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가 자동차를 낳았다 — 부품과 도로를 먼저 만든 기계
부품과 도로를 먼저 만든 기계
자전거는 자동차에 밀려난 구식 탈것이 아니라 그 앞에 놓인 어머니였다. 공기 타이어와 체인 구동, 차동 기어와 강관 프레임, 전기 저항 용접과 스탬핑 금형이 자전거 공장에서 다듬어져 자동차 공장으로 넘어갔다. 무엇보다 진흙탕 대신 포장도로를 요구하는 정치를 20년 앞서 만든 쪽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었다. 1817년 나무 기계에서 1885년 로버 세이프티, 1890년대 붐과 붕괴까지 순서를 다시 세워본다.
말이 굶어 죽던 해에, 말을 대신할 기계가 나왔다.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이 터지고 이듬해 유럽의 여름은 오지 않았다. 귀리가 흉작이었고, 귀리를 먹는 짐승이 먼저 쓰러졌다. 1817년 여름 독일 만하임 근교에서 카를 폰 드라이스가 나무로 만든 두 바퀴 기계를 몰고 나온 것이 그 직후다. 페달도 체인도 없이 두 발로 땅을 차서 굴리는 물건이었고, 그는 광고문에 "비가 온 직후에도 걷는 속도의 두 배"라고 적었다. 말 부족이 발명의 동기였다는 설명은 여러 자료가 되풀이하지만, 정작 이를 확실히 못 박은 사료는 없다. 확실한 건 결과 쪽이다. 그날 이후 사람은 자기 몸의 힘만으로 걷는 것보다 빨리 갈 수 있는 개인용 기계를 처음 가졌다.
앞바퀴를 키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던 시절
드라이지네는 유행하다 금지당하고 잊혔다. 반세기 뒤 파리의 미쇼 공방에서 다시 시작된다. 1860년대의 벨로시페드는 앞바퀴 축에 크랭크와 페달을 직접 붙인 물건이었다. 체인은 없었다. 페달을 한 바퀴 돌리면 바퀴도 딱 한 바퀴 돌았다는 뜻이고, 그래서 속도를 올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바퀴를 키우는 것.
그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간 결과가 1870~80년대의 하이휠, 흔히 페니파딩이라 불린 기계다. 앞바퀴 지름이 성인 키에 육박했고 안장은 1.2미터 위에 있었다. 빨랐지만 앞으로 고꾸라지면 머리부터 떨어졌다. 자전거는 이 시기 내내 젊고 대담한 남자의 스포츠 장비였지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다리가 짧으면 탈 수 없고, 치마를 입으면 탈 수 없고, 짐을 실을 수도 없었다. 통념과 달리 자전거의 역사는 매끄러운 개량의 직선이 아니라, 한 번 막다른 길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온 곡선이다.

1885년, 자전거가 지금의 자전거가 된 해
되돌아 나오는 열쇠는 체인이었다. 1885년 코번트리의 존 켐프 스탈리가 내놓은 로버 세이프티는 앞뒤 바퀴 크기를 같게 줄이고, 프레임 가운데 놓인 크랭크에서 뒷바퀴까지 체인으로 힘을 보냈다. 이 배치의 진짜 의미는 안전이 아니라 기어비를 바퀴 지름에서 떼어냈다는 데 있다. 앞뒤 스프로킷 잇수만 바꾸면 작은 바퀴로도 빠르게 갈 수 있었다. 바퀴는 이제 속도를 담당하지 않아도 되었고, 대신 지면을 견디는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3년 뒤 벨파스트의 수의사 존 보이드 던롭이 아들의 세발자전거에 고무 튜브를 감고 바람을 넣었다. 1888년의 공기 타이어다. 다만 최초는 아니었다. 이미 1845년 로버트 윌리엄 톰슨이 같은 원리를 특허로 냈고, 실제로 영국 마차에 끼워 2천 킬로미터 가까이 굴려보기까지 했다. 다만 그 시절 생고무 값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아 묻혔을 뿐이다. 톰슨이 프랑스와 미국에도 등록해두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던롭의 특허는 1890년 무효가 된다. 던롭이 한 일은 발명이 아니라 실용화였다. 이 구분은 앞으로 계속 나온다.
작은 바퀴에 공기 타이어를 물린 조합은 단순한 승차감 개선이 아니었다. 하이휠이 큰 바퀴로 노면 충격을 흘려보내던 방식을 공기층이 대신 떠맡으면서, 자전거는 비로소 나쁜 길 위를 오래 달릴 수 있는 물건이 됐다. 프레임과 바퀴와 접지면의 역할 분담, 즉 오늘날 자동차 섀시가 하는 일의 원형이 여기서 정리된다.

