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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2026-07-269분 읽기

테세우스의 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 — 물질도 기억도 계속 갈리는데, '나'의 동일성은 대체 어디에 발을 딛고 서 있는가.

아테네 사람들은 테세우스의 배에서 썩은 널빤지를 하나씩 빼내고 새 목재로 갈아 끼웠다. 언젠가 원래의 판자는 한 조각도 남지 않았지만, 배는 여전히 항구에 떠 있었다. 그것은 같은 배인가. 이 2천 년 된 물음은 사실 우리 몸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당신의 세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교체되고 있고, 당신의 기억조차 매번 다시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을 당신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위장 안쪽을 덮은 세포는 사나흘이면 통째로 새것으로 바뀐다. 피부의 표피는 두어 주, 혈액 속 적혈구는 약 넉 달을 버틴다. 지금 이 문장을 읽는 동안에도 당신 몸에서는 수백만 개의 세포가 죽고, 그만큼이 새로 태어난다. 물질의 차원에서 보면 '나'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깝다.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갈아 끼우며 형태만 유지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사람'이라 부를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첨단 세포생물학이 던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원전의 항구에서 이미 던져졌다.

항구에 떠 있던 역설

1세기 그리스의 저술가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의 「테세우스」 편에 하나의 배를 기록했다. 테세우스와 아테네 청년들이 크레타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타고 돌아온 서른 개의 노를 가진 배. 아테네인들은 이 배를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의 시대까지, 그러니까 수백 년 동안 보존했다. 방법은 단순했다. 판자가 썩으면 빼내고 튼튼한 새 목재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배가 철학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표준 사례가 되었다고 적는다.

한쪽은 그 배가 동일하게 남아 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그것이 같은 배가 아니라고 맞섰다.

이것이 원전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답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 배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들'에 관한 논리적 물음의 실례가 되었다고 기록했을 뿐이다. 역설의 진짜 아름다움은 답이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상반된 두 답이 둘 다 그럴듯하다는 데 있다. 널빤지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아직 같은 배지"라고 말하는 직관과, 마지막 원본 조각이 사라진 순간 "이제 다른 배잖아"라고 말하는 직관이 우리 안에 동시에 살고 있다.

17세기에 토머스 홉스는 이 역설에 잔인한 반전을 더했다. 『물체론(De Corpore)』에서 그는 물었다. 만약 누군가가 빼낸 헌 널빤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원래의 순서대로 다시 조립해 두 번째 배를 만든다면? 이제 항구에는 두 척의 배가 떠 있다. 하나는 계속 수리되어 원본과 이어져 왔지만 재료는 전부 새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본의 재료를 100퍼센트 물려받았지만 방금 조립되었다. 어느 쪽이 진짜 테세우스의 배인가. 연속성이 정체성을 만드는가, 아니면 재료가 정체성을 만드는가. 홉스는 우리를 양자택일의 벼랑 끝에 세워두고 떠난다.

판자를 하나씩 바꾸는데도 같은 이름을 단 배
그림 1테세우스의 배 역설을 한 장면으로 제시한다.

몸은 실제로 갈리지만, 전부는 아니다

여기서 통념 하나를 정직하게 걷어내야 한다. "7년마다(혹은 10년마다) 몸의 모든 세포가 교체되어 완전히 새 사람이 된다"는 말은 우리가 가장 즐겨 인용하는 과학 상식이지만, 틀렸다.

이 속설의 뿌리는 실재하는 연구에 있다. 2005년,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요나스 프리센 연구팀은 기발한 방법으로 인체 세포의 나이를 측정했다. 냉전 시기 대기권 핵실험은 1963년 무렵까지 대기 중 탄소-14 농도를 자연 수준의 두 배 가까이로 끌어올렸다. 이 방사성 탄소는 그 시기에 만들어진 세포의 DNA에 지문처럼 새겨졌다. 프리센은 이 '폭탄 펄스'를 역이용해 세포가 언제 태어났는지를 거꾸로 계산했다. 그 결과 인체 세포의 평균 나이가 대략 7~10년이라는 값이 나왔고, 여기서 "7년마다 새 몸"이라는 표현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평균이라는 데 있다. 평균은 실상을 가린다. 어떤 세포는 며칠 만에 갈리지만, 어떤 세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교체되지 않는다.

  • 대뇌 피질의 신경세포. 프리센의 측정에서 시각 피질의 뉴런은 언제나 그 사람 본인과 정확히 같은 나이였다. 기억과 사고를 담당하는 대뇌 피질의 신경세포는 태어날 때 만들어진 그것이, 대체로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
  • 눈 수정체의 중심핵. 수정체 한가운데를 이루는 세포들은 배아 시절 만들어진 바로 그 세포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고, 죽는 날까지 교체되지 않는다.
  • 치아의 법랑질. 에나멜은 애초에 살아 있는 조직이 아니어서 재생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번 깎이면 몸은 그것을 새로 만들지 못한다.

