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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법]2026-09-0810분 읽기

고장 나면 누구 책임인가 — 보증의 역사

보증의 역사

보증서는 소비자를 지키려고 태어난 문서가 아니다. 1955년 크라이슬러의 보증문은 무엇을 고쳐주겠다고 적는 동시에 그 밖의 모든 책임을 지운다고 적었다. 매수인 위험부담에서 제조물 책임까지, 물건이 고장 났을 때 그 값을 무는 사람의 자리는 400년 동안 계속 옮겨졌다.

1603년 잉글랜드의 재무법원 앞에 한 남자가 섰다. 그는 100파운드를 주고 돌 하나를 샀다. 판 사람은 그것이 베조아르 스톤이라고 했다. 짐승의 위장 속에서 자라며 독을 빨아들인다고 믿어지던, 값을 매기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돌은 가짜였다. 그런데 법원은 산 사람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판결에 남은 문장은 지금 읽어도 서늘하다. 그것이 베조아르 스톤이라는 단순한 확언은, 그렇다고 보증하지 않은 이상, 소송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말한 것과 보증한 것은 다르다. 챈들러 대 로퍼스 사건이 그어놓은 이 선은, 물건이 고장 났을 때 누가 그 값을 무는가라는 질문의 출발점이다.

표시는 물건 위에 있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서류 없이도 그럭저럭 살았다. 1300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모든 은제품이 순도 92.5퍼센트의 스털링 기준을 지키고 표범 머리 각인을 받도록 했다. 파리에서는 1260년 금세공 조례가, 1275년에는 국왕의 각인이 같은 일을 했다. 검사와 각인을 맡은 것은 관청이 아니라 동업조합이었다. 런던에서는 금세공인조합의 회관, 곧 홀(hall)에서 이 일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그 표시를 홀마크라고 부른다. 흔히 가장 오래된 소비자 보호로 꼽히는 제도다.

핵심은 그 표시가 물건 자체에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종이 한 장이 따로 오갈 필요가 없었다. 만든 사람은 같은 도시에 있었고, 조합은 그를 쫓아낼 수 있었고, 사는 사람은 은을 손톱으로 긁어볼 수 있었다. 신뢰는 거리의 함수였다. 거리가 가까우면 서류가 없어도 되고, 멀어지면 서류가 필요해진다.

dkdk가 가까이에서는 물건 표면에 찍힌 각인을 손가락으로 만져 확인하는데, 물건이 멀어질수록 그 각인이 점점 종이 서류로 바뀐다
그림 1신뢰는 거리의 함수였다

계약이라는 울타리

19세기가 그 거리를 벌려놓았다. 1842년 영국의 윈터보텀 대 라이트 사건에서 우편마차를 몰던 남자가 마차가 주저앉는 바람에 다쳤다. 마차 정비를 맡은 업자는 따로 있었다. 법원은 그를 상대로 한 소송을 각하했다. 다친 사람과 정비업자 사이에 계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계약 관계, 곧 프리비티(privity)가 없으면 책임도 없다. 법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송이 무한정 늘어난다고 걱정했다.

이 울타리는 그 시절의 상거래 원칙과 잘 맞았다. 매수인 위험부담, 카베아트 엠프토르. 사는 사람이 알아서 살펴야 하고, 모르고 산 것은 모르고 산 사람 잘못이라는 것. 눈으로 확인할 수 있던 시절에는 그럴듯한 규칙이었다. 문제는 공장이 도시 밖으로 나가고, 물건이 철도를 타고 팔려나가고, 뜯어봐야 알 수 있는 부품이 상자 안에 숨으면서 시작됐다.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살필 수가 없었다.

dkdk가 단단히 봉해진 상자에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보는데, 돋보기에는 상자 겉면의 나뭇결만 크게 비친다
그림 2사는 사람은 더 이상 살필 수가 없었다

대량생산이 끊어놓은 것은 정확히 말하면 시선이 아니라 사슬이었다. 제조사에서 도매상으로, 도매상에서 대리점으로, 대리점에서 손님으로. 물건은 한 줄로 흘러가는데 계약은 고리마다 따로 맺혔다. 그러니 손님이 다쳐도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상대는 바로 앞 고리인 대리점뿐이었다. 정작 바퀴를 설계한 쪽은 세 칸 떨어진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됐다. 계약의 사슬은 유통을 편리하게 만든 만큼 책임을 옆칸으로 미루기도 편리하게 만들었다.

