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전의 초상 — 얼굴을 남기려는 욕망
파이윰의 미라 초상에서 연인의 눈, 실루엣과 데스마스크를 거쳐 카르트 드 비지트까지
사진이 없던 시절 얼굴을 남긴다는 건 부자의 특권이자 죽음에 맞선 의식이었다. 하와라에서 나온 파이윰 초상, 상아 위에 그린 연인의 눈, 몇 센트짜리 실루엣과 피지오노트라스, 석고로 뜬 데스마스크, 그리고 인터넷에 잘못 퍼진 빅토리아 시대 사후 사진의 진짜 모습까지 — 사라지는 얼굴을 붙잡으려 한 2천 년의 기술사를 따라간다.
이집트 하와라의 모래에서 나온 나무판이 하나 있다. 손바닥만 한 판자 위에 밀랍을 녹여 갠 물감으로 한 여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크고 젖은 눈, 살짝 돌린 목, 금박을 입힌 귀걸이. 1,900년 전 사람인데 어제 찍은 증명사진처럼 이쪽을 똑바로 본다. 이 판자는 벽에 걸려 있던 게 아니다. 붕대로 감긴 시신의 얼굴 자리에 끼워 넣어, 아마포를 뚫은 창처럼 죽은 사람이 계속 밖을 내다보게 만든 장치였다.
얼굴은 원래 부자만 가질 수 있었다
이런 판을 파이윰 초상이라 부른다. 로마가 이집트를 지배하던 1세기부터 3세기 중반까지, 그리스식 회화 기법과 이집트식 미라 제작이 겹친 자리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약 900점. 참나무, 삼나무, 사이프러스, 무화과나무처럼 수입한 목재를 얇게 켜서 밀랍 물감이나 템페라로 그렸다. 게티 미술관이 세계 여러 기관과 함께 진행한 APPEAR 프로젝트는 이 판들의 안료와 나무를 하나하나 분석해 고대 공방의 작업 방식까지 복원해 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숫자다. 하와라를 발굴한 플린더스 페트리는 자기가 파낸 미라 가운데 초상이 붙어 있던 것은 1~2퍼센트에 불과했다고 적었다. 나머지 아흔여덟은 얼굴 없이 묻혔다. 초상은 장례의 기본 옵션이 아니라 군인, 관리, 신전 고위직 같은 사람들이 돈을 얹어 사는 물건이었다.
로마 본토에서도 사정은 같았다. 귀족 가문의 아트리움에는 나무 장롱이 하나 있었고, 그 안에 조상들의 밀랍 얼굴이 들어 있었다. 라틴어로 이마기네스라 부른 이 가면은 장례 행렬에서 배우들이 뒤집어쓰고 걸어, 죽은 이가 조상들과 함께 걷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흔히 데스마스크라 옮기지만 실은 살아 있을 때 떴다. 펜 박물관 연구진의 설명에 따르면 보통 서른다섯에서 마흔 살, 조영관 자리에 올랐을 무렵이다. 얼굴을 뜰 자격 자체가 신분 증명이었다는 뜻이다. 밀랍은 약해서 지금 남은 실물은 한 점도 없다. 폴리비오스와 플리니우스의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얼굴들이다.

손톱만 한 얼굴을 목에 걸다
중세 필사본의 채색 기술이 16세기 궁정으로 흘러들면서 초상 미니어처가 태어났다. 처음엔 양피지, 나중엔 상아 위에 수채로 그렸다. 크기는 대개 엄지손톱에서 달걀 정도. 로켓이나 반지, 브로치에 넣어 몸에 지녔다. 에나멜을 구워 색을 고정하는 기법까지 더해지자 미니어처는 땀과 세월을 견디는 물건이 됐다.
이 장르는 18세기 말에 기묘한 막내를 하나 낳는다. 얼굴 전체가 아니라 눈 하나만 그린 미니어처다. 1790년부터 1810년 무렵까지, 상아 위에 수채로 왼눈이나 오른눈만 덩그러니 그려 반지와 로켓에 박았다. 후대의 골동상이 붙인 이름이 '연인의 눈'이다. 영국에서 이 유행에 불을 붙인 사람은 훗날의 조지 4세였다. 왕세자 시절, 신분이 맞지 않는 과부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마리아 피츠허버트에게 그는 자기 눈을 그린 그림과 함께 청혼을 보냈다. 그리고 죽을 때 그녀의 눈 그림을 몸에 지닌 채 묻혔다.