반대로 순수하게 사변적인 직관을 배신하는 사실도 있다. 오랫동안 심장 근육세포는 평생 교체되지 않는다고 여겨졌지만, 역시 프리센 팀의 탄소-14 연구는 성인의 심장도 새 근육세포를 만든다는 것을 보였다. 다만 지극히 느리게. 25세의 심장은 연간 약 1퍼센트의 심근세포를 갈아 끼우고, 75세에는 그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다. 계산해보면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갈아 치우는 심장 근육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나를 '나'라고 느끼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하드웨어 — 생각하고 기억하는 대뇌 피질 — 는 테세우스의 배와 정반대다. 배는 재료가 전부 바뀌어도 형태가 남았지만, 뇌는 형태를 담은 재료 상당수가 처음 그대로 남는다. 그러니 세포 교체 신화는 매력적인 만큼이나 게으른 위안이다. 우리는 물질을 통째로 갈아엎으며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몸의 어떤 부분은 완고하게, 태어난 순간의 자신을 붙들고 있다.

교체되는 부분과 유지되는 구조를 비교하는 장면
그림 2물질 교체와 정체성 지속을 구분한다.

로크: 나는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다

그러나 설령 대뇌 피질의 세포가 그대로라 해도, 그것이 곧 '나'의 동일성을 보장해줄까. 뇌라는 물질 덩어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과, 내가 나로서 이어진다는 느낌은 같은 것이 아니다. 17세기 말 존 로크는 바로 이 틈을 파고들었다.

로크는 『인간지성론』에서 결정적인 구분을 세웠다. **인간(man)**과 **인격(person)**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생물학적 신체이고, 인격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는 사고하는 존재다. 그리고 로크에게 정체성의 자리는 물질(신체나 영혼이라는 실체)이 아니라 의식의 연속성, 곧 기억이었다.

인격의 동일성은 실체가 아니라 의식에 달려 있다.

그는 유명한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한 왕자의 의식과 기억이 어느 구두 수선공의 몸으로 옮겨간다고 상상해보라. 수선공의 몸으로 깨어난 자는 자신을 왕자로 기억하고 왕자로서 생각한다. 로크의 답은 명료하다. 그는 여전히 왕자라는 인격이다. 비록 그 '인간'은 수선공일지라도. 정체성을 잇는 것은 살덩이가 아니라, 그 안을 흐르는 기억의 실이다. 이 관점을 심리적 연속성 이론이라 부른다. 파핏, 슈메이커, 데이비드 루이스에 이르는 현대의 거의 모든 논의가 로크의 이 통찰에서 갈라져 나왔다.

로크의 이론은 세포 교체 신화가 주지 못한 위안을 준다. 몸의 재료가 다 바뀌어도, 내 기억이 어제와 오늘을 잇는 한 나는 나다. 테세우스의 배로 치면, 정체성을 잇는 것은 널빤지가 아니라 '항구에 계속 떠 있었다는 이력'인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 정직하게 그어야 할 금이 있다. 기억은 널빤지보다 더 잘 썩는다. 우리는 다섯 살의 자신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로크의 논리를 곧이곧대로 따르면, 유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의식의 연속성이 끊겨 있으니 나는 그 아이와 동일 인격이 아니게 된다. 18세기 철학자 토머스 리드는 이 허점을 날카롭게 찔렀다. 소년 시절 과수원에서 매를 맞은 일을 기억하는 젊은 장교가, 첫 전투에서 무공을 세우던 순간 그 매질을 기억한다고 하자. 세월이 흘러 노장군이 된 그는 무공의 순간은 기억하지만 소년 시절의 매질은 잊었다. 로크식으로 따지면 노장군은 젊은 장교와 동일인이고, 젊은 장교는 소년과 동일인인데, 정작 노장군과 소년은 동일인이 아니게 된다. 동일성은 A=B, B=C면 A=C여야 하는데, 기억은 이 사슬을 지켜주지 못한다. 게다가 오늘날의 심리학은 기억이 재생이 아니라 재구성임을 안다. 우리는 과거를 꺼내 볼 때마다 조금씩 다시 쓴다. 로크가 정체성의 반석으로 삼은 그 기억이, 실은 가장 흐물흐물한 널빤지였던 것이다.

기억 조각을 의식의 실로 잇는 장면
그림 3로크의 기억·의식 중심 동일성 관점을 압축한다.

파핏: 어쩌면 동일성은 중요하지 않다

20세기 옥스퍼드의 철학자 데릭 파핏은 이 문제를 더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도구는 순간이동 장치였다.

『이성과 인격(Reasons and Persons)』에서 파핏은 상상한다. 순간이동기에 들어가면 기계가 당신 몸의 분자 구조를 완벽히 스캔한다. 그 과정에서 지구의 당신은 파괴되고, 데이터는 화성으로 전송되어 그곳의 기계가 똑같은 분자 구조로 당신을 재조립한다. 화성에서 깨어난 사람은 당신의 모든 기억과 성격을 지녔고, 스스로를 당신이라 느낀다. 그는 당신인가. 대부분은 망설이면서도 "그렇다"고 답하고 싶어 한다.

