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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언어]2026-09-0810분 읽기

헛소리의 철학 — 거짓말보다 위험한 것

거짓말보다 위험한 것

거짓말쟁이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일을 할 수 있다. 헛소리하는 사람은 진실이 어디 있는지 알 필요가 없다. 해리 프랭크퍼트는 1986년 논문에서 이 차이가 왜 결정적인지를 밝혔고, 헛소리가 거짓말보다 더 큰 진실의 적이라고 결론지었다. 병실의 비트겐슈타인에서 독립기념일 연설, 발리바르의 한 문장, 그리고 오늘의 언어모델까지.

1930년대 케임브리지, 이블린 요양원의 병실이었다. 파니아 파스칼은 편도선 수술을 막 마치고 자기연민에 빠져 누워 있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병문안을 왔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꼭 차에 치인 개가 된 기분이에요." 비트겐슈타인은 역겨워하며 대꾸했다. "당신은 차에 치인 개가 어떤 기분인지 모르잖아요."

파스칼이 훗날 회고록에 적은 이 짧은 장면은 오랫동안 괴팍한 철학자의 일화 정도로 읽혔다. 그런데 1986년, 프린스턴의 도덕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가 바로 이 대목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물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도대체 무엇에 화가 났을까. 파스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아팠다. 개가 차에 치이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그를 불쾌하게 했다.

그 물음에서 출발한 글이 문예지 『래리턴』에 실린 「헛소리에 관하여」였다. 프랭크퍼트는 첫 문단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 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헛소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모두가 이것을 안다, 우리 각자가 자기 몫을 보태고 있다. 그런데도 아무도 이것을 연구하지 않았다고 그는 덧붙인다. 우리에게는 헛소리에 대한 이론이 없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19년 뒤인 2005년에 프린스턴대학출판부에서 손바닥만 한 단행본으로 나왔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스물일곱 주 동안 머물렀다. 철학 논문으로서는 기이한 사건이었다.

진실을 알아야 거짓말을 할 수 있다

프랭크퍼트의 대답은 이랬다. 파스칼은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맞고 틀림을 따지는 일에 애초에 들어오지 않은 채 말했다. 그녀는 차에 치인 개의 기분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상태를 지목했지만, 그 상태를 알지 못했고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그저 활기차 보이려고, 혹은 말맛을 살리려고 어디선가 주워온 표현을 꺼냈을 뿐이다. 프랭크퍼트는 이렇게 정리한다. 그녀의 잘못은 사실을 제대로 맞히지 못한 데 있지 않고, 아예 맞히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거짓말은 이것과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프랭크퍼트의 문장은 단호하다.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려면 자신이 진실을 안다고 생각해야 한다. 거짓말쟁이는 진실의 지도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그 지도를 보면서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거짓말이다. 그러니 거짓말쟁이는, 역설적이게도, 진실에 붙들려 있다. 진실이 어디 있는지 모르면 그는 일을 할 수가 없다.

dkdk가 과녁의 정중앙이 어디인지 자로 정확히 재어 확인한 다음, 일부러 그 옆을 겨눠 화살을 쏜다
그림 1진실이 어디 있는지 모르면 그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참의 편도, 거짓의 편도 아닌

헛소리하는 사람은 그 지도가 필요 없다. 그는 자기가 하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해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 프랭크퍼트가 논문의 핵심에서 쓴 문장은 이렇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진실에 응답하고 있으며, 그런 한에서 진실을 존중한다. (…) 그러나 헛소리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판돈이 전부 걸려 있지 않다. 그는 참의 편도 거짓의 편도 아니다. 그의 눈은 애초에 사실을 향해 있지 않다.

여기서 통념 하나가 무너진다. 우리는 헛소리를 거짓말의 순한 버전, 그러니까 죄질이 가벼운 거짓말 정도로 취급한다. 프랭크퍼트는 정확히 반대로 본다. 거짓말쟁이와 정직한 사람은 같은 경기장에 서 있다. 한 명은 규칙을 지키고 한 명은 반칙을 하지만, 둘 다 참과 거짓의 구분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 구분에 반응한다. 헛소리하는 사람은 반칙을 하는 게 아니라 경기장 밖으로 걸어 나간다. 그는 진실의 권위를 거부하지 않는다. 아예 쳐다보지 않는다. 그래서 프랭크퍼트는 이렇게 썼다. 헛소리는 거짓말보다 더 큰 진실의 적이다.

