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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역사]2026-09-0810분 읽기

산은 언제 정복의 대상이 됐나 — 정상에 오르는 취향의 짧은 역사

정상에 오르는 취향의 짧은 역사

산은 오랫동안 신이 사는 곳이거나 그저 넘어야 할 장애물이었다. 오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것은 겨우 200년 남짓 된 일이고, 그 사이에는 계몽주의의 과학 조사와 낭만주의의 숭고 미학, 그리고 여가를 가진 계급의 등장이 겹쳐 있다. 몽블랑에 걸린 상금부터 다르질링에서 모집된 포터의 이름이 공식 보고서에서 빠진 일까지, 산에 대한 태도가 언제 어떻게 바뀌었는지 따라간다.

1492년, 프랑스 남동부의 몽테귀유 꼭대기에 사람이 올라섰다. 중세 내내 이 바위산은 '접근 불가능한 산'으로 불렸고, 그림에는 늘 아래가 좁고 위가 퍼진 버섯 모양으로 그려졌다. 올라간 사람은 샤를 8세의 시종 앙투안 드 빌이었다. 사다리와 밧줄과 온갖 인공 장비를 동원해 벽을 넘은 이유는 간단하다. 왕이 오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일행은 정상에서 여드레를 머물며 작은 십자가 몇 개와 돌 대피소를 세웠고, 인근 귀족들이 구경을 왔다. 그리고 이 산은 그 뒤로 340년 넘게 아무도 다시 오르지 않았다. 1834년에야 장 리오타르가 맨발로 다시 올랐다. 등반사는 이 사건을 종종 '알피니즘의 시작'이라 부르지만, 정확히 말하면 시작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를 이유가 사라지자 산은 다시 조용해졌다.

오르지 않는 것이 정답이던 시절

사람이 높은 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개는 늘 넘었다. 장사꾼과 순례자와 군대가 넘었고, 사냥꾼과 수정 채집꾼이 능선을 훑었고, 측량사가 삼각점을 박으러 올라갔다. 다만 그 모든 이동에서 대개 정상은 목적지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길에 있었거나, 일 때문에 닿았거나, 신이 사는 자리라 아예 비워두는 곳이었다.

1336년 4월, 페트라르카가 방투산에 올랐다는 편지는 이 태도가 흔들린 최초의 기록처럼 인용된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의 유일한 동기는 그토록 높은 곳이 무엇을 보여주는지 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산기슭에서 만난 늙은 양치기가 그를 한참 말렸다는 대목도 있다. 오십 년 전 자기도 젊은 혈기로 올라가 봤지만 얻은 것은 찢어진 옷과 피로와 후회뿐이었고, 자기가 아는 한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올라간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편지를 사료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피에르 쿠르셀과 주세페 빌라노비치는 이 글이 사건으로부터 약 15년 뒤, 수신인이 이미 죽은 다음에 쓰인 사실상의 창작이라고 봤고, 라이엘 애셔는 산을 오르는 이야기 자체가 편지를 쓰는 행위의 비유라고 읽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다. 정상에 오르는 일을 굳이 설명하고 변호해야 했다는 것. 그때는 그게 해명이 필요한 행동이었다.

dkdk가 산 그림이 걸린 마을 게시판에 "왜 올라갔는가"라고 적힌 긴 해명서를 압정으로 붙이고 있다
그림 1그때는 그게 해명이 필요한 행동이었다

두려움이 아름다움으로 바뀌기까지

17세기 영국 문인들에게 산은 아름답지 않았다. 문학사가 마저리 호프 니콜슨이 1959년에 정리한 바에 따르면, 그들에게 산은 지구의 대칭을 망가뜨린 흉한 혹이자 신의 진노의 흔적이었다. 그런데 채 두 세기가 지나기 전에 낭만주의 시인들은 같은 지형을 두고 영혼이 떨린다고 노래했다. 니콜슨은 헨리 모어에서 토머스 버넷, 존 데니스, 섀프츠베리, 애디슨을 거쳐 낭만주의로 이어지는 감각의 계보를 추적했다. 무한과 불규칙이 결함이 아니라 숭고의 조건이 되는 전환이다.