자전거가 한 일은 발명이 아니라 산업화였다
자전거가 자동차에 물려준 부품 목록을 두고 흔히 "자전거가 볼베어링을 발명했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정확하지 않다. 볼베어링도 차동 기어의 원리도 자전거보다 수십 년 앞서 특허가 나와 있었다. 자전거 산업이 한 일은 다른 쪽이다. 그 부품들을 싸게, 정밀하게, 수십만 개 단위로 만들 수 있는 물건으로 바꿔놓았다.
계보를 짚으면 이렇다. 1877년 제임스 스탈리는 자신의 살보 세발자전거에 차동 기어를 얹었다. 좌우 바퀴가 다른 속도로 돌아야 부드럽게 돌 수 있다는 문제를 푼 이 장치가, 자동차 뒤차축으로 그대로 내려간다. 1870년대 중반의 접선 스포크는 얇은 강선을 당겨 하중을 버티는 바퀴를 만들었고, 이음매 없는 강관 프레임은 가볍고 단단한 뼈대를 어떻게 짜는지 보여줬다. 여기에 공기 타이어와 체인 구동을 더하면, 초기 자동차의 하체는 사실상 자전거 부품표다.

더 결정적인 건 부품이 아니라 공정 쪽이었다. 1886년 일라이후 톰슨이 내놓은 전기 저항 용접을 일찍부터 대량으로 끌어다 쓴 곳이 자전거 공장이었고, 강판을 눌러 찍는 스탬핑 금형도 이 업계에서 다듬어졌다. 무기고에서 시작된 호환 부품 생산 방식이 자전거를 거쳐 자동차 공장으로 넘어갔다는 것이 제조사(史) 연구의 표준 서술이다. 자동차 회사가 물려받은 것은 도면이 아니라 공작기계와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길을 내놓으라고 먼저 요구한 쪽
그런데 부품보다 더 크게 물려준 것이 있다. 포장도로다.
1880년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에서 앨버트 포프가 31개 자전거 클럽을 불러 모아 미국휠맨연맹을 만들었다. 이들은 단순한 동호회가 아니라 압력단체였다. 도로 개선을 요구하는 전단을 500만 부 가까이 뿌렸고, 1892년에는 《굿 로드》라는 잡지를 창간해 3년 만에 독자 100만 명을 확보했다. 요구는 소박하면서 급진적이었다. 진흙탕 말고 굴러갈 수 있는 바닥을 달라는 것.
당시 미국 도로가 어땠는지는 숫자가 말해준다. 1904년 연방이 처음으로 전국 도로를 조사했을 때, 시골 공공도로 215만 마일 가운데 199만 마일, 약 93퍼센트가 그냥 흙길이었다. 자갈이든 쇄석이든 무언가 깔린 길은 7퍼센트에 불과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로비는 1893년 농무부 산하 도로조사국 설치로 이어졌고, 도시 자전거족과 농촌 농민·우편배달부의 기묘한 연합으로 번져 1916년 연방도로지원법까지 닿는다.
자동차가 먼저 있고 도로가 따라온 게 아니다. 도로를 요구하는 정치가 먼저 있었고, 그 위로 자동차가 굴러들어왔다. 자동차 산업은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20년 걸려 만든 정치적 기반시설을 무상으로 상속받은 셈이다. 왜 자전거였는지도 분명하다. 마차는 흙길과 진창을 어떻게든 견디도록 만들어진 물건이었지만, 얇은 타이어로 지면에 몇 제곱센티미터만 닿는 자전거는 노면 상태가 곧 주행 가능 여부였다. 길이 나쁘면 못 간다는 사실을 몸으로 가장 먼저 겪은 쪽이 가장 먼저 정치에 나섰다.

