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산업이 되는 순간
'덕질'의 경제학 — 좋아하는 일이 산업이 되는 그 문턱에서
어떤 취미든 충분히 많은 사람이 충분히 진지하게 빠져들면, 어느 순간 시장이 그 옆에 조용히 개업한다. 좋아하는 일이 돈이 되는 순간은 해방처럼 보이지만, 그 전환은 우리가 사랑하던 것의 성질 자체를 바꿔 놓는다. 이 글은 취미가 산업으로 넘어가는 문턱을 따라가며, 그 길목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를 묻는다.
당신이 주말마다 여는 보드게임 모임을 떠올려 보자. 처음엔 친구들과 상자를 펼치는 일이었다. 그러다 누군가 크라우드펀딩으로 신작을 지르고, 누군가는 언박싱 영상을 올리고, 누군가는 소규모 카페를 차린다. 어느새 취미는 취향을 넘어 지출 항목이 되고, 지출은 누군가의 매출이 된다.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도 식지 않았는데도, 그 마음 주위로 어느새 산업이 자라 있다. 취미가 산업이 되는 순간은 대개 이렇게, 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이 찾아온다.
이 전환은 새로운 현상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취미'라는 것 자체가 산업의 발명품이다. 문제는 좋아하는 일이 언제 산업이 되느냐가 아니라, 이미 산업이 만들어 준 여가 위에서 우리가 무엇을 다시 얻고 잃느냐다.
여가라는 발명품, 취미라는 범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과 여가의 분리'는 인류 역사에서 꽤 최근의 일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노동은 계절과 관습, 성인의 축일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하는 탄력적인 것이었다. 일과 쉼의 경계가 흐릿했다. 공장이 시간을 정확히 계량해 임금을 매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근무 시간'과 '그 바깥의 시간'이 심리적·문화적으로 갈라졌다. 노동운동이 8시간 노동과 주 5일제를 밀어붙이며 만들어 낸 그 '바깥의 시간'이, 오늘 우리가 취미라 부르는 것이 자라날 토양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하비(hobby)'라는 단어의 이력이다. 18세기까지 이 말은 목마(hobby horse)에서 온, 사소하고 우스꽝스러운 집착을 뜻했다. 19세기를 거치며 단어는 말(馬)의 흔적을 벗고, 자유 시간을 보내는 건전하고 교양 있는 방식이라는 뜻으로 격상됐다. 왜였을까. 늘어난 여가와 그 여가를 채운 술집·극장·놀이공원이 당대 사람들에게는 방종과 불온한 사상의 온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취미는 그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유익하고 적절하며 사회적으로 승인된' 여가로 포장되었다.
다시 말해 취미는 처음부터 순수한 사적 열정이 아니라, 여가를 관리 가능한 소비의 범주로 길들이는 장치이기도 했다.
취미가 산업이 되는 첫 번째 상품화는 이미 이 지점에서 완료되어 있었던 셈이다. 우표 수집도, 원예도, 뜨개질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도구와 잡지와 상점을 낳았다. 오늘의 변화는 이 오래된 이야기의 새 판본이다. 다만 그 판본은 훨씬 빠르고, 훨씬 개인적이며, 훨씬 규모가 크다.

좋아하는 마음이 인프라가 될 때
무엇이 달라졌나. 세 개의 개념이 오늘의 전환을 떠받친다.
첫째는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다. 1971년, 훗날 노벨경제학상을 받는 허버트 사이먼은 정보가 넘쳐나는 세계에서 진짜로 희소해지는 자원이 무엇인지를 짚었다. 그의 문장은 지금 읽어도 서늘하다.