눈 하나만 그린 이유는 명확하다. 얼굴 전체는 누구나 알아본다. 눈 하나는 아는 사람만 안다. 공개할 수 없는 관계를 몸에 걸고 다니기 위한 암호였고, 동시에 상대가 사라진 뒤에도 남는 신체의 파편이었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죽은 이의 머리카락을 엮어 브로치에 넣는 애도 장신구가 함께 유행했다. 얼굴이든 머리카락이든, 사람들은 사라진 몸의 일부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고 싶어 했다.

그림자가 서민의 초상이 된 이유
초상의 기원 설화 자체가 그림자다. 플리니우스는 『박물지』에서, 코린토스 도공 부타데스의 딸이 먼 길을 떠나는 연인의 얼굴 그림자를 등잔불에 비추어 벽에 대고 윤곽을 그렸다고 적었다. 아버지가 그 선을 따라 점토를 눌러 부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회화의 시작이 이별과 부재였다는 것.
18세기 중반, 검은 종이를 오려 만든 옆얼굴이 유럽에서 폭발적으로 퍼졌다. 당시 이름은 그냥 '그림자'나 '옆모습'이었다. 실루엣이라는 말이 붙은 건 19세기 들어서였고, 어원은 사람 이름이다. 7년 전쟁으로 재정이 무너진 1759년 프랑스에서 재무총감을 맡은 에티엔 드 실루에트는 부유층을 겨냥한 혹독한 긴축을 밀어붙였고, 그 바람에 그의 이름은 '싸구려'의 동의어가 됐다. 초상의 최하위 등급에 붙기 딱 좋은 별명이었다.
싸다는 게 핵심이다. 유화 초상 한 점이 50달러를 넘던 시절, 종이 옆얼굴은 몇 분과 몇 센트면 됐다. 여기에 기계가 끼어든다. 질-루이 크레티앵이 만든 피지오노트라스는 접안렌즈로 앉은 사람을 보며 막대로 얼굴 윤곽을 따라가면 팬터그래프가 연결된 연필을 움직여 옆모습을 그려 주는 장치였다. 사이언스 뮤지엄 그룹 소장품에는 크레티앵이 판각한 마담 롤랑의 피지오노트라스 초상이 남아 있다.
미국에서 이 기계는 아예 산업이 됐다. 1802년 존 아이작 호킨스가 새로운 방식을 특허 냈고, 박물관 주인이자 화가였던 찰스 윌슨 필이 이를 자기 박물관 한구석에 설치했다. 앉은 사람이 직접 뺨을 받침대에 대고 놋쇠 촉으로 자기 얼굴을 훑으면 종이 넉 장이 한꺼번에 오려져 나왔다. 미술사학자 웬디 벨리언에 따르면 어느 운영자는 1년에 8,000장 넘는 실루엣을 만들었다. 필의 박물관에서 실제로 종이를 오린 사람은 모지스 윌리엄스, 필의 노예였다가 해방된 흑인이었다. 그는 한 장에 6센트, 나중에는 8센트를 받았고 결국 필라델피아에 자기 집을 샀다.
화가가 필요 없는 초상이 처음 등장한 순간이었다. 얼굴을 남기는 일이 재능의 문제에서 장비와 몇 센트의 문제로 옮겨 간 것, 사진이 한 일은 이 이동의 마지막 구간이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뜬 얼굴
살아 있을 때 얼굴을 뜨지 못했다면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죽은 직후 석고를 부어 뜨는 데스마스크다. 나폴레옹과 베토벤의 얼굴이 그렇게 남았다. 여기엔 초상화의 해석도 사진의 각도도 없다. 피부에 직접 닿아 굳은 물질이 그대로 얼굴이 된다. 가장 정확하지만 가장 죽은 얼굴이다.