법은 한 세기에 걸쳐 조금씩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통일상법전은 상인이 파는 물건이라면 별도의 약속이 없어도 그 물건이 통상의 용도에 적합해야 한다는 묵시적 보증을 인정한다. 각 주가 채택한 모범법이라 연방법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주가 받아들였다. 그러나 같은 법전에는 이런 조항도 있다. 상품성 보증을 배제하려면 "상품성"이라는 말을 쓰고 눈에 띄게 적으면 된다고. 있는 그대로, 모든 하자를 포함하여 — 그런 문구면 충분하다고.

보증서는 무엇을 지우는가

여기서 통념이 깨진다. 근대의 보증서는 소비자를 위해 태어난 문서가 아니다. 1955년 5월 7일, 헤닝슨이라는 남자가 어머니날 선물로 아내에게 줄 플리머스 승용차를 샀다. 열흘 남짓 지난 5월 19일, 아내가 시속 30킬로미터 남짓으로 몰던 차의 핸들이 헛돌았고 차는 벽을 들이받았다. 차는 폐차됐다. 소송에서 문제가 된 것은 계약서에 인쇄돼 있던 제조사 보증이었다. 그 보증이 약속한 것은 이랬다. 인도 후 90일 이내 또는 주행 4,000마일 이내에, 공장에서, 부품을 고쳐주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문장이 이 글의 주제를 압축한다.

이 보증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다른 모든 보증,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의무와 책임을 대신하는 것으로 한다.

제조사 입장에서 이 문서의 매력은 분명하다. 물건이 복잡해질수록 무엇이 어떻게 망가질지 미리 알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에는 값을 매길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감당할 수 있는 크기만큼 책임을 잘라내 종이에 적고, 나머지는 종이 밖으로 밀어내는 것. 무엇을 해주겠다고 적는 순간, 그 문서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하지 않겠다고 적는다. 보증서는 약속의 목록이자 동시에 배제의 목록이었다. 90일과 4,000마일은 혜택의 크기가 아니라 책임의 천장이었다. 1603년에는 "보증한다"는 말이 있어야 겨우 보호를 받았는데, 350년 뒤에는 같은 말이 보호의 상한선을 그리는 도구가 되어 있었다. 단어는 그대로인데 방향이 뒤집혔다.

dkdk가 "보증"이라 적힌 큰 종이를 펼치자 그 종이가 머리 위 우산이 되는 대신 발밑에서 낮은 울타리로 세워지며 보호 범위를 안쪽으로 좁힌다
그림 3단어는 그대로인데 방향이 뒤집혔다

울타리를 넘어간 사람들

미국 법원이 이 구조를 부순 과정은 자동차와 함께 간다. 1916년 뉴욕주 항소법원. 도널드 맥퍼슨이 몰던 1910년식 뷰익 러너바웃의 나무 바퀴가 주저앉아 그가 다쳤다. 바퀴는 뷰익이 만든 것도 아니었고, 맥퍼슨은 대리점에서 차를 샀으니 뷰익과 계약도 없었다. 벤저민 카도조는 그럼에도 뷰익에 책임이 있다고 썼다. 부주의하게 만들면 사람의 생명과 신체가 위험해지는 물건이고, 제조사가 그 물건이 다시 검사받지 않고 쓰일 것을 안다면, 계약과 무관하게 그 위험한 물건의 제조자는 조심스럽게 만들 의무를 진다.

dkdk가 고리로 이어진 계약 사슬 울타리를 성큼 넘어가, 그 너머 공장 정문에 청구서를 직접 붙인다
그림 4계약과 무관하게 그 위험한 물건의 제조자는 조심스럽게 만들 의무를 진다

1944년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에서는 콜라병이 손에서 터져 종업원 글래디스 에스콜라의 손을 찢은 사건이 다뤄졌다. 로저 트레이너 대법관은 별개의견에서, 책임은 생명과 건강에 대한 위험을 가장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곳에 놓여야 한다고 적었다. 대량생산 시대에 소비자에게 검사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고, 사고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쪽은 제조사라는 것이었다.

