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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윤리]2026-09-0810분 읽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진 빚 — 미래 세대에 대한 의무는 어디서 무너지는가

미래 세대에 대한 의무는 어디서 무너지는가

기후, 핵폐기물, 국가부채는 모두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의무를 질 수 있다는 전제다. 그런데 데릭 파핏의 비동일성 문제를 통과하고 나면 그 전제가 딛고 선 바닥이 사라진다. 10만 년을 버티도록 설계된 핀란드 온칼로의 봉인된 터널에서 출발해, 파핏이 무엇을 진단했고 무엇을 끝내 쓰지 못했는지 따라간다.

핀란드 서해안 에우라요키, 올킬루오토 섬의 숲 아래 400미터가 넘는 깊이에 터널이 뚫려 있다. 선캄브리아기 암반을 파고 내려간 그 구멍의 이름은 온칼로, 핀란드어로 '동굴' 혹은 '움푹 팬 곳'이라는 뜻이다. 사용후핵연료는 금속 용기에 담기고, 용기는 구리 캡슐에 봉인되고, 캡슐은 벤토나이트 점토에 감싸여 암반 깊숙이 놓인다. 처분이 끝나면 터널은 되메워지고 봉인되고, 지표는 다시 평범한 침엽수림으로 돌아간다. 이 설계가 상정하는 시간은 10만 년이다. 그게 핵연료의 반감기라서가 아니라, 그쯤 지나면 방사능 독성이 애초에 캐냈던 우라늄 광석 수준까지 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류가 문자를 쓰기 시작한 지는 5천 년 남짓이다. 온칼로가 상대하는 시간은 그 스무 배다. 우리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존재를 위해 구리를 두르고 점토를 채우고 있다. 왜?

이 장소는 명예로운 곳이 아니다

미국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뉴멕시코의 핵폐기물 격리 시범시설(WIPP)을 두고 1990년대 초 샌디아 국립연구소가 소집한 전문가 패널은 1만 년 뒤 사람에게 "여기를 파지 마라"를 어떻게 전달할지를 진지하게 설계했다. 사막 바닥에서 솟구친 콘크리트 가시밭, 거대한 화강암 스파이크, 뭉크의 절규를 새긴 판, 여러 언어와 그림문자를 겹겹이 쌓은 경고문. 그중 가장 유명한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장소는 명예로운 곳이 아니다. 여기에는 기려야 할 어떤 위대한 업적도 기념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 가치 있는 것은 없다.

패널의 상상은 더 멀리도 갔다. 경고를 종교 의례로 만들어 대대로 전승시키자는 원자 사제단, 방사선에 반응해 털빛이 변하는 고양이를 만들고 "고양이가 빛나면 달아나라"는 속담을 함께 퍼뜨리자는 레이 캣. 우스꽝스럽게 들리지만 깔린 전제는 냉정하다. 어떤 기호 체계도, 어떤 문서고도, 어떤 제도도 수만 년을 버티지 못한다.

dkdk가 여러 모양의 경고 표지를 세워 보지만 글자가 바람에 지워져 가고, 대신 두껍고 무거운 돌 뚜껑을 끌어와 구멍 위에 덮는다
그림 1어떤 기호 체계도, 어떤 문서고도, 어떤 제도도 수만 년을 버티지 못한다

핀란드의 답은 정반대다. 온칼로에는 지상 표지를 세울 계획이 없다. 보도된 설명에 따르면 이유는 단순하다. 표지는 사람을 쫓기보다 끌어들일 확률이 높다. 봉인하고 잊히게 두는 편이, 여기 대단한 것이 묻혀 있다고 광고하는 것보다 안전하다. 애초에 이 설계의 안전성은 미래 인간이 메시지를 제대로 수신한다는 가정에 기대지 않는다. 구리와 점토와 암반이 알아서 버텨야 한다.

기억시킬 것인가, 잊게 할 것인가. 두 문명이 같은 문제 앞에서 정반대 답을 냈다. 그런데 이 논쟁은 훨씬 앞선 질문 하나를 건너뛰고 있다. 우리는 대체 왜 10만 년 뒤 사람에게 무언가를 빚지는가.

파핏이 놓아둔 덫

"미래 세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은 도덕적 상식처럼 들린다. 그런데 1984년 데릭 파핏이 『이유와 인격』(Reasons and Persons)에서 꺼낸 논증을 통과하고 나면, 그 상식이 딛고 선 바닥이 사라진다.