"정보의 풍요는 다른 무언가의 결핍을 낳는다. 정보가 소비하는 것은 명백하다. 바로 그 수용자의 주의(attention)다. 정보의 풍요는 주의의 빈곤을 낳는다." — 허버트 사이먼, 1971
취미는 이 희소한 주의를 붙드는 데 유난히 강력하다. 열정은 곧 지속적인 관심이고, 관심은 오늘날 곧바로 화폐로 환산된다. 그래서 두 번째 개념, 크리에이터 경제가 등장한다. 유튜브·패트리온·킥스타터는 좋아하는 것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심을 직접 수익으로 바꾸는 배관을 깔았다. 한 시장 추정에 따르면 2025년 크리에이터 경제의 규모는 1,8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전 세계 콘텐츠 창작자는 2억 명을 헤아린다. 유튜브는 4년간 크리에이터에게 1,000억 달러 이상을 지급했다고 밝혔고, 패트리온의 누적 지급액은 100억 달러를 넘었다. 취미가 생계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더 이상 수사가 아니다.
세 번째는 롱테일이다. 2004년 크리스 앤더슨은 디지털 유통이 진열 공간의 물리적 한계를 지우면서, 개별로는 작아도 모으면 거대한 니치 시장의 시대가 온다고 선언했다. 프리다이빙 장비, 특정 향의 싱글 오리진 원두, 규칙이 유별나게 복잡한 보드게임 — 예전이라면 상점에 놓일 자격조차 없던 취향들이 이제는 저마다의 판매자와 만난다. 실제로 보드게임 시장은 한 조사 기준 2025년 약 187억 달러 규모로, 두 자릿수 성장률을 이어 가고 있고, 니치 신작 출시는 크라우드펀딩에 힘입어 매년 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앤더슨의 예언에는 반론도 많다. 관심이 무한히 흩어지기는커녕 소수의 히트작으로 더 쏠렸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뒤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관심 경제가 열정을 값나가는 자원으로 만들고, 크리에이터 경제가 그것을 현금화할 배관을 깔고, 롱테일이 아무리 좁은 취향에도 시장이 붙을 수 있게 했다. 취미가 산업이 되는 문턱은 이 세 힘이 만나는 자리에 놓여 있다.

왜 하필 취미가 돈이 되는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취미에 그토록 기꺼이 지갑을 여는가. 답은 경제가 아니라 심리에 있다.
취미는 소비가 아니라 정체성이다. 팬덤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팬 문화에 뛰어드는 근본 동기로 '소속의 욕구'를 꼽는다. 팬덤은 의례와 은어와 전통을 갖춘 하나의 가족처럼 작동하며, 사회정체성 이론이 말하듯 우리는 우리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자아의 상당 부분을 길어 올린다. 무언가를 수집하고, 그 취향을 남에게 내보이고, 같은 것을 사랑하는 이들과 은어로 대화할 때, 취미는 '내가 무엇을 하는가'를 넘어 '내가 누구인가'의 문제가 된다.
바로 이 지점이 산업이 파고드는 틈이다. 소비가 정체성일 때, 지출은 낭비가 아니라 자기표현이 된다. K팝 팬덤을 보라. 국내 팬덤 경제는 2023년 기준 약 8조 원 규모로 추산되며 매년 두 자릿수로 성장하고 있다. 라이트스틱과 포토카드, 팬미팅과 팝업스토어가 거대한 산업을 이룬다. 한 대형 기획사는 최근 3년간 굿즈 매출만 1조 원을 넘겼고, 이는 전체 매출의 5분의 1에 육박한다. 팬은 더 이상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소비하고 재생산하며 기업의 마케팅 전략까지 움직이는 능동적 행위자다. '덕질'이 경제를 구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좋아하는 마음이 공동체가 되고, 공동체가 창작자를 먹여 살리고, 창작자가 다시 그 마음에 응답한다. 문제는 이 선순환의 그림자가 정확히 같은 메커니즘에서 자라난다는 데 있다.

열정이라는 이름의 함정
'좋아하는 일을 하면 성공한다'는 우리 시대의 복음이다. 저널리스트 애덤 데이비슨은 『패션 이코노미』에서, 서구 경제가 희생 기반 노동에서 열정 기반 노동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누구든 자신만의 가치와 열정을 발굴해 번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매력적인 서사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이 모델은 이미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의 것이라는 점이다. 데이비슨 자신도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이 길이 열려 있느냐는 질문에 "적어도 지금은 아닐 것"이라고 인정했다. 둘째, 생존 편향이다. 열정을 좇아 성공한 이야기 뒤에는, 요리에 대한 사랑이 형편없는 식당으로, 취미가 빚과 폐업으로 끝난 무수한 사례가 통계에서 지워져 있다.