계약 바깥으로 걸어 나가다

1960년 뉴저지주 대법원은 헤닝슨 사건에서 그 인쇄된 면책 문구를 무효로 했다. 협상력이 한쪽으로 기운 정형화된 계약서로는 묵시적 보증을 부품 교환으로 축소할 수 없고, 대리점을 거쳐 샀다는 이유로 제조사가 빠져나갈 수도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1963년, 다시 트레이너였다. 그린맨은 아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다목적 공작기계를 쓰다가 부속이 튀어나와 머리를 맞았다. 제조사는 보증 위반을 열 달이나 지나서 통지했으니 늦었다고 항변했다. 법원은 그 항변을 받아주지 않았다. 상거래상의 보증 통지 규정은 결함 제품이 사람을 다치게 한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제조자가 결함 검사 없이 사용될 것을 알면서 시장에 내놓은 물건에 결함이 있어 상해가 발생하면, 제조자는 불법행위상 엄격책임을 진다.

이 문장의 진짜 의미는, 법이 문제를 계약 안에서 고치기를 포기하고 계약 밖으로 걸어 나갔다는 데 있다. 보증서를 아무리 잘 써도 보증서를 쓰는 쪽이 제조사인 한 게임은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아예 다른 방을 만들었다. 1965년 미국법률협회의 제2차 불법행위 리스테이트먼트 402A조가 이를 조문화했고, 1971년까지 28개 주, 1976년까지 41개 주가 받아들였다.

남은 것은 서류와 보험

책임의 선이 옮겨가자 서류도 다시 쓰였다. 미국 의회는 1975년 매그너슨-모스 보증법을 만들었다. 명시 보증과 면책조항의 광범위한 오용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법은 보증을 강제하지 않는다. 다만 보증을 하려거든 "완전" 보증인지 "한정" 보증인지 눈에 띄게 표시하라고 하고, 서면 보증을 한 공급자는 묵시적 보증을 배제하지 못하게 못을 박았다. 문서로 책임을 지우는 기술 자체를 규제한 것이다. 이 원칙은 국경을 넘었다. 유럽공동체는 1985년 제조물 책임 지침을, 일본은 1994년, 한국은 2000년에 제조물 책임법을 만들었다. 한국법은 제조업자의 과실을 따지지 않는 무과실책임을 채택했고, 2017년 개정(법률 제14764호, 2018년 4월 19일 시행)으로 결함을 알고도 조치하지 않은 경우 손해액의 3배까지 물릴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제조사는 위험을 떠안았을까. 절반만 그렇다. 나머지 절반은 상품이 되어 되팔렸다. 오늘날 매장에서 권하는 연장보증은 법적으로는 대개 보증이 아니라 서비스 계약이고, 미국의 여러 주는 이를 보험으로 규제한다. 소비자 연구자들도 이를 본질적으로 보험 상품으로 본다. 손실 확률, 손실 규모, 위험 회피 성향, 보험료로 설명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가전 매장에서 이 계약은 제품값의 20~30퍼센트에 팔리고, 판매 직원에게는 최대 15퍼센트의 수수료가 떨어지기도 한다. 위험을 안는 쪽이 마진을 가져간다는 보험의 문법이 매대 위에서 반복된다.

dkdk가 계산대 위에서 커다란 물건에 붙은 값표보다, 그 옆의 얇은 종이 한 장에 붙은 값표가 더 크다
그림 5위험을 안는 쪽이 마진을 가져간다는 보험의 문법이 매대 위에서 반복된다

선은 지금도 움직이는 중이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는 2021년 수리 제한을 다룬 보고서를 내면서, 봉인 스티커를 뜯으면 보증이 무효라고 알리는 관행이 매그너슨-모스 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유럽연합은 2024년 수리할 권리 지침을 채택해 제조사에 합리적 기간과 가격의 수리를 요구했고, 미국에서도 뉴욕, 미네소타,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이 차례로 법을 만들었다.

수리할 권리 논쟁이 이 계보의 최신 국면인 이유는, 그것이 결국 같은 질문의 다른 판본이기 때문이다. 고장 난 물건을 누가 만질 수 있는가는 곧 고장의 값을 누가 무는가와 같은 문제다. 부품을 팔지 않고 도면을 공개하지 않고 정품이 아니면 인식하지 않게 만들면, 제조사는 보증서에 한 글자도 쓰지 않고도 책임의 경계를 다시 그을 수 있다. 카도조와 트레이너가 계약서에서 빼앗아온 권한이 이번에는 설계도와 펌웨어로 돌아온 셈이다.

400년 전 재무법원의 판사들은 물건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접착제로 붙은 케이스와 부품 페어링 뒤에 있는 물건을 산다. 보증서는 여전히 상자 안에 들어 있다. 그런데 그 종이는 지금 누구를 위해 쓰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