이 정의에는 사람들이 잘 눈치채지 못하는 결과가 하나 딸려 온다. 헛소리는 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을 향하지 않은 채 목적에 맞는 문장을 집어 오다 보면 그중 일부는 우연히 맞는 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참인지 여부는 말한 사람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므로, 맞았다고 해서 헛소리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참과 거짓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헛소리를 잡아낼 수 없다. 잡아내려면 다른 축이 필요하다. 이 사람이 지금 진실이라는 것을 상대하고 있는가, 아닌가.

dkdk가 참과 거짓 눈금만 새겨진 자를 옆으로 내려놓고, 그것과 직각으로 놓인 다른 자를 새로 집어 든다
그림 2잡아내려면 다른 축이 필요하다

정성껏 만든 헛소리

비트겐슈타인이 좌우명으로 삼고 싶다고 말한 롱펠로의 시구가 있다. 옛 시절의 장인들은 눈에 띄지 않는 자잘한 부분까지 정성을 다해 지었다, 신들은 어디에나 있으므로. 그렇다면 헛소리란 대충 만든 물건 같은 것일까. 프랭크퍼트는 여기서 흥미로운 반례를 든다. 광고와 홍보, 그리고 그와 한 몸이 되어버린 정치의 영역이야말로 헛소리의 가장 이론의 여지 없는 고전적 전형인데, 정작 그곳에는 시장조사와 여론조사와 심리검사를 총동원해 자기가 내놓는 모든 단어와 이미지를 정확히 맞추는 데 지칠 줄 모르고 헌신하는 지극히 정교한 장인들이 있다.

단어 하나를 놓고 몇 주를 회의하면서, 그 문장이 참인지는 한 번도 묻지 않는 사람들. 이것이 헛소리가 제도가 되는 방식이다. 프랭크퍼트가 든 장면은 미국 독립기념일 연설이다. 연사는 "신의 인도 아래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낸 건국의 아버지들"을 읊는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청중이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해 무엇을 믿게 될지에 그는 애초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청중이 자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다. 애국자로, 역사의 무게를 아는 사람으로, 신 앞에 겸손한 사람으로.

프랭크퍼트는 헛소리가 대량생산되는 조건도 짚는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면서도 말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 헛소리는 불가피하다. 말할 의무나 기회가 아는 것보다 클 때 그 격차는 헛소리로 메워진다. 실적 발표와 청문회, 브랜드 미션 스테이트먼트, 그리고 시민이라면 세상 모든 일에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널리 퍼진 믿음이 전부 그 격차를 넓힌다. 조직에서 헛소리가 특히 잘 자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도 답을 모르는 자리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발언해야 하고, 발언의 성패는 그 말이 맞았는지가 아니라 자리에 어울렸는지로 평가된다. 그 평가 기준이 반복되면 헛소리는 개인의 습관이 아니라 직무 기술이 된다.

dkdk가 작업대에서 정밀한 도구로 아주 공들여 무언가를 깎고 있는데, 완성된 그 물건의 속이 텅 비어 있다
그림 3그 평가 기준이 반복되면 헛소리는 개인의 습관이 아니라 직무 기술이 된다

발리바르는 정직한 사상가였다

옥스퍼드의 정치철학자 제럴드 코헨은 1986년에 이 논문을 읽고 반했다. 그리고 2002년에 반론을 쓰려고 다시 읽었다가 방향을 틀었다. 자신이 아는 헛소리, 즉 학술서에 실리는 헛소리에는 프랭크퍼트의 정의가 잘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헨이 내린 결론은 반박이 아니라 분업이었다. 둘은 서로 다른 헛소리를, 서로 다른 설명 대상을 다루고 있다는 것.