파핏은 두 정책을 나란히 놓는다. 보존과 고갈. 고갈을 택하면 앞으로 두 세기 동안 삶의 질이 조금 높아지지만, 그 뒤 수백 년간의 삶은 보존을 택했을 때보다 훨씬 나빠진다. 직관은 명확하다. 고갈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잘못인가.

dkdk가 손해배상 청구서를 들고 수취인 칸 앞에 섰는데, 그 칸이 텅 비어 있고 그 너머는 그냥 흰 공백이다
그림 2고갈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잘못인가

여기서 파핏은 인격 동일성의 취약함을 들이민다. 누가 태어나는지는 어느 정자와 어느 난자가 만났는지에 달렸고, 그것은 부모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만났는지에 달렸다. 사회 정책은 사람들의 직업과 이동과 만남을 바꾼다. 몇 세대만 지나면 고갈 아래 태어난 인구와 보존 아래 태어났을 인구는 사실상 겹치지 않는다. 파핏은 부모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궁금해하는 여성을 예로 든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아무도 아니다.

그러니 300년 뒤 황폐해진 세계에 사는 사람은 우리의 고갈 정책 때문에 더 나빠진 것이 아니다. 그 정책이 없었다면 그는 애초에 없었다. 그의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한, 그는 우리에게 항의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잘못은 분명히 저질러졌는데 피해자가 없다. 이것이 비동일성 문제다. 파핏은 같은 구조를 자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출생에서도 끌어낸다. 너무 이른 나이에 아이를 갖기로 한 소녀의 선택이 잘못이라 해도, 그 아이는 소녀가 기다렸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아이다.

그가 답한 것과 답하지 못한 것

이 지점에서 파핏을 잘못 인용하는 사람이 많다. 그는 미래 세대에게 아무 의무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무너뜨린 것은 우리 도덕 직관의 밑돌 하나다. 나쁜 것은 누군가에게 나빠야 한다는 원리, 인격 영향 원리. 파핏은 고갈이 잘못이라는 판단을 지키고 대신 이 원리를 버려야 한다고 봤다. 잘못됨을 피해자에게서 찾지 말고 결과 자체의 비인격적 나쁨에서 찾자는 것이다. 누가 존재하든 상관없이, 더 나쁜 삶들로 채워진 미래는 그냥 더 나쁘다.

문제는 이 교체가 곧바로 다음 함정으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비인격적으로 총합을 따지기 시작하면, 훌륭한 삶을 사는 100억 명보다 겨우 살 만한 삶을 사는 100조 명이 더 낫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파핏은 이것을 혐오스러운 결론이라 부르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비동일성 문제와 혐오스러운 결론을 동시에 피하는 이론에 X 이론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끝내 그것을 쓰지 못한 채 2017년 세상을 떠났다.

정리하면 이렇다. 파핏이 해낸 것은 진단이다. 우리의 미래 세대 도덕이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무너지는지 보여줬다. 해내지 못한 것은 처방이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X 이론은 없다.

dkdk가 책장에 두꺼운 이론서들이 빼곡한데 X라고만 적힌 칸 하나가 비어 있고, 그 빈칸에 손을 넣어 더듬는다
그림 340년이 지난 지금도 X 이론은 없다

그 빈칸을 메우려는 시도는 이어졌고, 각각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잃었다.

가장 단순한 길은 총알을 무는 것이다. 인격 영향 원리를 지키고 직관을 버린다. 고갈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으니 잘못이 아니라고. 논리적으로는 깔끔하다. 대가는 크다. 같은 논리가 아이를 낳아 노예로 넘기는 계약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권리 기반 접근은 비교 자체를 포기한다. 더 나빠졌는지 묻는 대신, 어떤 최소 기준 아래로 태어나게 만드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 대한 침해라고 본다. 문턱 개념의 해악이다. 직관은 되살아나지만 두 갈래로 샌다. 하나, 당사자가 자기 존재를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반긴다면 침해라는 말이 성립하는가. 둘, 이 기준을 밀고 나가면 열악한 조건에 놓인 부모의 출산 대부분이 권리 침해가 된다.

집합적 해악을 말하는 쪽은 개인 대 개인의 구도를 버린다. 내 배기가스가 특정 미래인을 해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수십억 명의 행위가 합쳐져 만든 결과는 분명한 해악이라고. 원인이 분산된 문제에는 잘 맞는다. 다만 그 해악의 책임을 누가 얼마나 지는지로 넘어가면 다시 흐려진다.

