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과 침묵, 조용함은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완전한 침묵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그것을 견디지도 못한다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방에서 사람들은 왜 오래 버티지 못할까. 무향실과 존 케이지의 「4′33″」, 소음의 어원과 산업혁명, WHO가 실측한 몸의 피해를 지나 '조용함'이 돈과 계급이 되기까지를 따라간다.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한 건물 지하에, 기네스가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곳으로 공인한 방이 있다. 오필드 연구소의 무향실이다. 1미터가 넘는 유리섬유 쐐기와 이중 강철벽, 30센티미터 두께의 콘크리트가 바깥세상 소리의 99.99퍼센트를 삼킨다. 안에서 측정된 음압은 영하 24.9데시벨.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한계인 0데시벨보다 한참 아래다. 그런데 이 방에 들어간 사람들은 곧 이상한 것을 듣기 시작한다. 심장이 뛰는 소리, 목의 동맥을 타고 피가 뇌로 올라가는 소리, 위장이 꿈틀대는 소리, 눈을 깜빡일 때 눈꺼풀이 스치는 소리까지. 완벽한 고요를 찾아온 이들은 대신 자기 몸이 얼마나 시끄러운 물건인지를 깨닫는다. 방향 감각을 잃고, 얼마 못 가 문을 두드린다. 연구소 측 설명으로는 이 방에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드물다고 한다. 우리가 침묵이라 부르는 것을, 정작 우리는 견디지 못한다.
완전한 침묵은 없다
1951년, 작곡가 존 케이지는 하버드대학의 무향실에 들어갔다. 절대적인 고요를 기대했지만 그는 두 개의 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았다. 담당 기사는 높은 소리가 그의 신경계가 작동하는 소리이고, 낮은 소리는 피가 도는 소리라고 설명했다. 살아 있는 한 침묵은 없다. 이듬해 케이지는 연주자가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곡 「4′33″」를 내놓았다. 1952년 뉴욕주 우드스톡의 매버릭 콘서트홀,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는 정해진 시간 동안 피아노 뚜껑을 여닫기만 했다.
흔히 이 곡을 '무음의 음악'이라 부른다. 사실은 정반대다. 관객의 헛기침, 창밖의 바람,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 그 4분 33초 동안 우연히 들려온 모든 소리가 곧 곡이다. 케이지는 그것을 "의도된 소리의 부재"라 불렀다. 침묵을 연주한 게 아니라, 늘 거기 있었으나 아무도 듣지 않던 세계의 소음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것이다. 초연을 지켜본 이들은 조롱과 분노와 당혹 사이에서 갈렸지만, 케이지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무엇이 음악이고 무엇이 소음인가, 그 경계는 소리 자체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듣는 우리 마음의 태도에 있는가.
침묵은 없다. 무언가는 언제나 일어나 소리를 낸다. 우리가 조용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사실 듣기를 멈춘 순간일 뿐이다.
무향실에서 사람이 방향 감각을 잃고 불안에 빠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귀는 벽과 천장에 부딪혀 돌아오는 미세한 반향으로 공간의 크기와 자기 위치를 끊임없이 가늠한다. 그 반향이 완전히 사라지면 뇌는 발 디딜 좌표를 잃는다. 게다가 바깥 소리가 끊기면 청각은 감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평소라면 묻혀 있었을 몸속의 소음을 낱낱이 증폭한다. 절대적 고요를 갈망하던 사람이 정작 그 앞에서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는 것은, 침묵이 평화가 아니라 방향을 잃은 몸의 경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사가 케이지에게 들려준 그 설명조차 곧이곧대로 믿을 것은 못 된다. 신경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가 들은 높은 음은 오늘날 이명(耳鳴)으로 이해된다. 바깥의 입력이 끊기면 뇌는 감도를 한껏 끌어올리고, 없는 소리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무향실을 언제 방문했는지, 그것이 「4′33″」의 착상보다 앞섰는지를 두고도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말하자면 침묵의 불가능을 증언하는 그 유명한 일화 자체가, 케이지가 훗날 여러 번 고쳐 되풀이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핵심은 무너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몸은 결코 조용하지 않고, 완전한 침묵은 애초에 인간이 가 닿을 수 없는 장소에 있다.