그러자 파핏은 결정타를 날린다. 분기(branching) 사례. 이번엔 스캔을 해도 지구의 원본이 파괴되지 않는다. 동시에 화성에도 완벽한 복제가 만들어진다. 이제 당신과 똑같은 기억, 똑같은 심리를 가진 두 사람이 존재한다. 둘 중 누가 '진짜 당신'인가. 지구의 사람? 그는 원본이지만, 화성의 사람도 당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연속성을 가진다. 논리적으로 당신은 두 사람 모두일 수 없고(동일성은 일대일이므로), 어느 한쪽이라고 할 근거도 없다. 이것은 홉스의 두 척의 배가 사람의 몸으로 돌아온 것이다.

파핏의 결론은 도발적이다. 이 물음에 답이 없다면, 애초에 잘못된 질문을 던진 것이다.

개인의 동일성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진짜로 신경 쓰는 것은 '이 미래의 존재가 엄밀한 의미에서 나와 동일한가'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기억과 성격과 의도가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 — 그가 '관계 R'이라 부른 심리적 연속성과 연결성 — 이다. 화성의 복제가 나의 기억과 계획을 고스란히 이어간다면, 그가 '엄밀히 나'인지 아닌지는 사실 부차적이다. 정체성이라는 딱딱하고 전부 아니면 전무인 개념을, 파핏은 정도(degree)의 문제인 심리적 연속성으로 녹여버린다. 테세우스의 배가 '진짜냐 가짜냐'를 다투는 것이 무의미하듯, '어제의 내가 진짜 나냐'를 다투는 것도 무의미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이야기가 이어졌다는 사실이지, 같은 판자냐 아니냐가 아니다.

순간이동 장치 앞에서 동일성을 저울질하는 장면
그림 4완전한 동일성보다 심리적 연속성이 중요하다는 문제를 드러낸다.

이야기로 이어지는 나

물질도 불완전하고, 기억도 불완전하다면, '나'는 결국 어디에 발을 딛는가. 20세기 후반의 여러 사상가들은 뜻밖의 답에 도달했다. 나를 잇는 것은 하나의 재료도, 하나의 기억도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는 『타자로서 자기 자신』에서 두 종류의 동일성을 나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같음(idem)'의 동일성과, 변화 속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남는 '자기됨(ipse)'의 동일성. 테세우스의 배가 잃은 것은 앞의 것이지만, 우리가 삶에서 붙드는 것은 뒤의 것이다. 그리고 자기됨을 지탱하는 형식이 바로 서사다. 리쾨르에게 자아는 완성된 사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이야기로 엮는 과정에서 비로소 생겨난다. 그 이야기는 홀로 쓰이지도 않는다. 가족, 공동체, 친구와 적의 이야기와 얽히고 부딪히며 짜인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에서 더 단호하게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는 동물이라고. 뿔뿔이 흩어진 삶의 사건들 — 유년기, 첫사랑, 실패, 전환 — 을 하나의 줄거리로 꿸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일관된 자기를 갖는다. 정체성은 발견되는 실체가 아니라, 살아내며 엮어가는 서사적 통일성이다.

이것은 사변만이 아니다. 심리학자 댄 맥애덤스는 '삶의 이야기 정체성 모델'로 이 통찰을 실증 연구의 영역으로 가져왔다. 그에 따르면 성인은 자신의 과거 경험을 하나의 내면화된 이야기로 구성함으로써 '나는 누구인가'라는 감각을 만든다. 흥미롭게도, 시련을 '그 덕에 성장했다'는 구원의 서사로 엮는 사람일수록 심리적 안녕이 높다는 결과가 반복해서 관찰된다. 우리는 겪은 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겪은 일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로 만들어진다.

흩어진 삶의 조각을 하나의 이야기로 꿰매는 장면
그림 5자아를 고정 물질보다 계속 편집되는 서사로 보여준다.

그러니 다시 항구로 돌아가자. 아테네인들이 그 배를 수백 년간 '테세우스의 배'라 부른 이유는 널빤지가 같아서도, 어떤 물질적 본질이 남아서도 아니었다.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 — 크레타에서 괴물을 물리치고 돌아온 영웅의 귀환이라는 서사 — 를 계속 짊어졌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잇는 것도 어쩌면 그것이다. 내 몸의 위세포는 나흘 뒤면 사라지고, 다섯 살의 기억은 거의 남지 않았으며, 대뇌 피질의 뉴런조차 완벽한 보증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나다. 왜냐하면 나는 어제의 나로부터 오늘의 나에게로 이야기를 넘겨주는 일을 매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성은 창고에 보관된 원본 널빤지가 아니라, 항해를 멈추지 않는 배의 이력 속에 있다. 당신은 고정된 사물이 아니다. 당신은 계속 쓰이고 있는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