행위자 중심 접근은 시선을 결과에서 태도로 옮긴다. 미래 사람의 이익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비동일성 논증은 결과를 겨냥하므로 이 우회로에는 닿지 않는다. 대신 이상한 결론이 남는다. 충분히 숙고했다면 같은 결과를 낳아도 잘못이 아니게 된다.

0.1퍼센트를 둘러싼 싸움

이 추상적 논쟁이 숫자 하나로 응결되는 자리가 있다. 할인율이다.

100년 뒤의 피해를 오늘 얼마로 계산할 것인가. 2006년 스턴 보고서는 순수 시간선호율을 0.1퍼센트로 놓았다. 미래 사람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그전에 사라질 확률만큼만 깎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나온 소비 할인율이 약 1.4퍼센트, 그리고 강력하고 즉각적인 감축이라는 정책 결론이 따라 나왔다. 태어난 날짜로 사람을 차별할 수 없다는 전제가 이 숫자의 뿌리다.

윌리엄 노드하우스는 2007년 『경제학 문헌 저널』 서평에서 정면으로 반박했다. 요지는 미래 사람이 덜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정책 평가는 자본의 실제 기회비용을 반영해야 하고, 0에 가까운 시간선호율은 어떤 사회도 실제로 택한 적 없는 저축률을 함의한다는 것이다. 그는 보고서의 결론이 0에 가까운 시간 할인율과 특정 효용함수라는 가정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고 썼다.

중요한 건 누가 옳으냐가 아니다. 어느 쪽도 데이터에서 답을 끌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턴은 세대 간 공평이라는 도덕 전제에서, 노드하우스는 관찰된 시장 행동이라는 기술적 기준에서 출발했고, 결론의 차이는 대부분 출발점의 차이다. 국가부채 논쟁의 구조도 같다. 오늘의 지출이 미래 세대에게 떠넘기는 부담인지 미래 세대가 물려받을 자산을 만드는 투자인지는, 어떤 할인 전제와 어떤 세대 간 공평 개념을 깔았느냐에 따라 갈린다. 숫자로 보이는 것의 상당 부분은 사실 도덕 전제다.

dkdk가 아주 작은 다이얼을 손끝으로 아주 조금 돌리자, 저 멀리 반대편에 놓인 커다란 저울이 크게 기운다
그림 4숫자로 보이는 것의 상당 부분은 사실 도덕 전제다

표를 갖지 못한 유권자

제도는 이 공백을 다르게 메우려 했다. 미래 세대에게 표가 없다면 대신 말할 자리를 만들자는 것이다.

dkdk가 회의 탁자 끝에 빈 의자를 하나 끌어다 놓고, 그 앞에 아무 이름도 적히지 않은 이름표를 세운다
그림 5미래 세대에게 표가 없다면 대신 말할 자리를 만들자는 것이다

가장 멀리 간 곳은 웨일스다. 2015년 미래세대웰빙법은 번영하는 웨일스, 회복력 있는 웨일스, 세계에 책임을 다하는 웨일스를 포함한 일곱 개 웰빙 목표를 세우고, 공공기관에 장기적 영향을 고려할 의무를 지우고, 미래세대 커미셔너라는 독립 직위를 만들었다. 헝가리는 2007년 미래세대 옴부즈맨을 두었다가 2011년 개편에서 기본권 커미셔너 산하 부커미셔너로 흡수했다. 이스라엘은 2001년 크네세트에 미래세대 위원회를 두었으나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으면서 한 회기 만에 사라졌다.

성적표는 냉정하다. 웨일스 법을 검토한 법학 연구들은 이 법이 사실상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한 판사는 이 법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고 일반적이며 열망적인 고차원 목표 의무를 규정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커미셔너는 검토하고 권고할 수 있을 뿐 결정을 막지 못한다. 미래 세대는 여전히 법정에 설 수 없다. 파핏이 남긴 빈칸은 법전에서도 비어 있는 셈이다.

봉인된 터널 안에 함께 묻히는 것

다시 온칼로로 돌아가자. 그 안에 담기는 것은 폐기물만이 아니다. 우리가 답하지 못한 질문 하나가 같이 묻힌다.

우리가 구리 캡슐을 그토록 정교하게 만드는 이유는 10만 년 뒤 누군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서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존재할 수도 아예 다른 사람일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는 우리에게 항의할 자격조차 불분명한 상대다. 그런데도 우리는 수억 년을 버텨온 암반을 파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답에 가장 가까운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유를 대지 못한 채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논증은 아직 빈칸인데 손이 먼저 움직인다. 이유 없이 지켜지고 있는 이 빚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