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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2026-08-1111분 읽기

번역, 언어의 강을 건너는 기술

로제타석에서 기계번역까지 — 단어가 아니라 세계관을 옮긴 사람들

완벽한 번역은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이 신성문자를 되살리고, 성서를 만인의 손에 쥐여주고, 종교와 과학과 권력을 대륙 너머로 실어 날랐다. 번역은 뜻을 옮기는 통로가 아니라, 뜻을 새로 짓는 행위였다.

1799년 여름, 나일강 하구의 낡은 요새를 보수하던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검은 돌판 하나를 파냈다. 표면에는 세 종류의 글자가 위아래로 새겨져 있었다. 맨 위는 신들의 문자라 불린 신성문자, 가운데는 이집트인이 일상에서 쓰던 민중문자, 맨 아래는 그리스 문자였다. 내용은 놀랄 만큼 세속적이다. 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기리며 사제단이 내린 포고문 — 세금 감면과 신전에 대한 예우를 약속하는 행정 문서였다. 그러나 이 평범한 돌이 인류가 1400년 넘게 읽지 못했던 문명 하나를 통째로 되살렸다. 열쇠는 단 하나, 같은 말이 세 언어로 나란히 적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로제타석 — 나란히 적힌 세 개의 세계

신성문자가 죽은 문자가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이집트가 로마와 기독교의 세계로 편입되고 옛 신전이 문을 닫으면서, 사제들만 다루던 그 글자를 읽을 사람이 하나둘 사라졌다. 마지막 신성문자 비문이 새겨진 뒤로 1400년 넘게, 벽과 파피루스를 뒤덮은 그 그림들은 아름답지만 뜻 모를 무늬로 남아 있었다. 그리스어는 유럽 학자들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위쪽의 신성문자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면, 대조를 통해 잠긴 문을 열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신성문자가 그림인지 소리인지조차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국의 박식가 토머스 영은 1819년 몇 개 기호의 음가를 조심스레 제안하며 물꼬를 텄다. 결정적 도약은 프랑스의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에게서 나왔다. 1822년 9월, 그는 왕의 이름을 감싼 타원형 테두리 안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소리값을 짚어냈고, 신성문자가 소리와 뜻과 분류 기호가 뒤섞인 체계임을 밝혔다. 누가 먼저 열쇠를 쥐었느냐를 두고 두 사람과 두 나라는 오래 다투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 열쇠가 결국 하나의 번역이었다는 사실이다.

한 문명의 목소리가 침묵에서 풀려난 순간이었다. 여기서 번역은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다리다. 다리가 없으면 세계는 그저 벙어리로 남는다. 로제타석이 알려주는 첫 번째 진실은 단순하다. 우리가 아는 고대의 상당 부분은 누군가 옆 나라 말로 같은 것을 한 번 더 적어둔 덕분에 살아남았다.

세 문자가 새겨진 돌이 해독의 문을 여는 장면
그림 1병렬 텍스트가 미지의 문자를 푸는 열쇠가 된 과정을 보여준다.

70인역 — 번역이 신학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번역은 그저 뜻을 실어 나르는 중립적 통로일까.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그 물음의 답이 갈렸다. 그리스어를 모어로 쓰게 된 이집트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히브리어 성서를 읽지 못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는 옛 문헌은 신화 같은 장면을 전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여섯 명씩, 일흔두 명의 학자를 불러 번역을 맡겼고, 서로 떨어져 작업한 이들이 내놓은 원고가 글자 하나까지 똑같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70인역'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물론 실제로는 한 세기에 걸쳐 여러 손이 나누어 옮긴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겨냥한 바는 분명하다. 번역이 신의 뜻만큼이나 오류 없는 권위를 지녀야 한다는 요청이다.

그리고 바로 그 옮기는 과정에서 새로운 뜻이 태어났다. 이사야서 7장 14절의 히브리어 '알마'는 결혼할 나이의 젊은 여자를 뜻한다. 처녀성 여부는 담고 있지 않다. 70인역은 이를 그리스어 '파르테노스', 곧 처녀로 옮겼다. 훗날 마태복음이 이 그리스어 구절을 예언으로 인용하면서, 단어 하나의 선택은 동정녀 잉태라는 교리의 씨앗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인 대다수가 히브리어 원전이 아니라 이 그리스어 번역을 성서로 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무게는 한층 무거워진다. 한 세계의 경전이 다른 언어로 건너가는 동안, 원문에 없던 의미가 슬며시 자라나 신앙의 골격이 된 것이다.

