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 다른 존재의 경험에 닿을 수 있는가
다른 존재의 경험에 닿을 수 있는가
1974년 토머스 네이글이 던진 질문 하나가 의식 연구 전체의 난제가 됐다. 3인칭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1인칭 경험이 남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흔한 오해와 달리 네이글은 물리주의가 거짓이라고 결론짓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아직 그것을 이해할 개념 틀을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1974년 10월, 학술지 『필로소피컬 리뷰』에 열여섯 쪽짜리 논문 한 편이 실렸다. 제목 자체가 질문이었다.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저자 토머스 네이글은 동물학자가 아니었고 박쥐에 특별한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 그는 마음을 물질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매번 어디에서 미끄러지는지 보여줄 사례가 하나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데 사례가 논지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의식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신경과학자든 철학자든 인공지능 연구자든 이 박쥐를 한 번은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상당수는 이 논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오해한 채로 지나간다.
박쥐에 대해 우리는 이미 아주 많이 안다
네이글이 글을 쓸 무렵에도 반향정위는 알려진 현상이었고, 지금은 훨씬 더 정밀하게 안다. 곤충을 쫓는 박쥐는 자기가 내지른 울음이 돌아오는 시간차로 표적까지의 거리를 잰다. 접근 단계에서 이 박쥐가 구별해내는 지연 시간의 차이는 약 85마이크로초, 거리로 환산하면 1.5센티미터 남짓이다. 멀리서 훑는 탐색 단계에서는 그보다 열 배쯤 무디다. 사냥이 진행되면 울음의 리듬 자체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초당 대여섯 번, 표적을 좁히면 수십 번, 낚아채기 직전에는 초당 백칠십 번에 이르는 '종말 버즈'가 터진다. 나뭇잎이 어수선한 곳에서는 신호를 더 짧고 넓은 대역으로 바꿔 배경 잡음에서 먹이를 갈라낸다.
이것은 시적인 묘사가 아니라 측정된 숫자다. 박쥐의 청각 신경세포가 어떤 지연에 반응하는지, 도플러 편이를 어떻게 보정하는지, 뇌의 어느 회로가 시간차를 공간으로 번역하는지도 상당 부분 밝혀져 있다. 네이글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은 채 썼다. 그는 박쥐가 소나로 거리와 크기와 모양과 운동과 질감을 우리가 눈으로 하는 것에 견줄 만큼 정확하게 변별한다고 적었고, 곧바로 덧붙였다. 박쥐의 소나는 분명 지각의 한 형태이지만 우리가 가진 어떤 감각과도 작동 방식이 비슷하지 않으며, 그것이 주관적으로 우리가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무엇과 비슷하리라고 볼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3인칭 기술은 이미 대단히 정교하다. 네이글의 논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난 뒤에도, 박쥐의 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무엇인가.

그가 하지 않은 말
오해는 대개 여기서 생긴다. 네이글의 주장은 '박쥐의 감각이 너무 낯설어서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가 아니다. 그는 논문의 각주에서 이 독법을 미리 막아두었다. 시각장애인이 혀 차는 소리나 지팡이 소리로 주변 물체를 감지하듯 상상력은 놀랄 만큼 유연하며, 자신과 남 사이의 거리도 종과 종 사이의 거리도 연속적이어서 부분적인 이해는 언제나 가능하다고 그는 인정한다. 그러고는 못을 박는다. "내 논점은 박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인식론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세우려던 구분은 다른 것이었다. 팔에 물갈퀴가 달리고 시력이 나쁘고 낮에는 다락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고 아무리 상상해봐야, 그것은 "내가 박쥐처럼 행동한다면 나에게 어떨지"를 알려줄 뿐이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박쥐에게 박쥐로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다." 상상력의 한계를 한탄하는 문장이 아니다. 세상에 어떤 종류의 사실이 있는가에 대한 주장이다.
그리고 결론에서 그가 끝내 하지 않은 말이 하나 더 있다.
물리주의가 거짓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옳다. 물리주의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것이 어떻게 참일 수 있는지에 대한 어떤 개념도 지금으로서는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네이글은 유물론을 논파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아직 그 주장을 이해할 개념 틀을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가 든 비유가 정확하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가 "물질은 에너지다"라고 말했다면 그 문장은 참이었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물리주의는 지금 그 자리에 있다.
객관성은 왜 멀어지는가
이상하게도 문제는 성공한 환원의 사례에서 더 또렷해진다. 소리가 사실은 공기의 파동임을 알아냈을 때 우리가 한 일은 무엇인가. 하나의 관점을 내려놓고 다른 관점을 집어든 것이다. 그리고 내려놓은 그 관점, 즉 인간이나 동물이 무언가를 듣는 자리는 환원되지 않은 채 남는다. 물이나 열이나 유전자에서는 이 잔여가 문제되지 않았다. 두고 가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환원하려는 대상이 관점 그 자체일 때는 사정이 다르다.

