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은 원래 낫는 곳이 아니었다 — 병원을 바꾼 건 지식이 아니라 옮길 수 없는 기계였다
1869년 집계에서 시골 절단 수술 2,098건의 사망률은 11퍼센트, 병상 300개 넘는 병원은 41퍼센트였다
19세기 중반까지 병원은 치료 시설이 아니라 자선 시설이었다. 돈이 있으면 집에서 의사를 불렀고, 통계는 실제로 집이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심프슨이 모은 시골 절단 수술 2,098건의 사망률은 11퍼센트, 병상 300개가 넘는 병원은 41퍼센트였다. 이 건물을 모두가 가는 곳으로 뒤집은 것은 의학 지식이 아니라 왕진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1788년 파리, 자크 트농은 오텔디외의 병실을 하나씩 세며 돌아다녔다. 천연두 병동에서 그가 본 것은 폭이 5피트, 그러니까 1.5미터도 안 되는 침대 하나에 어른 여섯이 누운 광경이었다. 아이라면 여덟까지 올라갔다. 침대 위 천개에 판을 얹어 이층으로 사람을 눕힌 곳도 있었다. 센강 한복판에 선 이 병원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이름난 병원이었고, 동시에 유럽에서 사망률이 가장 높은 병원으로 꼽혔다. 열이 오른 파리 시민이 오텔디외로 실려 간다는 건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를 집에서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 우리는 아프면 병원에 간다. 심하게 아플수록 더 빨리 간다. 이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것이 고작 백 년 남짓 된 습관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19세기 중반까지 병원은 치료 시설이 아니라 자선 시설이었다. 돈이 있으면 집에 의사를 불렀다. 수술도, 출산도, 임종도 자기 침대에서 했다. 병원은 그럴 침대가 없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었다.
이 글의 주장은 하나다. 병원을 뒤집은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옮길 수 없는 것이었다.
병원은 의학보다 훨씬 오래됐다
가장 흔한 오해는 순서에 있다. 의학이 발전해서 병원이 생겼다고들 생각한다. 반대다. 병원은 과학적 의학보다 천오백 년쯤 앞서 존재했다.
비잔틴 제국에는 크세논이라 불린 시설이 있었다. 7세기 전반의 삼손 크세논은 외래 진료와 입원, 수술 기록이 함께 남은 이른 사례로 꼽힌다. 8세기 이슬람 세계의 비마리스탄은 페르시아어로 그냥 '아픈 사람의 자리'라는 뜻이다. 중세 유럽의 오텔디외는 '신의 집'이었다. 이름들이 말해주는 바가 분명하다. 이 건물들의 목적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갈 데 없는 사람을 거두는 것이었다.
그래서 입원 자격을 정한 것은 진단이 아니라 처지였다. 가난한가, 혼자인가, 떠돌이인가, 거둬줄 가족이 있는가. 중산층 이상은 아무리 위중해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사정은 같아서, 19세기 내내 시설에서 의료를 받은 사람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가난한 이들이었다. 형편이 되는 집은 환자를 집에서 간호했다.

병원은 오랫동안 병을 고치는 장소가 아니라, 돌봐줄 사람이 없는 몸을 받아주는 장소였다. 입원은 진단의 결과가 아니라 처지의 증명이었다.
숫자는 집이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취향의 문제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19세기 통계는 훨씬 불편한 말을 한다. 당시 병원은 집보다 위험했다.
1869년 제임스 영 심프슨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절단 수술 성적을 모아 '호스피털리즘'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병원 자체가 일으키는 병이라는 뜻이다. 그는 시골 외과의 374명에게서 병원 밖에서 이루어진 절단 수술 2,098건을 모았다. 사망은 226명, 약 11퍼센트였다. 반면 병상 300개가 넘는 큰 병원에서 같은 수술을 받은 환자는 41퍼센트 넘게 죽었다. 심프슨이 찾아낸 규칙은 잔인할 만큼 단순했다. 병상이 많을수록 사망률이 올라갔다.