번역가는 뜻을 옮긴다고 믿지만, 실은 뜻을 새로 짓는다. 단어 하나를 고르는 순간 이미 하나의 해석이, 때로는 하나의 세계관이 함께 실린다.

번역문에서 새로운 신학적 가지가 자라는 장면
그림 2번역 선택이 사상의 방향까지 바꿀 수 있음을 설명한다.

틴들의 불 — 모국어로 옮긴 죄

번역이 뜻을 짓는 행위라면, 그 힘을 누가 쥐느냐는 곧 권력의 문제가 된다. 16세기 유럽에서 성서는 라틴어 불가타 안에 갇혀 있었다. 라틴어를 모르는 평신도는 사제가 풀어주는 뜻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교회의 권위는 바로 그 독점 위에 서 있었다.

윌리엄 틴들은 그 벽을 무너뜨렸다. 그는 라틴어 성서를 다시 옮긴 것이 아니라, 에라스뮈스가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과 히브리어 원전에서 곧장 영어로 번역했다. 원전으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교회의 중개를 건너뛰는 도발이었다. 인쇄된 최초의 영어 신약은 1만 부 넘게 바다를 건너 밀반입되었다. 그가 '교회' 대신 '회중', '사제' 대신 '장로'를 택한 것 같은 낱말 하나하나가 위계질서를 흔들었기에, 그는 단순한 번역가가 아니라 위험인물이었다. 1536년, 틴들은 브뤼셀 인근 빌보르데에서 목 졸려 죽은 뒤 불태워졌다. 마지막 말은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였다. 불과 3년 뒤 영국 왕실이 공인한 영어 성서가 나왔고, 오늘날 흠정역의 상당 부분은 틴들이 벼려낸 문장 그대로다.

틴들이 벼려낸 표현들은 지금도 영어 안에 살아 있다.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처럼 오늘날 사람들이 무심코 인용하는 문장 상당수가 실은 성서를 옮기던 그의 손끝에서 처음 주조되었다. 한 사람의 번역가가 언어 자체의 결을 바꿔놓은 셈이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도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서 곧장 독일어로 성서를 옮겼다. 인쇄기가 이를 실어 날라 한 출판사에서만 수만 부가 풀렸고, 흩어져 있던 독일어 방언은 하나의 표준으로 수렴했으며, 종교개혁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성서를 사제의 손에서 빼내 모두의 손에 쥐여주는 순간, 누구의 해석이 옳은지를 각자 따질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곧 교회 독점의 종말을 뜻했다. 흔히 성서 번역을 경건한 전달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뜻의 통제권을 놓고 벌인 싸움이었다. 모국어로 옮긴다는 것은 곧 권력을 재분배하는 일이었다.

불길을 건너 모국어 책을 전달하는 장면
그림 3읽을 권리와 권력에 맞선 번역의 위험을 드러낸다.

번역은 반역 — 옮길 수 없는 것들

이탈리아에는 '트라두토레 트라디토레(traduttore traditore)'라는 말장난이 있다. 번역가는 반역자라는 뜻이다. 19세기 문인 주스티가 토스카나 속담집에 적어둔 이 구절은, 단테를 서툴게 옮긴 프랑스어 번역을 향한 분노에서 비롯했다고 전해진다. 무엇을 옮기든 원문을 배신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뼈아픈 자백이다.

배신은 어휘의 틈에서 가장 선명하다. 포르투갈어 '사우다지'는 부재하는 것을 향한 애틋하고 서글픈 그리움을, 덴마크어 '휘게'는 촛불과 담요와 가까운 이들이 함께 빚어내는 아늑한 삶의 방식을 통째로 담는다. 우리말의 '정'이나 '한' 앞에서 영어가 번번이 말을 더듬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이런 낱말들은 단어라기보다 한 문화가 오래 다듬어온 감정의 지도에 가깝다. 다른 언어의 어떤 단어도 이 세계를 한 낱말로 받아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언어가 다르면 생각도 갇히는 걸까. 흔히 언어가 사고를 감옥처럼 가둔다는 강한 가설을 인용하지만, 현대 언어학은 그 극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러 언어를 자유로이 오가는 사람이 그때마다 다른 감옥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반박은 충분하다. 에스키모에게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십 개라는 유명한 이야기도 실은 부풀려진 통념이다. 옮길 수 없는 단어가 있다고 해서, 그 세계를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 문단으로 풀어 설명하면 될 뿐이다.