이 전환의 핵심은 신학적이었다. 불규칙하고 거대하고 측량 불가능한 것이 창조의 실패가 아니라 창조주의 크기를 보여주는 증거로 재해석되면서, 두려움은 폐기되지 않고 미적 감각으로 승격됐다. 무섭다는 감각과 아름답다는 감각이 같은 자리에 놓인 것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이 정상에서 느꼈다고 보고하는 감정의 문법은 대체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산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빙하도, 경사도, 추위도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었고, 그 눈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계급이 특정한 책을 읽으며 만들어졌다.

dkdk가 펼친 책을 렌즈처럼 눈앞에 들어 올리자, 책을 통해 본 쪽의 험한 산이 아름다운 산으로 바뀌어 보인다
그림 2그 눈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계급이 특정한 책을 읽으며 만들어졌다

상금이 붙은 산

1760년, 제네바의 자연학자 오라스베네딕트 드 소쉬르가 몽블랑 정상에 처음 오르는 사람에게 상금을 걸었다. 본인이 오르고 싶었지만 안 되면 누구라도 오르게 하려는 계산이었다. 그는 산을 실험실로 봤다. 지질과 기상과 고도의 자료가 거기 있었다.

상금이 걸린 뒤 26년이 지나서야 사람이 올라갔다. 1786년 8월 8일, 샤모니의 의사 미셸가브리엘 파카르와 수정 채집꾼 자크 발마가 정상에 섰다. 파카르는 관측 기구를 나른 대가로 발마에게 삯을 주었고 상금은 통째로 넘겼다. 그런데 곧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파카르는 도중에 탈진해 주저앉았고 발마 혼자 올라갔다는 것이다. 소문의 진원지는 마르크테오도르 부리트, 자신도 몽블랑을 노렸던 인물이었다. 파카르의 이름이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복권된 것은 초등 200주년인 1986년이었다.

소쉬르 본인은 1785년 에귀유 뒤 구테 쪽으로 한 번 실패한 뒤 이듬해인 1787년에 세 번째로 올랐고, 1788년에는 3,371미터 콜 뒤 제앙에서 17일을 버티며 기상 관측과 물리 측정을 했다. 여기까지는 아직 과학의 시대다. 그러나 파카르와 발마를 둘러싼 진흙탕 싸움이 알려준 것이 하나 있다. '초등'이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명예가 되었다는 것. 이건 자연을 조사하는 일과는 다른 종류의 발명이었다.

dkdk가 산꼭대기에 상금 주머니가 매달려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아직 아무 이름도 새겨지지 않은 빈 명패가 달려 있다
그림 3소유할 수 있는 명예가 되었다는 것

신사들의 클럽, 그리고 1865년 7월

1857년 12월 22일 런던의 애슐리 호텔에서 세계 최초의 등산 클럽인 알파인 클럽이 창립됐다. 1857년부터 1863년 사이에 뽑힌 회원은 281명. 법조인, 의사, 성직자, 학자, 공무원, 군 장교, 주식중개인, 지주였다. 여가와 현금과 여권이 있는 사람들이다. 초기에는 과학적 동기를 내세운 이들이 많았지만, 이내 순수한 스포츠맨들이 클럽을 장악했다.

다만 이들의 업적은 혼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미셸 크로, 크리스티안 알머, 야코프 안데레크 같은 스위스와 프랑스의 가이드들이 길을 뚫고 짐을 지고 판단을 내렸다. 아마추어의 명예는 직업인의 노동 위에 얹혀 있었고, 클럽의 회원 명부에 오르는 쪽은 아마추어였다.

dkdk가 이름이 딱 한 줄만 적힌 얇은 클럽 명부를 손에 들고 있는데, 그 명부가 아래에 쌓인 무거운 짐 상자 더미 위에 놓여 균형을 잡고 있다
그림 4아마추어의 명예는 직업인의 노동 위에 얹혀 있었고

이른바 알피니즘의 황금기는 1854년 앨프리드 윌스의 베터호른 등정에서 시작해 1865년에 끝난다. 그해 7월 14일, 에드워드 윔퍼 일행이 마터호른 초등에 성공했다. 하산 한 시간 만에 더글러스 해도가 미끄러지며 미셸 크로를 덮쳤고, 찰스 허드슨과 프랜시스 더글러스가 딸려 갔다. 생존자와 추락자 사이를 잇던 밧줄이 끊어졌다. 예비용으로 가져간 가장 낡고 약한 줄이었다. 네 사람은 1,200미터를 떨어졌다.

