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와 기름
바다가 세계를 밝히던 시대
19세기 세계를 밝힌 것은 고래였다. 고래기름은 인류 최초의 글로벌 에너지 산업이었고, 그 흥망은 자원 고갈과 기술 대체, 멸종 위기라는 오늘의 에너지 서사를 그대로 예고했다.
1849년 겨울, 뉴욕의 어느 응접실. 벽에 걸린 램프 하나가 방 안을 대낮처럼 밝힌다. 그을음도 냄새도 없는 맑고 흰 불꽃. 그 빛의 연료는 저 남태평양 어딘가에서 4년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배 한 척이, 향유고래의 머리를 갈라 퍼 올린 기름이었다. 19세기 사람들에게 밤을 밝힌다는 것은 곧 고래를 태운다는 뜻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밝은 빛은, 바다에서 가장 큰 짐승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우리는 흔히 에너지의 역사를 석탄에서 석유로, 다시 전기로 이어지는 깔끔한 계단으로 상상한다. 그런데 그 계단에는 잘 언급되지 않는 한 칸이 있다. 석유가 땅에서 솟기 전, 세계의 밤을 밝히고 기계를 돌린 것은 고래였다. 고래기름은 인류 최초의 진정한 글로벌 에너지 산업이었고, 그 흥망은 자원 고갈과 기술 대체와 멸종 위기라는 오늘의 서사를 놀라울 만큼 정확히 예고했다.
고래 머리에서 짜낸 빛
향유고래의 거대한 머리 안에는 반투명한 기름이 가득 찬 기관이 있다. 살아 있을 때는 액체지만 식으면 밀랍처럼 굳는 이 물질을 사람들은 경뇌유, 영어로는 스퍼마세티라 불렀다. 이름부터가 오해의 산물이다. 초기 포경꾼들이 이 흰 물질을 고래의 정액으로 착각한 탓에 '고래 정액 기름'이라는 뜻의 이름이 그대로 굳어졌다. 실제로는 지방산과 알코올이 결합한 왁스에스터, 조명과 윤활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물질이었다.
경뇌유가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다른 어떤 연료보다 밝고 맑게, 그을음과 냄새 없이 탔기 때문이다. 소기름 양초는 검은 연기를 내뿜고 악취를 풍겼지만, 경뇌유로 만든 양초는 깨끗한 흰 불꽃을 냈다. 등대와 가로등, 관공서와 부유한 가정의 응접실이 이 빛을 원했다. 오늘날 빛의 밝기 단위인 '촉광'이 원래 경뇌유 양초 하나의 밝기를 기준으로 정의됐다는 사실은, 이 기름이 한 시대의 표준 광원이었음을 말해 준다.
빛만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이 낳은 정밀 기계 — 시계, 방직기, 각종 공작기계 — 는 고온에서도 끈적해지지 않고 얇게 퍼지는 윤활유를 필요로 했다. 경뇌유가 바로 그 조건에 맞았다. 조명이자 윤활유였던 이 기름은, 도시를 밝히는 동시에 공장을 돌렸다.
한 마리의 고래는 두 종류의 상품을 내놓았다. 머리에서 나오는 최상급 경뇌유가 하나요, 몸통의 지방층을 끓여 짜낸 이른바 '트레인 오일'이 다른 하나였다. 앞의 것은 가장 밝은 빛과 가장 좋은 양초가, 뒤의 것은 값싼 조명과 비누, 가죽 가공용 기름이 되었다. 향유고래 한 마리가 통째로 하나의 정유소였던 셈이다. 바다에서 잡은 짐승 한 마리에서 이렇게 다양한 등급의 연료가 쏟아졌으니,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태평양으로 나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계를 밝힌 최초의 에너지 산업
이 산업의 심장은 매사추세츠의 작은 섬 낸터킷이었다. 퀘이커교도들이 자리 잡은 이 섬에서 포경은 하나의 문명이 되었다. 그러나 고래가 근해에서 사라지자 배들은 점점 더 멀리 나가야 했다. 19세기 중반의 포경선은 대서양을 돌아 태평양과 북극해까지, 3년에서 5년에 걸쳐 지구를 헤맸다. 태평양 한복판에서 잡은 고래를 낸터킷과 뉴베드퍼드에서 정제해 런던과 유럽 시장으로 실어 보내는 구조. 이것이야말로 대륙과 대양을 가로지른 최초의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이었다.