다만 약한 형태는 살아남았다. 스탠퍼드의 인지과학자 레라 보로디츠키의 연구는, 절대 방위로만 공간을 말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마을에서는 다섯 살 아이도 망설임 없이 북쪽을 정확히 가리키는 것처럼, 언어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지를 은근히 물들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어는 사고를 가두지 않는다. 다만 특정한 각도에서 세계를 비출 뿐이다. 번역이 잃는 것은 바로 그 각도이고, 번역가가 애써 되살리려는 것도 그 각도다. 그러니 번역은 반역인 동시에 선물이다. 배신 없이는 애초에 강을 건널 수 없고, 건너지 못한 세계는 우리에게 영영 닫혀 있을 테니까.

단어 틀을 통과하고도 남는 세계관 조각
그림 4단어 대 단어 치환으로 사라지는 문화적 맥락을 보여준다.

기계의 번역 — 유창함과 충실함이 갈라질 때

오늘날 강을 건너는 일은 기계가 대신한다. 초기의 통계 기반 번역은 방대한 이중언어 자료에서 확률이 높은 구절 조각을 짜맞췄을 뿐, 문장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2016년 구글이 신경망 번역으로 갈아타면서 기계는 문장 전체의 맥락을 함께 보기 시작했고, 결과물은 훨씬 매끄러워졌다. 지금의 대규모 언어모델은 한층 더 유창하다.

문제는 그 유창함의 정체다. 기계가 최적화하는 것은 진실도 의도도 아닌, 그저 그럴듯한 다음 단어의 분포다. 그래서 틀릴 때조차 당당하게 틀린다. "It's raining cats and dogs" 같은 관용구는 하늘에서 고양이와 개가 쏟아지는 엉뚱한 그림이 되고, 문화가 밴 낱말은 밋밋하게 뭉개지며, 중의적인 문장은 자료 속 다수결로 하나의 뜻만 남는다. 겉보기에는 매끄러워 오히려 오류를 알아채기가 더 어렵다. 흔히 인공지능이 번역을 완성했다고들 하지만, 유창함과 충실함은 같은 것이 아니다. 기계는 단어의 강은 건넜으되 세계관의 강은 아직 건너지 못했다. 앞 절에서 본 옮길 수 없는 것들, 문맥과 아이러니와 침묵의 여백은 통계의 그물을 번번이 빠져나간다.

시 한 편을 떠올리면 간극은 더 또렷하다. 운율과 말맛, 행간에 접어둔 아이러니를 살리려면 원문을 어느 지점에서 배신할지를 사람이 정해야 한다.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킬지의 저울질은 확률이 대신해줄 수 있는 계산이 아니다.

완벽한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번역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 속에서 번역가가 무엇을 살릴지 선택하는 순간, 비로소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에 가닿는다.

애초에 번역가의 일은 단어를 맞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반대편 강기슭으로 옮기되, 그 과정에서 무엇이 흘러넘치는지를 아는 일이었다. 완벽한 번역은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이 신성문자를 되살리고, 성서를 만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잊혀졌던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중세 유럽으로 되돌아온 길도 번역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유클리드는 먼저 아랍어로 옮겨진 뒤,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의 대학을 깨웠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언어의 강을 건너서다. 그렇게 번역은 종교와 과학과 권력을 대륙 너머로 실어 날랐다. 기계가 흘려버리는 그 잔여물, 곧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포기할지 결정하는 인간의 판단이야말로 끝내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좋은 번역가는 옮기기 전에 먼저 깊이 읽는 사람이고, 무엇이 흘러넘칠지 아는 사람만이 그 상실을 최소로 줄이며 강을 건널 수 있다. 기계는 손실 없이 옮겼다고 믿을 때 가장 위험하고, 사람은 손실을 아는 데서 비로소 정직해진다. 기계의 시대에 번역가란, 어쩌면 강 건너에서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기억하는 마지막 증인이 아닐까.

유창함과 충실함 사이에서 번역을 조율하는 장면
그림 5매끄러운 문장과 원문 충실성이 언제든 갈라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