가장 유명한 데스마스크는 이름이 없다. 1880년대 후반 파리에서 센강에 떠오른 젊은 여자의 얼굴을 시체안치소에서 떴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만 이 사연은 검증된 적이 없고, 결핵으로 죽은 모델의 얼굴이라는 설, 독일 가면 제작자의 딸이라는 설이 나란히 돈다. 확실한 건 그 미소가 20세기 초 유럽 예술가들의 벽을 뒤덮었다는 것이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너무나 기만적이어서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미소"라고 썼다. 그리고 이 얼굴은 20세기 중반 심폐소생술 훈련 인형의 얼굴로 재사용됐다. 수천만 명이 이름 모르는 사람의 입에 숨을 불어넣으며 응급처치를 배웠다.

흔히 아는 그 사진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1839년 다게레오타입이 공개되고 2년 만에 첫 사후 사진이 찍혔다. 그리고 이 장르에는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오해가 하나 붙어 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시신을 세워 놓고 금속 스탠드로 지탱해 산 사람처럼 찍었다는 이야기다.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사진 아래쪽에 보이는 쇠 받침대의 다리다. 하지만 그 물건은 죽은 사람을 세우는 도구가 아니라 산 사람을 붙잡아 두는 도구였다. 초기 노출 시간은 몇 초에서 몇 분에 이르렀고, 그 사이 눈을 깜빡이거나 몸을 흔들면 얼굴이 뭉개졌다. 그래서 스튜디오에는 목 뒤를 받치는 헤드레스트가 있었다. 사이언스 뮤지엄 그룹이 소장한 1880년경 독일제 '범죄자 포즈 의자'가 그 계보다. 등받이에 금속 머리 받침이 달린 이 의자는 베르티용식 신원 확인 사진을 찍을 때 살아 있는 피의자를 고정하려고 만들어졌다. 애초에 그런 받침대는 사람의 체중을 지탱하도록 설계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진 속에 받침대 다리가 보인다면, 그건 피사체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에 가깝다.
실제 사후 사진의 표준 구도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었다. 1873년 1월 『필라델피아 포토그래퍼』에 실린 사진사 찰리 E. 오어의 실무 지침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신을 소파나 긴 의자에 눕히고, 카메라는 그 발치 정면에 세우라고. 눕힌 몸, 감은 눈, '마지막 잠'이라 불린 자세. 가족이 함께 앉아 시신의 손을 잡은 구도. 이것이 압도적 다수다.
그렇다고 손을 전혀 대지 않은 건 아니다. 같은 지침은 티스푼 손잡이로 눈꺼풀을 밀어 올려 눈을 뜨게 하는 법을 설명하고, 이후 리터칭으로 멍한 시선을 지우라고 조언한다. 앰브로타입이나 틴타입에는 뺨에 붉은빛을 칠해 넣기도 했다. 조작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그 조작은 눈꺼풀과 볼에 국한된 국지적인 것이었지 시신을 철제 구조물에 세워 산 사람으로 위장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진사들은 죽음을 감추기보다 잠으로 번역했다. 영국의 사후 초상을 연구한 오드리 링크먼도 이 장르를 속임수가 아니라 애도의 형식으로 읽는다.
20프랑에 열두 장
얼굴이 진짜로 값싸진 시점은 1854년이다. 앙드레 아돌프 외젠 디스데리가 명함 크기 사진 카르트 드 비지트를 특허 냈고, 1859년 나폴레옹 3세의 사진을 이 형식으로 내면서 폭발했다. 그는 열두 장에 20프랑을 받았다. 그전까지 사진 한 장 값이 50~100프랑이었다. 유리 원판 하나에 여러 장을 동시에 노출하는 카메라가 나오면서 한 사람의 얼굴이 처음으로 복제 가능한 물건이 됐다. 사람들은 그걸 주고받고 앨범에 꽂았다. 당대의 표현으로 '카르도마니아'였다.
이 순간 미니어처와 실루엣, 피지오노트라스는 한꺼번에 밀려났다. 파이윰의 1~2퍼센트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열두 장에 20프랑으로 끝난 셈이다.
얼굴을 남기려는 충동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바뀐 건 가격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하루에 몇 장씩 찍는 셀피도 같은 계보 위에 있다. 다만 방향이 뒤집혔다. 파이윰의 여자는 딱 한 장의 얼굴로 영원을 감당해야 했고, 우리는 수천 장을 찍고 대부분을 지운다. 얼굴이 무한히 싸졌을 때, 사라지는 얼굴을 붙잡으려는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클라우드에 쌓인 수만 장 가운데 당신이 죽은 뒤 남길 얼굴은 누가 고르게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