1830년대 중반부터 주도권은 낸터킷에서 이웃 뉴베드퍼드로 넘어갔다. 낸터킷은 항구 입구를 가로막은 모래톱 탓에 커진 배들을 감당하지 못했고, 1846년의 대화재까지 겹치며 쇠락했다. 더 깊은 항구를 가진 뉴베드퍼드는 더 큰 배를 받아들였고, 상인들은 이익을 다시 배에 쏟아부었다. 미국 포경 함대는 1856년 정점에 이르러 593척을 헤아렸는데, 그중 329척이 뉴베드퍼드 소속이었다. 이 도시는 당대에 미국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곳으로 불렸다.
산업의 규모도 상상 이상이었다. 정점 무렵 미국은 해마다 수백만 갤런의 경뇌유와 그보다 더 많은 트레인 오일을 뽑아냈고, 이 기름은 국내를 넘어 유럽까지 팔려 나갔다. 고래기름은 오늘의 원유처럼 전략 물자였고, 19세기 내내 미국 포경선이 잡아 올린 대형 고래는 10만 마리를 넘었다. 밤을 밝히고 기계를 돌리는 힘이 한 나라 함대의 작살 끝에 걸려 있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분명 하나의 에너지 패권이었다.
낸터킷 사람들에게 바다는 농부의 밭이었다. 다만 그 밭에서 자라는 것은 곡식이 아니라, 언제든 배를 부술 수 있는 살아 있는 짐승이었다.

붉게 타오른 낸터킷, 그리고 복수
고래가 순한 연료 공급원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1820년 11월 20일, 낸터킷의 포경선 에식스호는 태평양 한복판에서 2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향유고래에게 두 차례 들이받혀 침몰했다. 20명의 선원은 작은 보트에 나눠 타고 3,000해리 넘는 바다를 표류했고, 굶주림 끝에 죽은 동료를 먹으며 버텼다. 넉 달 뒤 칠레 앞바다에서 구조된 생존자는 다섯 명뿐이었다. 일등항해사 오언 체이스가 남긴 이 참사의 기록은, 훗날 허먼 멜빌이 1851년 《모비딕》의 마지막 장면을 쓰는 밑그림이 되었다.
멜빌의 소설이 그저 모험담이 아니었던 것은, 그 시대의 공기를 그대로 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오래 이긴 쪽은 인간이었다. 1850년대에 이르자 고래는 눈에 띄게 줄었고, 항해는 길어졌으며, 기름값은 치솟았다. 경뇌유 한 갤런은 1856년 무렵 약 1.77달러까지 올라 정점을 찍었다. 고래가 귀해질수록 빛은 비싸졌고, 어느 순간부터 밝은 밤은 부자의 사치가 되어 갔다.
흔히 "석유가 고래를 구했다"지만
여기서 익숙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흔히 1859년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유가 터지고 값싼 등유가 쏟아지자, 고래기름이 밀려나면서 고래가 멸종의 문턱에서 구조됐다고들 한다. 깔끔하고 흐뭇한 서사다. 사실은 순서가 다르다.
첫째, 고래기름 값은 석유가 나오기 한참 전부터 오르고 있었다. 원인은 단순한 고갈이었다. 잡을 고래가 줄어드니 더 멀리 더 오래 나가야 했고, 그만큼 비용이 붙었다. 시장은 이미 스스로 무너지는 중이었다.