우리 외과 병원의 수술대에 눕혀진 사람은 워털루 전장에 섰던 영국 병사보다 죽을 위험이 크다.
심프슨은 이 차이를 환기와 1인당 공기량으로 설명했다. 원인 해석은 틀렸지만 방향은 맞았다. 사람을 촘촘히 모아둔 건물이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출산 쪽 숫자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빈 종합병원에서 이그나츠 제멜바이스가 본 것은 두 병동의 격차였다. 1840년부터 1846년까지 의대생이 드나든 제1병동의 산모 사망률은 출생 1,000건당 98.4명, 조산사가 맡은 제2병동은 36.2명이었다. 백분율로 9.8퍼센트 대 3.6퍼센트. 1847년 5월 그가 염화석회로 손을 씻게 하자 이듬해 제1병동은 1,000건당 12.7명으로 떨어졌고, 제2병동의 13.3명과 거의 같아졌다.
다만 정확히 짚자. 제멜바이스의 비교는 병원 대 가정이 아니라 병동 대 병동이다. 그가 병원 밖 출산을 같은 방식으로 집계해 남긴 자료는 없다. 그래도 그를 괴롭힌 관찰이 하나 더 있었다. 제1병동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길에서 아이를 낳은 여자들에게서는 산욕열이 드물었다는 것이다. 수치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여자들이 그 병동을 어떻게 여겼는지는 분명하다. 입원을 피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던 시절이 있었다.
나이팅게일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복잡하다
병원사에서 가장 널리 퍼진 장면은 스쿠타리다. 1854년 11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 서른여덟 명과 함께 도착해 사망률을 끌어내렸다는 이야기.
실제 경과는 더 까다롭다. 그녀가 도착한 뒤에도 사망률은 내려가지 않았다. 첫 겨울 내내 올랐고 1855년 초에 정점을 찍었다. 전환점은 1855년 3월, 존 서덜랜드가 이끈 위생위원회가 들어온 뒤였다. 위원회는 막힌 하수를 뚫고 상수관에서 오물을 걷어냈다. 지붕에 창과 환기구를 내고 벽과 바닥을 석회수로 씻었다. 그 병원은 옛 묘지 위에 서 있었다. 이후 사망률은 급격히 떨어졌다. 얼마나 떨어졌는지는 자료마다 다르게 적힌다. 사망률을 연율로 환산하느냐 입원자 대비 비율로 보느냐, 기간을 어디서 끊느냐에 따라 숫자가 크게 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하나의 정확한 수치 대신 방향만 말해두는 게 맞다. 위생 공사 이후 사망률은 몇 배 규모로 떨어졌다.
이걸 나이팅게일 깎아내리기로 읽으면 핵심을 놓친다. 정작 그 해석을 가장 강하게 밀어붙인 사람이 나이팅게일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1858년 그녀가 육군성에 낸 비공개 보고서는 스쿠타리 병원군의 사망률이 크림반도 현지 병원보다 높았다고 적었다. 같은 해 그녀는 자비로 인쇄한 통계 책자에 장미도표라 불리게 될 그림을 실었다. 달마다 부채꼴을 그리고, 예방 가능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은 파랑, 부상으로 죽은 사람은 빨강, 나머지는 검정으로 칠했다. 파랑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통계로 증명하려 한 명제는 '내가 병사들을 살렸다'가 아니었다. '이 사람들을 죽인 것은 적군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넣어둔 건물'이었다. 후대가 그를 등불 든 천사로 기억하는 동안, 정작 본인은 병원이라는 구조물을 피고석에 세우고 있었다.

옮길 수 없는 것들이 도착했다
그렇다면 그 위험한 건물이 어떻게 모두가 가는 곳이 되었나.
마취부터 떼어놓자. 1846년 이후 수술은 길고 깊어졌다. 하지만 마취 자체는 환자를 병원으로 끌어오지 못했다. 에테르 병과 흡입기는 왕진 가방에 들어간다. 실제로 초기 마취 수술의 상당수는 환자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무균술도 처음엔 비슷했다. 리스터의 석탄산 분무기는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무균술이 최종적으로 자리 잡은 형태는 지식이 아니라 설비였다. 고압 증기 멸균기, 타일을 붙이고 배수를 깐 고정식 수술실, 기구를 종일 소독하는 인력, 교대로 돌아가는 근무표. 이 목록에는 가방에 들어가는 물건이 하나도 없다.
결정타는 1895년 말 뢴트겐이었다. 발표가 알려지고 몇 달 만에 런던, 파리, 글래스고, 빈, 뉴욕의 병원들이 실험실 코일과 크룩스관을 긁어모아 장비를 급조했다. 총알과 골절과 이물을 찾는 데 곧장 쓰였다. 그리고 1900년대 초가 되면 엑스레이 설비는 '제대로 된 종합병원'의 기본 품목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기계가 아니라 방이다. 새로 짓는 병원 도면에 처음부터 엑스레이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건물이 기계에 맞춰 설계되기 시작한 것이다.