블루머와 '자전거 얼굴' 사이에서
세이프티 자전거는 치마를 입은 사람도 탈 수 있는 최초의 자전거였다. 1896년 2월 2일 《뉴욕 월드》에서 넬리 블라이와 마주 앉은 수전 B. 앤서니는 이렇게 말했다.
자전거에 대해 말씀드리죠. 자전거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여성이 바퀴를 타고 지나가는 걸 볼 때마다 저는 기뻐서 자리에 멈춰 섭니다. 자전거는 여성에게 자유와 자립의 감각을 줍니다.
같은 시기 지면의 다른 쪽에서는 정반대 이야기가 실렸다. 영국 의사 아서 섀드웰이 명명한 '자전거 얼굴'은 균형을 잡느라 긴장한 표정이 굳어 얼굴이 망가진다는 진단이었고, 아라벨라 키닐리 같은 의사는 격한 라이딩이 여성을 불임으로 만든다고 경고했다. 자전거 심장, 자전거 굽은등, 자전거 목까지 병명이 줄줄이 붙었다.
이 경고들을 설득력 있게 만든 것은 근거가 아니라 권위였다. 의학의 언어를 빌렸고, 신문이 검증 없이 옮겼고, 자주 반복되었다.
복장도 같은 전선이었다. 안장 위에서 긴 치마는 위험했으므로 여성들은 무릎 아래를 여미는 헐렁한 바지, 블루머를 입기 시작했다. 치마 밑에 받쳐 입는 정도였는데도 반대하는 쪽에는 그것이 바지로 보였다. 자전거를 타면 보호자 없이 나갈 수 있고, 약속 장소를 스스로 정할 수 있고, 주일 예배를 빠질 수도 있다는 것 — 진짜 쟁점은 그쪽에 있었다. 블루머를 입고 페달을 밟는 일이 왜 진단서를 받아야 했는지를 보면, 논쟁의 실체가 건강이 아니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러니 "자전거가 여성을 해방시켰다"는 문장은 결론이 아니라 당대의 격렬한 논쟁 중 한쪽 진영의 주장이었다. 다만 그 주장을 한 사람들은 이미 안장 위에 있었다.
붐이 꺼진 자리에서 무엇이 굴러 나왔나
미국의 자전거 생산은 1890년 약 3만 대에서 1892년 6만 대, 1894년 10만 대, 1896년 40만 대를 넘겼고 1898~99년에는 연 90만 대를 찍었다. 제조사는 300곳을 넘었다. 가격 기록은 자료마다 어긋난다. 1880년대 하이휠이 100~150달러로 노동자 6개월치 임금이었다는 기술이 있는가 하면, 1890년대 세이프티는 한두 달치 임금이었다는 기술도 있다. 어느 쪽이든 방향은 같다. 값은 계속 떨어졌고 1898년 미니애폴리스 광고에는 30달러짜리가 실렸다.
그리고 무너졌다. 과잉 생산과 출혈 경쟁 끝에 1897년 오버맨은 50만 달러 넘는 빚을 지고 공장을 닫았고, 1899년 수십 개 회사가 아메리칸 바이시클 컴퍼니로 통합됐다. 흔히 "자동차가 자전거를 밀어냈다"고 요약되는 장면인데, 실제로 벌어진 일은 이동이었다. 로버는 1904년 자동차를 내놨고, 푸조와 오펠은 자전거를 만들다 차로 넘어갔으며, 자전거 판매상 존 윌리스는 훗날 지프를 만들 회사의 주인이 된다. 미국 첫 가솔린 자동차를 굴린 듀리에이 형제도 자전거 제작자 출신이었다.
오하이오 데이턴에서 자전거 가게를 하던 형제도 있었다. 1896년 자기 브랜드 '반클리브'를 직접 조립해 팔던 이들은 1899년 여름 가게에서 타이어 튜브 상자를 무심코 비틀다가 날개를 비틀어 기체를 기울인다는 착상을 얻는다. 1903년 플라이어를 보면 출신이 보인다. 스포크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와이어 버팀줄, 강관으로 짠 프레임, 엔진에서 프로펠러로 힘을 보내는 체인. 라이트 형제가 자전거포 주인이었던 것은 전기(傳記)적 우연이 아니라 기술적 필연에 가깝다.

자전거는 자동차 이전의 임시방편이 아니었다. 부품과 공정과 도로를 먼저 만들어 넘겨준 쪽이었고, 그러고도 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굴러다닌다. 지금 우리가 낡았다고 여기는 것들 중에, 실은 다음 것을 낳아놓고 자리를 비켜준 것은 또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