코헨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두 항목을 근거로 삼는다. 하나는 "허튼소리, 쓰레기"이고 다른 하나는 "하찮거나 진실하지 못한 말이나 글"이다. 프랭크퍼트가 다루는 것은 두 번째, 화자의 마음 상태가 물건의 성격을 결정하는 종류다. 코헨의 표현으로는 황소가 바지를 입고 있는 셈이다. 반면 첫 번째 항목은 만든 사람의 마음을 전혀 참조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똥이 바지를 입는다. 결과물이 헛소리이면 헛소리다.

코헨이 드는 사례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한 문장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변증법이라는 관념에 부여할 수 있는 첫 번째 의미다. 즉, 역사의 바로 그 직물 속에서 계급투쟁이 갖는 결정적 개입에 특별히 적합한 논리 혹은 설명의 형식.

빨리 읽으면 꽤 그럴듯하게 들린다고 코헨은 말한다. 천천히 읽으면 헛소리의 완벽한 전형임을 알게 된다고. 그러고는 한 줄을 덧붙인다. 그런데 나는 발리바르가 정직한 사상가임을 안다. 정직한 사람이 헛소리를 내놓을 수 있고, 진실에 무관심한 사람이 어쩌다 참을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코헨이 보기에 프랭크퍼트의 설명은 물가 전체를 덮지 못한다. 코헨이 제시한 판별법은 잔인할 만큼 간단하다. 문장에 부정어를 하나 넣거나 빼도 그럴듯함의 정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 문장에서는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의와 전략과 증거를 이유로 이렇게 권한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비판해야지, 보이지 않는 과정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남의 마음속은 열어볼 수 없으니까.

기계는 환각을 보지 않는다

2024년 글래스고 대학의 마이클 타운센 힉스, 제임스 험프리스, 조 슬레이터는 학술지 『윤리와 정보기술』에 「ChatGPT는 헛소리다」라는 제목의 논문을 실었다. 업계는 대형언어모델이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 현상을 환각이라 부른다. 세 사람은 그 은유가 틀렸다고 주장했다. 환각을 보려면 먼저 세계를 보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고, 거짓말을 하려면 진실을 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델들은 세계를 정확히 재현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도록 설계됐다. 세 사람은 헛소리를 둘로 나눈다. 무른 헛소리는 진실에 대한 관심 없이 만들어지되 자기 의도에 관해 청자를 속이려는 뜻은 없는 것이고, 굳은 헛소리는 그 속임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최소한 무른 쪽이라는 게 그들의 결론이다. 프랭크퍼트의 파스칼이 그랬듯이, 기계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맞고 틀림에 들어오지 않은 채 말한다.

dkdk가 문장을 계속 뱉어내는 기계 옆에 참과 거짓을 재는 저울이 놓여 있는데, 문장들이 저울 위를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린다
그림 4기계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맞고 틀림에 들어오지 않은 채 말한다

성실함마저 헛소리라면

1986년 에세이의 마지막 단락에서 프랭크퍼트는 헛소리의 근원을 훨씬 깊은 곳에서 찾는다. 객관적 실재에 믿을 만하게 닿을 수 없다는 회의주의가 퍼지면, 사람들은 정확함이라는 이상을 포기하고 성실함이라는 다른 이상으로 후퇴한다. 공통의 세계를 정확히 재현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재현하는 쪽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사실에 충실할 수 없으니 자기 자신에게라도 충실하자는 태도.

dkdk가 바깥 세상을 재던 자를 손목만 돌려 거울 쪽으로 향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잰다
그림 5사실에 충실할 수 없으니 자기 자신에게라도 충실하자는 태도

그리고 프랭크퍼트는 여기에 마지막 칼을 꽂는다. 우리 자신의 본성은 다른 사물의 본성보다 더 단단하기는커녕 훨씬 불안정하고 덜 고유하다. 세계에 대해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가릴 수 없다. 그래서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이 나온다. 성실함 그 자체가 헛소리다.

프랭크퍼트를 읽고 나면 남는 것은 남을 향한 고발장이 아니라 거울이다. 오늘 당신이 입 밖에 낸 문장들 중에, 참인지 거짓인지 스스로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문장은 몇 개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