검사실도 같은 논리로 움직였다. 혈액과 소변을 보고 세균을 배양하려면 현미경과 배양기, 시약, 그리고 그것만 다루는 사람이 필요하다. 진단의 무게중심이 환자의 침대에서 건물 안 특정한 방으로 옮겨갔다. 의사는 지식을 들고 다닐 수 있다. 기계는 들고 다닐 수 없다. 그래서 환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호와 회계가 건물을 경제 단위로 바꿨다
장비만으로는 부족했다. 24시간 돌아가는 병동에는 24시간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1873년 미국에서 세 곳이 동시에 간호학교를 열었다. 벨뷰, 뉴헤이븐,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나이팅게일 모델을 표방했지만 실제 운영은 병원에 딸린 도제 제도에 가까웠다. 학생 간호사가 병동 업무의 상당 부분을 떠맡았고 졸업생은 개인 간호로 빠져나갔다. 십 년 뒤 미국의 간호 교육과정은 서른다섯 곳이 되고, 1900년에는 사백에서 팔백 곳 사이로 추산된다. 병원이 앞다퉈 간호학교를 세운 이유에는 인력 공급이 컸다.
돈의 구조도 뒤집혔다. 영국 자선병원에는 오랫동안 소득 제한이 있었다. 일정 수입을 넘는 사람은 일반 병동에 들어갈 수 없었다. 중산층을 받는 것이 자선기관의 성격을 해친다고 봤기 때문이다. 20세기 초가 되자 병원들은 돈 내는 환자를 위한 별도 병실을 만들기 시작한다. 일반 병동이 주당 최대 1기니였다면 사설 병실은 최대 10기니였고, 이건 기부금이 아니라 치료 원가를 덮는 고정 요금이었다. 미국에서 병원 수는 1873년 178곳에서 1909년 약 4,400곳으로 불어난다. 1910년 집계에서는 자선기관으로 보고된 병원의 45.6퍼센트가 공적 지원을 받았지만, 수입의 가장 큰 몫은 환자가 낸 치료비였다.
자선이 매출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매출이 생기자 병원은 스스로 몸집을 불릴 이유를 갖게 됐다.

아는 것이 아니라 옮길 수 없는 것
물론 지식도 필요했다. 세균설 없이 멸균기만 있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순서를 보라. 리스터의 논문은 1867년이고 세균설은 1870년대에 이미 널리 퍼졌다. 병원의 성격이 실제로 뒤집힌 것은 1890년대 이후다. 그 이십여 년의 간격에 들어온 것이 엑스레이와 검사실과 고정식 수술실, 즉 옮길 수 없는 물건들이다.
검증 방법은 간단하다. 왕진 가방에 들어가는 혁신은 의료를 계속 집에 머물게 했다. 청진기, 체온계, 주사기, 나중에는 알약이 된 항생제까지. 반대로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은 예외 없이 환자를 건물 쪽으로 끌어당겼다. 병원의 승리는 의학이 집을 설득한 결과가 아니라, 장비가 집을 이긴 결과였다.
이 관점이 유용한 이유는 지금도 같은 저울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휴대용 초음파, 가정용 투석기, 원격 판독은 저울의 반대편에 놓이는 무게다. 병원을 만든 힘이 '옮길 수 없음'이었다면,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이 늘어날수록 그 힘은 약해진다.
병원이 낫는 곳이 된 건 생각보다 최근의 일이고, 생각보다 우연에 가까웠다. 오텔디외의 한 침대에 여섯이 누워 있던 것이 겨우 이백여 년 전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건물은 인류가 오래 가지고 있던 자선의 껍데기에, 옮길 수 없는 기계들이 뒤늦게 들어앉아 만들어진 결과다.