윔퍼와 체르마트의 가이드 타우그발더 부자가 살아남았고, 곧 밧줄을 일부러 끊었다는 의혹이 따라붙었다. 조사에서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타우그발더는 혐의를 벗었지만 비난은 오래 남았다. 영국에서는 슬픔이 금세 분노로 바뀌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등산 금지를 검토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이때 처음으로 사회가 물었다. 왜 굳이 올라가야 하는가. 질문이 나왔다는 것은, 그 무렵 등반이 이미 설명이 필요한 하나의 제도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

1802년 시작된 인도 대삼각측량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의 위치와 높이와 이름을 정하는 사업이었다. 문제의 봉우리는 한동안 그냥 '15번 봉'이었다. 측량국장 앤드루 워는 지역 명칭이 여럿이라 고르기 곤란하다며 전임자의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했다. 정작 조지 에버리스트 본인은 그 이름을 힌디로 쓸 수도 없고 인도 사람이 발음할 수도 없다며 반대했다. 왕립지리학회가 이 이름을 채택한 해가 공교롭게도 1865년이다. 그 산에는 이미 촐룽마와 사가르마타라는 이름이 있었다.

측량이 이름을 지우는 동안, 등반은 사람을 지웠다. 원정대는 다르질링에서 고소 포터를 모집했다. 1922년 6월 7일 노스콜에서 일어난 눈사태로 일곱 명이 죽었다. 탕카이, 상가이, 템바, 락파, 파상 남갸, 페마, 그리고 노르부. 기록마다 숫자와 소속이 어긋난다. 어떤 기록은 일곱 명 전부를 셰르파로, 어떤 기록은 여섯 명이 셰르파이고 노르부는 보티아라고 적었다. 아홉 명이 크레바스에 빠져 둘이 구조되고 여섯이 죽었으며 한 구는 끝내 수습하지 못했다는 서술도 있다.

이 일곱 명의 이름은 공식 보고서에 실리지 않았다.

다만 완전한 삭제는 아니었다. 1924년 원정대가 베이스캠프에 세운 추모 케른에는 이 이름들이 새겨졌고, 같은 해 일곱 명에게 올림픽 금메달이 수여됐다. 공식 기록에는 없고 추모비에는 있는 이 간극이, 이들이 어떤 자리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dkdk가 공식 기록부를 펼쳤더니 이름 칸들이 비어 있고, 바로 옆에 세워진 돌 추모비에는 그 이름 자리마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림 5공식 기록에는 없고 추모비에는 있는 이 간극이

히말라얀 저널이 1950년에 정리한 다르질링 포터 명부에는 175명이 올라 있다. 그중 51명이 사망했고, 24명은 산에서 죽었다. 같은 문서가 정한 표준 일당은 사다르가 5루피, 포터가 3루피였다. 기혼자가 사망했을 때의 보상금은 1,000루피였다.

"거기 있으니까"라는 말과 그 이후

등반을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한 문장은 조지 맬러리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 있으니까. 이 말이 활자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23년 3월 18일 뉴욕타임스 기사다. 다만 이 문구가 맬러리의 실제 발언을 얼마나 정확히 옮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래된 의심이 있다. 그를 잘 알았던 하워드 소머벨은 1964년에 이 말이 "조지 맬러리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는다"고 썼고, 톰 홀첼은 1999년 저서에서 이 표현이 맬러리의 어떤 단일한 발언과도 대응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확실한 것은 이 문장이 1924년 맬러리의 실종 이후 추도 기사들을 통해 반복되며 신화가 됐다는 사실이다. 왜 오르느냐는 질문에 답이 필요했고, 짧고 근사한 답 하나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 답의 계보 끝에 오늘의 상업 등반이 있다. 1996년 5월 10일 하루에만 33명이 캠프4를 떠나 정상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하루 최다 인원이었고, 이틀에 걸쳐 여덟 명이 죽었다. 그해 시즌 사망자는 열둘이었다. 사고 이후 논쟁의 초점은 상업 가이드 등반 자체로 옮겨갔다. 존 크라카우어는 돈을 낸 사람이 자격 없이 정상을 노릴 수 있게 된 구조를 문제 삼았다. 알파인 클럽이 아마추어와 직업 가이드를 나눴듯이, 이번에는 고객과 노동자가 나뉜 셈이다. 2014년 4월 18일 쿰부 아이스폴에서는 열여섯 명이 죽었다. 전원이 네팔인 노동자였고 외국인 등반가 사망자는 없었다. 유족에게 처음 지급된 위로금은 4만 루피, 약 400달러였다. 네팔 노동자들은 그해 등반을 중단했다. 2024년 5월 기준 에베레스트에서 죽은 사람은 340명이다.

그리고 부탄은 1994년 6,000미터 이상 등반을 금지했고 2003년부터는 모든 등반을 금지했다. 이유는 현지의 신앙이다. 그래서 7,570미터 강카르푼섬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미등정 봉우리로 남아 있다. 이건 뒤처진 상태가 아니라 선택이다. 200년 남짓 된 습관 하나를 들이지 않은 것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산에 대해 안다고 믿는 것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사실은 19세기 런던의 어느 호텔 방에서 시작된 취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