더 날카로운 문제는 열정 그 자체가 착취의 알리바이가 된다는 데 있다. 2019년 김재윤·트로이 캠벨·스티븐 셰퍼드·에런 케이는 『성격 및 사회심리학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를 **'열정 착취의 정당화(legitimization of passion exploitation)'**라 이름 붙였다. 7개의 실험과 메타분석을 관통하는 결론은 명료하다.
노동자가 자기 일에 '열정적'이라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그를 무급 초과근무나 직무와 무관한 하찮은 일에 동원하는 것을 더 정당하게 받아들인다.
연구진은 그 심리적 배관까지 짚었다. 하나는 '열정적인 사람이라면 어차피 자원했을 것'이라는 가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사람에게는 일 자체가 이미 보상'이라는 믿음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예술가나 사회복지사처럼 '사랑으로 하는 일'로 여겨지는 직업의 노동자를, 상점 점원 같은 직업의 노동자보다 더 착취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좋아한다는 사실이 정당한 대가를 깎을 명분이 되는 것이다. 여러 대학 공동 연구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조언은 노동을 열정의 언어로 감싸, 그것이 결국 하나의 '일'임을 우리가 잊게 만드는 번아웃의 덫일 수 있다.
숫자는 이 그림자를 더 차갑게 확인해 준다. 크리에이터 경제의 화려한 총량 뒤에서, 절반의 창작자는 연 1만 5,000달러 미만을 번다. 유튜브 상위 3%가 창작자 순수익의 90%를 가져가고, 패트리온에서도 상위 2%가 월 2만 5,000달러 넘게 버는 동안 전형적인 창작자는 월 500달러 언저리에 머문다. 앞서 미뤄 둔 롱테일의 반론이 여기서 돌아온다. 무한한 진열대는 모두에게 기회를 준 것이 아니라, 극소수에게 관심을 더 몰아주었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은 분명 늘었지만, 그 대부분에게 취미의 산업화는 부업의 고단함이자 사랑하던 일이 KPI로 환산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문턱에서, 판단을 미루지 않고 견디기
그렇다면 취미의 산업화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이 질문에 깔끔한 답을 내미는 순간, 우리는 이 글이 피하려 한 두 가지 유혹 중 하나에 빠진다. 상업화를 순수의 타락으로 보는 냉소, 아니면 좋아하는 일로 먹고사는 시대를 무해한 해방으로 예찬하는 낙관.
진실은 둘을 동시에 붙들 때만 보인다. 산업은 분명 준다. 프리다이빙 강사도, 보드게임 디자이너도, 뜨개질 유튜버도, 한 세대 전이라면 불가능했을 방식으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 니치한 취향은 이제 외롭지 않고, 같은 것을 사랑하는 이들은 세계 어디서든 서로를 찾는다. 크라우드펀딩은 대형 자본의 허락 없이 이상한 아이디어가 세상에 나오게 했다. 이것은 사소한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산업은 그만큼 가져간다. 에츠이가 '핸드메이드'라는 정체성 위에 세워졌다가 대량생산품의 유입으로 그 고유함을 잃어 가며 "상거래를 인간답게"라는 캠페인으로 뒤늦게 방어에 나선 풍경은, 취미의 산업화가 공통으로 치르는 비용의 축소판이다. 시장은 우리가 사랑하던 것을 확장하는 동시에 평준화하고, 진정성을 자산으로 바꾸는 순간 바로 그 진정성을 위협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지표가 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좋아하는 방식을 시장이 보상하는 쪽으로 조금씩 고쳐 쓰게 된다.

그래서 문턱에 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찬반의 선택이 아니라 분별이다. 무엇을 산업에 맡기고 무엇을 시장 바깥에 남겨 둘지, 어떤 취미는 끝내 돈이 되지 않은 채로 지켜 낼지. 취미가 산업이 되는 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다만 그 문턱을 넘을 때,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손에 쥐고 무엇을 내려놓는지를 아는 것 — 어쩌면 그것이, 사랑하는 일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