소음이라는 말의 뿌리
소음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noise는 그 어원부터 병약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이 말을 라틴어 nausea로 거슬러 올린다. 뱃멀미라는 뜻이다. 그 뿌리를 더 파고들면 '배'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naus에 닿는다. 바다를 누비던 그리스인에게 뱃멀미란 소리의 멀미이자 속을 뒤집는 불쾌였고, 그 메스꺼움과 역겨움이 세월을 건너 '시끄러운 소란'이라는 뜻으로 굳었다. 경쟁하는 다른 설은 이 말을 '해악, 상해'를 뜻하는 라틴어 noxia에서 찾는다. 어느 쪽이 맞든 방향은 같다. 인류는 원치 않는 소리를 처음부터 멀미거나 상처로, 즉 일종의 병으로 규정해왔다.
소음이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떠오른 것은 산업혁명이었다. 증기기관이 돌고 방적기가 울고 철도가 대지를 두드리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총량이 폭발했다. 도시는 마차 바퀴와 고가철도의 비명, 공장 기적과 소방 사이렌으로 잠들 줄 몰랐다. 소음은 더 이상 자연의 천둥이 아니라 기계와 자본이 뿜어내는 부산물이 되었다. 굴뚝 옆에서 일하고 그 옆에서 잠드는 사람에게, 소음은 근대라는 시대가 몸에 새기는 서명 같은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소음에 관하여」라는 짧은 글에서, 마부가 휘두르는 채찍 소리를 두고 생각하는 인간의 머릿속을 난도질하는 가장 무례한 방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소리에 관한 이 계급적 감수성은 우연이 아니다. 조용히 사유할 방 한 칸을 가진 사람과, 소음의 발원지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그때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몸을 갉는 소리
흔히 소음을 그저 성가신 것, 취향의 문제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측정된 피해는 취향의 영역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18년 내놓은 유럽 환경소음 지침은 도로 소음을 낮 시간대 53데시벨, 밤 시간대 45데시벨 아래로 낮추라고 권고한다. 데시벨은 로그 척도여서 숫자 10이 오르면 체감상 소리가 대략 두 배로 커진다. 우리가 무심코 넘기는 2, 3데시벨의 차이가 실은 결코 작지 않다는 뜻이다.
문제의 핵심은 귀가 아니다. WHO가 정리한 연구들은 대략 50데시벨을 넘어서면 허혈성 심장질환 위험이 서서히 오른다고 본다. 밤사이 도로 소음에 노출되면, 잠들어 소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고 혈압이 출렁인다. 몸은 자면서도 위협에 대비하느라 깊이 쉬지 못한다. 소음은 청각이 아니라 순환계와 수면을 통해 사람을 갉는다. WHO 추산으로 서유럽에서만 매년 적어도 100만 년의 건강수명이 교통 소음 탓에 사라진다. 그 대부분은 수면 방해와 만성적인 짜증에서 온다. 환경이 사람의 건강에 지우는 부담 가운데 소음은 대기오염 다음으로 크다.
피해는 어른의 심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공항 주변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추적한 유럽의 연구들은, 항공기 소음에 만성적으로 노출된 아동일수록 읽기 능력과 기억력이 뒤처지는 경향을 보고했다. 끊임없이 배경을 채우는 소음이 집중과 학습을 조금씩 갉아먹는 것이다. 조용한 환경이 그저 쾌적함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지 발달과 직결된다는 뜻이며, 이는 곧 어디서 태어나 자라느냐가 몸과 뇌에 남긴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침묵을 길러온 사람들
침묵은 그냥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공들여 훈련되고 제도화된 문화였다. 베네딕도 수도회에는 '대침묵'이 있다. 하루의 마지막 기도를 마친 밤부터 이튿날 아침 기도까지, 수도자들은 입을 닫는다. 침묵은 결핍이 아니라 신을 듣기 위한 조건, 즉 적극적으로 지켜야 할 규율이었다.
침묵이 얼마나 낯선 성취였는지는 독서의 역사가 보여준다. 4세기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소리를 내지 않고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놀라 그 장면을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글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당연했고,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는 묵독은 설명이 필요한 기이한 일이었다. 소리 내지 않는 읽기가 널리 퍼지자 비로소 사람은 책 속으로 홀로 깊이 잠겨들 수 있게 되었고, 그 고요한 몰입을 담아낼 공간으로서 근대의 도서관과 열람실이 태어났다. 벽마다 붙은 '정숙' 표지, 발소리를 삼키는 두꺼운 양탄자, 낮게 낮춘 목소리는 침묵을 학문과 사색과 성스러움의 조건으로 떠받드는 오랜 합의의 잔재다.
오늘 우리가 도서관에서 요구하는 정숙,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문장의 고요는 저절로 주어진 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발명된 습관이다. 인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짓고 지키고 가르쳐왔다. 참지 못할 만큼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간절히 갈망하는 것, 그것이 침묵을 향한 인간의 모순된 마음이다.

조용함이라는 상품
1906년, 뉴욕의 줄리아 바넷 라이스는 '불필요한 소음 억제 협회'를 세웠다. 병원과 학교 곁에서 밤새 울려대는 예인선 경적이 표적이었고, 마크 트웨인 같은 명사들이 그를 거들었다. 이듬해 뉴욕항의 불필요한 기적을 금하는 법이 통과됐고, 도시 곳곳에 '정숙 구역'이 지정됐다. 조용함을 지킬 권리가 처음으로 제도가 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권리는 고르게 나뉘지 않았다. 미국의 여러 연구는 저소득 동네가 부유한 동네보다 밤에 유의미하게 시끄럽고, 흑인이 많이 사는 지역일수록 소음 수준이 높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다. 소음원인 고속도로와 철도, 공항과 공장은 대개 힘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 가까이에 놓였고, 조용한 언덕과 숲과 교외는 그것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조용함은 어느새 사고파는 물건이 되어갔다. 고속도로에서 먼 주택, 두꺼운 벽과 방음창, 노이즈캔슬링 헤드폰, 비즈니스석과 공항 라운지 — 소음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어김없이 값이 붙는다. 심지어 소음 민원 자체가 오래된 동네에서 가난한 주민을 밀어내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누구는 소음을 견디며 살고, 누구는 돈을 치러 그것을 지운다.

소음은 언제나 누군가의 소리다. 진짜 문제는 그 소리를 멈추게 할 힘이 누구에게 있느냐다. 조용함은 어느새 계급이 되었다.
완전한 침묵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그 비슷한 방에 들어간다 해도, 우리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기 몸이 내는 소리에 쫓겨 나온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어이 조용함을 사들인다. 어쩌면 우리가 돈을 치러 손에 넣으려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손에 넣는다 한들 견딜 수도 없는 무엇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것은 정말 도시의 소음일까, 아니면 무향실에서 끝내 들려오던 그 소리 — 살아 있는 한 결코 멈출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소리일까. 완벽한 고요는 오직 죽은 자에게만 허락된다. 어쩌면 우리가 소음을 못 견디는 것이 아니라, 소음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