탄절과 12월 31일 밤에만 예외적으로 풀렸다. 조선의 대보름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이 제도는 1982년 1월 5일 대부분 지역에서 폐지됐고, 일부 지역에 남아 있던 통금까지 완전히 풀린 것은 1988년 1월 1일이었다. 그날 이후의 밤은 자유의 밤이었을까. 통금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24시간 영업과 심야 잔업과 새벽 배송이었다. 국가가 밤을 놓자 시장이 밤을 가져갔다.

가로등은 분명 사람을 살렸다. 어두운 골목에서 맞아 죽는 일을 줄였고, 밤에 책을 읽게 했고, 여자들이 밤에 걸을 수 있게 했다. 그 공을 깎을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는 어둠을 몰아내면서 어둠이 무엇을 지켜주고 있었는지 한 번도 계산해본 적이 없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시간,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는 시간, 하늘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

당신이 마지막으로 진짜 어두운 곳에 서 있던 게 언제인가. 그리고 그때, 무서웠는가 아니면 오랜만이었는가.

별이 박힌 밤 천을 회수하려 하지만 24시간 컨베이어가 반대편에서 천을 빨아들이는 장면
그림 4통금이 사라진 밤이 자유가 아니라 24시간 영업에 점유됐음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