둘째, 등유는 석유의 발명품이 아니다. 캐나다의 에이브러햄 게스너는 1854년 석탄에서 등유를 뽑아내는 방법으로 특허를 받았다. 석탄가스 조명은 1850년대에 이미 도시 조명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라드유와 캠핀 같은 값싼 대체재도 앞다투어 램프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시 말해 고래기름은 하나의 경쟁자가 아니라 사방에서 밀려드는 대체재에 포위돼 있었다.
에드윈 드레이크가 1859년 8월 티터스빌에서 유정을 뚫었을 때, 고래기름 소비는 이미 내리막이었다. 석유는 고래를 구한 영웅이 아니라, 자원 고갈과 값싼 대체재가 먼저 벌려 놓은 틈을 마지막으로 파고든 후발 주자에 가까웠다. 사회학자 리처드 요크는 2017년 논문에서 이 인과의 순서를 조목조목 뒤집으며, '석유가 고래를 구했다'는 이야기가 시장의 실제 연대기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고래를 더 많이 죽인 것은 20세기였다
그러나 이 통념을 가장 확실하게 무너뜨리는 것은 20세기 그 자체다. 석유가 정말로 고래를 구했다면, 고래는 안전해졌어야 한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정반대였다.
석유와 강철로 무장한 20세기의 포경은 19세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증기와 디젤로 움직이는 공장선은 잡은 고래를 배 위에서 곧바로 해체했고, 폭약을 단 작살포는 아무리 빠른 고래도 놓치지 않았다. 사냥터는 남극의 먹이터로 넓어졌다. 그 결과 1900년부터 1999년까지 인간이 죽인 대형 고래는 약 290만 마리에 이른다. 19세기 미국 포경이 잡은 10만여 마리와 견주면 수십 배다.
역설은 여기에 있다. 석유 문명은 고래잡이를 끝낸 것이 아니라, 훨씬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등불에서 물러난 고래기름은 이번엔 마가린과 비누, 정밀 윤활유의 원료로 되살아났고, 값싼 동력은 고래를 잡는 속도를 끌어올렸다. 대왕고래와 참고래처럼 느리고 기름진 종은 개체군이 90퍼센트 넘게 무너졌다. 조명 시장에서 고래를 밀어낸 바로 그 문명이, 다른 손으로는 고래를 사상 최대 규모로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에너지가 옛 자원의 쓸모를 대체했다는 것과, 그 자원을 지켜 줬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20세기는 이 둘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290만 번 증명했다.

다 쓰고 나서야
향유고래 기름은 그 뒤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고온과 압력에서도 성질이 변하지 않는 특성 덕분에, 이 기름은 20세기 내내 자동차 변속기 오일과 정밀 기계의 윤활유로 쓰였다. 등불을 밝히던 기름이 이번에는 자동차 밑바닥에서 톱니바퀴 사이를 흘렀던 것이다. 미국이 1970년 향유고래를 보호종으로 지정하고 관련 기름의 수입을 막고 나서야, 산업계는 사막 관목에서 짜낸 호호바 기름 같은 대체재로 눈을 돌렸다. 여기서도 순서는 같았다. 사람들은 고래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마침내 대신할 물질을 찾았기 때문에 고래에서 손을 뗐다. 1946년 출범한 국제포경위원회가 오랜 실패 끝에 1986년 상업 포경 모라토리엄을 관철한 것도, 쓸 만한 대체재가 갖춰지고 나서야 비로소 실효를 거둔 일이었다.
고래기름의 흥망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불편하다. 인류가 어떤 연료에서 벗어난 것은 대개 도덕적 각성 때문이 아니었다. 더 싸고 편한 것이 나타났고, 옛 자원이 먼저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 연료는 옛 문제를 반드시 끝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힘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을, 20세기의 290만 마리가 증언한다.
지금 우리는 화석연료에서 벗어나는 또 하나의 전환 앞에 서 있다. 그렇다면 물어볼 만하다. 우리는 정말 더 나은 것을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옛 기름이 바닥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기름으로 갈아타는, 낯익은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을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