만약 경험의 주관적 성격이 오직 하나의 관점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면, 더 큰 객관성으로의 이동은, 즉 특정한 시점에 덜 매이게 되는 것은, 현상의 실제 본성에 우리를 더 가까이 데려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그로부터 더 멀어지게 한다.
이 한 문장이 이후 50년의 논쟁을 규정했다. 1983년 조지프 레바인은 그것에 '설명적 간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통은 C섬유의 발화다"라는 문장이 설령 참이라 해도, 왜 하필 그 발화가 그런 느낌이어야 하는지는 조금도 설명되지 않는다. 레바인 자신은 여기서 형이상학적 결론을 뽑아내지 않았다. 세계가 둘로 갈라져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의 설명이 아직 닿지 못한 자리라는 쪽이다.
1995년 데이비드 차머스는 지형도를 다시 그렸다. 지각적 변별, 정보 통합, 보고 가능성, 주의, 각성과 수면의 구분처럼 계산적·신경적 메커니즘으로 풀릴 법한 것들은 '쉬운 문제'다. 그것을 다 풀고도 남는 것이 '어려운 문제'다. 차머스의 표현대로, 왜 이 기능들의 수행에 경험이 동반되는가.
방에서 나온 메리, 속이 빈 사람
같은 구조를 다르게 조립한 논증이 둘 더 있다. 1982년 프랭크 잭슨이 만든 메리는 흑백 방에서만 살아온 신경과학자다. 그녀는 색채 시각에 관한 물리적 사실을 남김없이 배웠다. 파장이 망막에서 어떤 색소를 자극하고 그 신호가 어느 경로를 타고 어떤 발화 패턴으로 끝나는지 전부 안다. 그런 그녀가 방을 나와 처음으로 빨간 토마토를 본다. 그녀는 새로 무언가를 알게 되는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순간, 물리적 사실을 다 알고도 모르는 무언가가 남는다는 말이 된다.

좀비 논증은 같은 지렛대를 반대 방향으로 민다. 우리와 물리적으로 완전히 똑같으면서 속이 텅 빈 존재, 그것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도 아닌 존재를 모순 없이 떠올릴 수 있다면, 물리적 사실만으로는 경험의 사실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두 논증 모두 네이글의 박쥐와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다만 박쥐가 우리 밖의 낯선 존재라면, 메리와 좀비는 그 낯섦을 실험실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잔여물은 착각인가
대니얼 데닛은 이 논증들을 하나씩 반박하는 대신 그 출발점인 직관을 겨눈다. 그가 보기에 '퀄리아'는 사적이고 직접 접근 가능하며 말로 옮길 수 없는 무엇이라는, 서로 잘 맞지도 않는 성질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놓은 혼란스러운 개념이고, 그렇게 정의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좀비에 대해서도 진단은 같다. 좀비를 상상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상상이라는 작업의 부담을 번번이 과소평가하며, 결국 자기 정의를 위반하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만다는 것이다. 의식은 떼어낼 수 있는 하나의 신비로운 물건이 아니라 수많은 정보 처리 능력의 거대한 복합체이고, 그것을 정말로 전부 채워 넣고 나면 좀비와 우리의 대비는 사라진다.
반대편에서는 더 극적인 일이 있었다. 메리의 방을 만든 잭슨 본인이 자기 논증을 철회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그는 논증이 딛고 선 부수현상론이 스스로를 무너뜨린다는 점을 인정했고, 2000년대에는 강한 표상주의로 옮겨가 현상적 상태란 객관적인 물리적 속성을 표상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메리가 방을 나와 얻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새로운 표상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만 논증을 만든 사람이 손을 뗐다는 사실이 논증이 죽었다는 뜻은 아니다. 메리는 여전히 교재에 실려 있고 여전히 반박의 대상이다.
여기서 무엇이 합의고 무엇이 아닌지는 분명히 해둘 만하다. 합의된 것은 세 가지다. 네이글의 질문이 의식 연구의 논의 구조를 다시 짰다는 것, 아직 아무도 비판자들을 만족시키는 환원적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네이글 본인은 물리주의가 거짓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 여전히 논쟁 중인 것도 분명하다. 이 간극이 우리 인식의 한계인지 세계의 이음매인지, 그리고 애초에 설명하고 남는 잔여물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지.

박쥐 다음의 박쥐들
질문은 세미나실에 머물지 않았다. 2024년 4월 뉴욕에서 발표된 동물 의식 선언에는 600명이 넘는 연구자가 서명했다. 포유류와 조류의 의식적 경험에는 강한 과학적 근거가 있고, 모든 척추동물과 상당수 무척추동물에게도 현실적 가능성이 있으며, 그 가능성이 있는 한 그것을 무시한 채 동물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내용이다. 확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을 근거로 삼자는 이 전환은, 네이글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채로 안고 가는 방식에 가깝다.
인공지능 쪽에서는 2023년에 열아홉 명의 철학자와 신경과학자가 모여 기존 의식 이론들에서 지표를 뽑아내 현재의 시스템을 채점했다. 결론은 두 겹이었다. 지금의 AI가 의식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의식적인 AI를 만드는 데 근본적인 기술적 장벽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통합정보이론처럼 설명의 방향을 아예 뒤집으려는 시도도 있다. 물리에서 출발해 경험을 도출하는 대신, 경험의 공리에서 출발해 물리적 조건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2023년 124명이 서명한 공개서한이 이 이론을 유사과학이라 불렀다는 사실은, 그 방향 전환이 정당한 수인지조차 아직 합의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박쥐는 그동안 계속 다락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그 울음의 대역폭과 신경 회로와 사냥 성공률을 알아냈고, 앞으로 더 알아낼 것이다. 네이글이 끝에서 넌지시 던진 제안은, 언젠가 주관적 경험을 관점에 매이지 않고도 기술할 수 있는 언어를 우리가 만들어낼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반세기가 지났고 그 언어는 아직 없다. 다만 질문의 모양은 조금 달라졌다. 우리가 그 언어를 갖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박쥐를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박쥐를 또 한 번 지나쳐 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